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솔깃해질 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저자가 4인칭 서술을 시도한다는 점과 그녀의 아버지가 ‘인간실격’을 쓴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점이다.

먼저 4인칭은 일본의 사소설이 한계처럼 갖고 있다하는 상상력의 부재를 원주민족 아이누의 서사시와 같은 구승(구비)문학을 이용해 주격인 ‘나’의 의미를 확장시킨 것으로 이것을 통해 저자는 신의 목소리와 인간 내면의 목소리를 따로 구분해 보려는 의식적인 시도를 감행한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읽는 동안 이런 것을 4인칭이라 할 수 있는 거구나 라고 의미부여 정도만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독서 도중에 나의 집중력 탓인지 말하는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고는 앞장으로 다시 돌아가 확인해 보는 경험도 하기는 했지만 결국엔 일반적인 소설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소설이 인칭을 빗대어 ‘나’를 강조하는 바람에 독자로 하여금 ‘나’에 대한 글자의 흐름에 귀추가 주목 되도록 함엔 틀림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각각의 소설들이 전하는 주된 느낌은 애잔하고 쓸쓸한 추억이다. 그것은 실에 하나하나 진주를 연결하여 만든 목걸이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의 ‘나’는 반짝거린다. 그 일관성에서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 작가는 각기 다른 이야기지만 그냥 진주든 흑진주든 서로 반짝거리는 빛은 서로 같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 다음은 그녀의 아버지 ‘다자이 오사무’에 관한 것인데, 사실 사소설로 유명했던 것이 그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들 속에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얼마나 반영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작가는 분명 기존의 사소설에 대한 스스로의 저항감을 감안하여 이 소설집을 구성하게 됐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 아무튼 ‘나’의 이야기가 사소설의 주된 소제이자 주재라는 점에서 문학에서의 ‘나’가 갖는 의미에 대한 작가로서 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 테고, 그런 ‘나’를 아이디어로 삼아 글을 엮은 그녀의 감각이 신선해 보인다.

그런데 그런 생각 속에서 문득 이 책이 보여주는 모든 결과물은 책 표지에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색깔의 작은 ‘나’가 무수히 겹쳐져 있는 패턴 속에 큰 ‘나’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이 책의 표지에.

그리고 표지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그 큰 ‘나’가 작은 ‘나’들의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나’란 바로 그것이라는 듯.

그것은 ‘나’로부터 자유스러운 또 하나의 ‘나’라는 자각을 일깨워줬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라는 것.

어느 순간에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라는 것.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을 속의 내용보다 표지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은 책으로 기억에 남긴다.

 

배우들은 저마다 연기가 끝나고 맡은 배역으로부터 실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 쉽거나 어렵다고들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배우들은 어쩌면 행운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서 최소한의 답을 알고 있는 이들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누구누구와 배우 누구누구로서의 확연한 차이를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도 더 잘 알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연극배우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묘한 것이 이 소설은 오디션 경쟁을 통해 여배우로서의 자질을 검증받는 것이 더 크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이야기의 진정한 매력은 그러함 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고 자신을 버리는 과정의 모습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독자로 하여금 들게 한다는 점이다.

그런 모습은 최종 오디션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렌치를 연기하는 교코와 아스카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모두가 극 중의 블렌치가 되어 이야기 너머에 있는 그 어떤 사실감을 발견하게 되는 몰입의 순간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배우들은 역할의 세계로 들어가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이 아주 힘든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써도 그 안에서 숨쉬고 말하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렇게 배우로써 핏줄부터 타고 태어나 자랐지만 그래서 점점 더 자신의 길을 의심케 되는 여배우와 배우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초짜 여배우의 이야기는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의 몰입에서부터 비로소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해서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에서의 무경계선을 보여준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순간 속의 몰입을 우리 일상에서도 찾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마지막에 항상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고대로 따라하던 아스카가 그렇게 분석하는 눈에서 보는 눈으로 바뀌어 지는 시점이 바로 그것이다.

