미국의 서커스 역사를 소재로 아주 담백하고 재미있게 쓴 소설, 간간이 실린 서커스와 관련 된 그 시대의 사진들 또한 책 내용에 가미되어 감칠맛 나는 풍미를 전한다.

그리고 1인칭 시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그 안에서의 서술은 액자소설의 형식을 보여주며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또한 이 책은 단연코 미적인 언어 보다는 스토리에 집중하여 쓴 소설이다.

그에 걸맞게 문장은 단순하여 스토리에 필요한 배경묘사와 인물묘사, 그리고 심리묘사조차 장황하지 않다.

옮긴이도 나중에 언급 하지만 화면에 비친 영화의 장면을 설명해주는 듯한 정도의 묘사력이다. 그럼에도 문장력이 약하다거나 하는 그런 단점의 느낌을 전혀 주지 않고 오히려 깔끔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런 차원에서 많은 소설들이 영화화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반대로 영화가 완성 된 후 소설로 옮겨 쓴 듯한 느낌까지 줄 정도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다 읽고 나서 영화로도 만들어지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도중에라도 내가 읽는 이 부분이 영화로 찍어진다면 이런 모습이겠구나, 라는 상상을 너무나 뚜렷하게 남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런 깔끔한 영화적인 스토리를 지향하고자 하는 작가들에게는 교과서의 역할도 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적당한 속도감과 군더더기 없는 설명적인 문장들 속에서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든다는 점을 연구해 본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사실 서커스를 소재로 이야기를 펼친다고 하면 왠지 아이러니 하게도 슬픈 연상이 먼저 떠오른다. 화려함이 주는 환상에 파묻혀진 서커스 단원들의 고단한 삶 때문에 말이다. 예로 들자면 피에로가 우리들에게 선사하는 그러한 아이러니이다. 사람인지만 관객들에게 천막 안에 수북이 쌓여진 재미있는 장난감 노릇을 해 주는 그들을 바라볼 때 느끼는 그 기분.

하지만 이 소설은 그 전형에서도 벗어나고 있으며 오히려 그것을 장점으로 전환시킨다.

마치 서커스와도 같이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는 곳에 굳이 그 안에 숨겨진 비인간적인 삶이 전하는 애잔함을 느낄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고 주장하듯.

작가는 그런 관점에서 우선순위를 잘 선택했다.

일단 재미를 앞에 두고 그런 애잔함은 즐거운 시간을 가진 후에 먼발치에서 한 번쯤 느껴보도록 하게 만든 것이다.

회상 시점을 미국 대공황 시절에 둔 점, 그리고 앞에 언급한 서커스와 관련 된 그 시대의 사진들이 갖고 있는 상징성은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다.

그다지 오락 거리가 풍부하지 않던 시절에 그것이 비록 아무리 돈을 주고받는 상업적인 관계였다고는 하지만 어려운 시절 즐거운 시간이라고 하는 추억을 남겨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바로 저 안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나름의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대중 앞에서 행한 그들의 노고에 대하여. 쇼는 반드시 계속 되어져야 한다, 라는 말이 있듯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도 죽을 때까지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라는 숨겨진 상징성을 알려주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끝이 그렇게 맺어지는 것도 분명 작가가 그 사실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난 내 구두와 사랑에 빠졌어

내 구두도 틀림없이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믿었어

내 구두가 잔인하게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을 듣고서야

나는 그것이 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나는 지미 추 황금 구두와 데이트하는 것이 더 좋아.”』

위의 글은 영국의 명품 구두 브랜드 지미 추가 런던의 하비 니콜스 매장 오픈 기념 파티를 열고 있을 때, 이 회사의 창업자 중 한 명이기도 한 타마라 멜론이 직접 쓰고 낭독한 시다.

가만히 보면 정신병원에서 치료 중인 심한 슈즈홀릭 환자가 쓴 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단순히 그녀가 쇼핑객의 입장이었다면 모를까, 명품 구두 회사의 창업자이자 디자이너로서 쓴 이상 구두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상품에 대한 열정과 신뢰의 표현이라 봐 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권의 경영서적인 이 책을 읽고나면 더욱 더 그렇게 느끼게 될 것이다.

사실 회사나 사람이나 유기적인 성장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생물체인 사람과 달리 무생물 차원의 회사는 숫자를 통해 성장을 증명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그들 모두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특히 회사의 이야기는 창업주와의 연결 고리로 단단히 이어져 있다.

물론 ‘지미 추’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 회사는 기존의 것들이 가진 특히 다른 명품 회사들이 만든 이야기들의 형태와 많이 다르다.

우선 이 회사는 자사를 대표하는 얼굴로 회사 이름과는 달리 아이러니 하게도 구두 디자이너인 ‘지미 추’가 아니라 창업주인 ‘타마라 멜론’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상 놀랍게도 구두 디자이너로서 회사에서의 지미의 역할은 이미 시작 당시부터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사실 디자이너 지미 추의 구두가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디자인 보다는 기능적인 면, 예를 들자면 구두가 힐임에도 상당히 편안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일단 그러한 소문은 명품들에게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일종의 장인 정신과 부합된다. 그리고 실제로 지미 추의 신발은 영국의 상류층 인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다이아나 비와 그가 친구가 될 만큼.

그런 그의 이야기가 이 회사 이야기에는 상당히 축소되어져 있다.

분명 회사의 간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회사를 건립 할 당시에는 지미 추가 디자인에 관련 된 일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돈을 댄 창업주 가족 및 경영인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알력이 더 커가는 바람에 그는 예상 외로 일찌감치 손을 일찍 뗀다. 오히려 책은 회사 이야기인 만큼 그리고 회사 이름을 생각해 본다면 엉뚱한 주인으로서의 회사 얼굴마담 격인 타마라 멜론의 역할에 더 주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점은 현대 사회에서 상품보다 마케팅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예로 해석되어 지기도 한다.

아무튼 짧은 역사와 간판만 디자이너의 이름을 빌리다시피 해서 달려온 이 회사가 그것도 명품 이미지로 지금까지 잘 성장해 왔고, 더군다나 그 사이 3번의 회사 인수 과정에서 높은 가격에 매매가 이뤄진 순간의 이야기들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를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은 평전이나 자서전이 아닌 경영서적의 이미지를 갖추게 되었다. 책의 이러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저자 중의 한 명이 투자 전문가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럴 정도로 저자는 책을 통해 상당히 상세하다 싶을 정도의 지미 추 매각과 관련 된 이야기들을 펼치고 있으며, 회사 경영차원의 분석과 더불어 현재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명품 기업들에 관한 성장배경과 대결 구도 이야기 또한 흥미롭고 폭넓게 풀어 놓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면 특정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그곳과 관련 된 사람들과 상품 이야기에서 치장이라든가 미화 된 모습이 많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어느 특정 회사를 논하는 이런 책들을 보면 소비자를 유혹하기 위한 또 하나의 광고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저자들이 모은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지극히 객관화된 시각과 거리감을 두어 한 명품회사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나서 명품에 관한 기대와 환상, 그리고 거기에 따른 지출의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경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익과 관련 된 권력과 배금주의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일 때, 혹은 반대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예술과 같은 창조적인 분야, 그리고 학문과 같은 연구체제 속에서는 그러한 시각이 발상의 전환이라 하여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지만, 일반 사회의 관점에서는 정신병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예를 들면, 밥을 법이라고 한다거나 말을 물이라고 한다거나 머리를 엉덩이라고 한다거나. 아무튼 그런 사람이 있다면 행동도 당연 그럴 만큼 예의 병자로 그리고 반사회적인 인물로 낙인찍힐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떤 존재에 대한 해석을 의미할 때엔 그 사람의 개성이나 성격 등으로 변환되어 시각의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혹은 감정의 상태에 따라 그럴 수 있다, 라는 상대방의 이해심을 얻기는 하나, 그것이 평범한 대화의 소통으로 이어질 때엔 차라리 서로 침묵하기를 바라게 된다.

쉽게 말해 말이 안 통해서인데, 상대방의 정서적인 이해의 요구를 위해 같은 언어로 소통함에도, 문법과 문장부호가 맞게 표시되어 입이나 글로 표현됨에도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급기야 언어는 부조리의 대상으로 탈바꿈되어진다.

이 책에 실린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들은 바로 저러한 상황들을 대변하고 있다.

처음에 읽을 때는 등장인물들이 뭔 소리에 뭔 짓거리들을 하고 있나 할 정도로 정신이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어수선함 속에서 한 편의 코미디를 보듯 가끔 가벼운 웃음이 나오며, 최후엔 소통과 관련 된 강한 씁쓸함이 남는다.

그것은 예의 기준이고 뭐고 간에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고, 반대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묘한 오기를 동반한, 하지만 왠지 모르게 서글프기도 한 씁쓸함이다.

우선 ‘대머리 여가수’라는 작품에서는 말이 되는 이야기를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상황이 연출되어지는데, 이 작품의 제목과도 같이 전혀 의미도 없는 이야기들만 되풀이 되는 상황들의 반복 재생을 보면서 마치 우리, 혹은 나의 삶도 대본만을 달달 외워 매일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연극 속 배우가 아닐까, 라는 슬픈 심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수업’이라는 작품은 교수와 제자의 수업상황을 통해 지식적인 측면에서의 교육과 언어가 일으키는 폭력성을 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오네스코는 이성 속 비이성적 이중성에 늘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잔혹한 거울을 대면시킨다.

마지막으로 ‘의자’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지독한 고독감과 공허감이 잔재로 남는다.

그것은 형체가 보이지 않는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말하며 그들의 편의와 접대, 그리고 배려를 위해 의자를 제공하며 상대하기 바쁜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나타나며 진실과 진심 없는 언어적 형식과 예의에 관한 허무감이기도 하다.

고로 그 허무감을 극복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최후의 모습은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닌 죽은 언어를 주고받는 순간에서의 아픔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 책은 감상적인 측면에서(물론 이것은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작품해석이기는 하지만) 후폭풍이 강하게 이는 면모를 보인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저 장난기 섞인 말장난인 듯한 대사들을 읽을 때엔 그 말들을 듣기에 바빠 잘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다 읽고 난 후, 그 상황들에 대한 이해가 꽃과 같이 승화되어 피면서 그 안에 숨은 꿀을 맛보듯 말, 혹은 언어와 관련된 여러 감정들이 독자의 깊은 마음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오게 하는 기막힌 뒷심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언어, 혹은 말과 관련 된 속담이나 격언이 무수히 많다.

그 만큼 쉽지만 남용되어지고 잘 못 쓰일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리라.

사실 언어가 가진 절대적이고도 올바른 기능을 간파하기란 인간으로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말보다 행동을 우선시하는 것, 행동보다 말을 우선시하는 것 모두 조심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우리에게 보편적인 기능으로서의 언어와 행동이 갖추고 있는 부조리를 절묘하게 묘사시키며 비판하고 비난하고 있다,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비판과 비난을 언어에 관한 허무함으로만 해석한다면 우리 모두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언어가 가진 어떤 몰이해의 증거를 위해서가 아닌, 그 반대의 장점들에 대한 숙고를 위해 읽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