『어린아이가 분수에서 물장난을 쳐요. 막 까르르까르르 웃고, 아주 즐거워 보여요. 저 애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이랑 맞닿아서 흥분하는 거겠죠. 지금 저 애한테는 차가운 물의 기분 좋은 감촉,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물만이 세상의 전부고, 가까이서 지켜보는 엄마도, 다른 애들도 전혀 머리에 안 들어와요. 멀리서 제가 이렇게 저 애를 보면서 저 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도 몰라요. 지금은 분수랑 저 애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닐까 싶어요.』

개인적으로 너무 뜬금없다 할 정도로 이야기에 같이 녹지 못하고 갑자기 따로 펼쳐진 아스카에 대한 인물설명과 배우들이 저마다 깨우치는 희열의 설명이 독자에게 감정까지는 전달하지만 이입까지 만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작가에게 남기게 하지만, 평범한 것을 글로써 미스터리하게 펼치는 작가 그녀의 재주는 생생히 살아있는 작품이란 인상을 갖게 한 작품이다.

더더군다나 이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 모두가 신성화 될 수 있음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렇다, 무대는 어디까지나 소우주. 그곳에는 영구한 시간이 흐르고, 귀족의 성도, 망망대해도 나타날 수 있다. 과거도 미래도 마음먹은 대로. 무대에는 늘 우리의 전부가 있다.』

우리의 삶이 곧 무대라고 하는 말,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우선 전부가 있음을 알 때, 그리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이용해 각자 창조 할 수 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듯….

 

 

얼마 전에 시각장애인들이 찍었다는 사진들을 인터넷을 통해 감상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시각 장애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찍어낸 사진들은 말 그대로 우리들이 본 것을 찍었을 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단순한 사실이 아주 큰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생각지 않고 찍었다는 순수함이 강하게 밀려 왔기 때문이다. 과감한 구도라든가 그들의 시력은 아주 가까이 가야만 겨우 볼 수 있다함을 알려 주듯 사물을 밀착하여 잡아당기는 것이 어쩌면 그들 눈에는 이미 카메라의 줌 기능이 장착되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러한 사진들 중에는 개를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불현듯 맹인안내견이 떠올랐다. 그 찍힌 개가 안내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개가 사람에게 길을 안내해준다, 라는 말은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단순히 말하자면 그것은 도움이지만, 다르게 해석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인간관계가 갖춰야 할 덕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과 같은 그런 느낌 때문에.

이 책은 일본 영화 ‘퀼(Quill)'의 원작이다.

나도 저 영화를 오래 전에 감상한 적이 있는데, 실제의 주인공을 이렇게 사진으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그런 반가움의 원인을 내가 개를 아주 좋아한다는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사실은 흑백 사진에 담긴 사람들과 쿠이루와의 따뜻한 관계를 다시금 엿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 이유에서 감동도 감동이지만 쿠이루의 탄생과 더불어 안내견이 되기 위한 조건과 훈련과정, 그리고 자신의 주인을 만나 생활하는 모습과 마지막 생의 순간까지의 그 모두를 담은 이 책은 앞서 말했듯 순수한 관계에 대한 결정체를 다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각 장애인이지만 개를 싫어하여 개에게 길 안내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느끼던 쿠이루의 주인 ‘와타나베’씨의 변화가 바로 그 결정체다.

쿠이루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보여준 것은 진지함이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진지한 것이 아니라 서로 진지하기 때문에 저절로 사랑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순수한 진지함이. 그만큼 원래의 주인, 퍼피워커(강아지를 길러주는 자원 봉사자) 부부, 조련사, 와타나베 씨, 그리고 사진가와 글을 쓴 작가, 그들 모두는 쿠이루를 진지하게 대했고, 쿠이루는 그들 모두에게 진지하게 다가갔다.

갈매기 모양의 털 무늬를 가지고 태어났던 쿠이루. 그래서 어릴 때 이름이 조나단이였던 쿠이루. 그러고 보니 나는 새만큼이나 길을 훤히 볼 수 있는 동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고로 원래 주인의 생각대로 쿠이루에겐 안내견으로서의 삶이 운명이었을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그 운명자체가 중요하진 않다. 모든 중요한 사항은 쿠이루의 삶 과정에 녹아 있었고 쿠이루가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래 전 저 세상으로 간 쿠이루는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그런 진지한 모습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