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 보면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묘한 사진이군요. 이렇게 여러 가지 표정이 함께 찍한 사진은 본 적이 없어요.”

(……) 그녀는 라이카 M2를 바라보며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제가 바보죠.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모였는데, 사진을 찍는 순간 ‘자, 모두 치즈’라고 했으니……. 그랬더니 친구가 철딱서니 없다며 화를 내더군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웃겨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고, 또 슬퍼지기도 했고……그래서 이런 사진이 된 거예요.”

바로 어제의 추억처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사진이란 참 좋은 거예요.”』

저 대목을 읽는 순간 사진이란 저런 것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부분이 여기저기에서 묻어 나오기는 하지만 저 부분은 그 중에서도 엑기스와 같다고나 할까.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도 무의식중에 웃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사진을 찍는 자리가 될 것이다. 왜 웃는지도, 왜 웃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미소 짓게 되는 바로 그 자리. 하물며 영정 사진을 찍는 줄 알면서도 웃는 게 사람이다.

행복하지 않아도, 기쁘지 않아도 웃을 수 있는 권리는 그렇게 존재되어지는 것이다.

카메라라는 도구를 사용하면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런 카메라를 들고 살아온 어느 사진작가의 이야기다.

소설은 그가 간직한 추억의 에피소드들을 현재인 50대부터 젊었던 20대로 역(逆)방향으로 추적 하며 한 장 한 장 사진을 인화하듯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렇게 사진과 추억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함을 작가는 책의 차례에서부터 교묘히 반영하면서.

사진은 추억의 결과물로서 존재하지만 그것을 간직하며 바라보는 사람은 어떻게, 그리고 왜 촬영을 하게 됐는지, 그 기억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강을 헤엄쳐 올라가듯 말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상당히 단편적이라 할 수 있는 사진에 관해 기존의 의미에 한층 성숙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이든 의미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라는 식으로.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오랜 만에 예전 사진을 전공하며 공부할 때 자주 사용하고 들어봤던 현상과 인화 과정에 관한 용어라든가 이제는 오래 된 필름 카메라 이름 등을 다시 만나 볼 수 있어 읽는 재미가 나름 새로웠다. 또한 어두운 방안에서 밤을 새며(솔직히 열심히 해서였다 라기보다는 어둡고 차단 된 공간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흑백 필름을 인화 하던 기억이 붉은 암실의 암등이 갑자기 켜지듯 떠오르기도 했고.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프레임 속을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고자 셔터를 누르면, 실상 우리는 그 순간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눈을 깜빡이듯(사실 카메라 입장에서 보자면 피사체를 찍기 위해 반대로 눈을 뜨는 것이긴 하지만) 카메라 또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메라는 눈을 감고 있다가 찍는 순간에만 눈을 뜨는(셔터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소리가 찰칵인데, ‘찰나’라고 들어도 헛들은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짧은 순간을 우리는 카메라에 의지해 필름, 혹은 메모리에 담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그렇게 담겨진 사진들을 보고 더듬어 가던 기억은 그 당시 그가 보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이기도 하다.

고로 사진은 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찾아갈 때 도와주는 여행의 안내자이다.

아직 우리의 필름이 남아 있을 때, 우리가 놓쳤던 것들을 다시 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책을 다 읽고 접은 뒤, 문득 정 호승 시인이 쓴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에서 본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색깔들을 보며 아름답다, 칙칙하다, 밝다, 어둡다, 하며 보고 느낀 대로 평가하는 우리의 감정을 말할 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색을 나타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빛의 고통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모습의 고통일 것이라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저 말을 통해 우리가 세상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이면의 모습에 대해 한 번 쯤 생각해 보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저런 생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큰 일을 겪거나 이룬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속으로든 겉으로든 이런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렇게 될 때까지 그동안 몸 고생,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검은 고독 흰 고독’은 그런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1978년 세계 최초로 낭가파르바트를 단독등반으로, 그것도 무산소로 성공한 라인홀트 메스너.

그 등반 과정에서의 고독 이야기를 손수 쓴 책이 바로 ‘검은 고독, 흰 고독’이다.

그는 책의 전반부에서 1970년 낭가파르바트에서 같이 등반에 성공했다가 그만 하산 중 죽은 동생,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과의 이혼 등 주로 검은 고독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의 검은 고독은 마침내 흰 고독으로 변한다.

『나는 여기 쌓여 있는 눈과 바위와 구름의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죽음까지도 이해하게 되니까.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싶고 느끼고 싶다. 고독이 더 이상 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고요 속에서 분명히 나는 새로운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체험한 흰 고독이었다. 이 고독은 두려움이 아닌 나의 힘이었다.』

그렇게 산과 고독은 그를 산악인이 아닌 구도자로 만들었다.

책을 통해 검은 고독이든 흰 고독이든 그 곳에는 고통이 따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빛처럼.

모든 생명도 그런 빛이란 생각이 든다.

각자의 색깔들을 발산하고 또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는 여기까지 쓴 후, 책의 표지 위에 내 시선을 다시 한 번 떨어뜨린다.

사진 속 눈 위에 홀로 핀 고독한 인간의 발자국은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교통사고로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 가는 내용의 이 소설은 비슷한 내용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물론 따로 떼어 놓기에는 그 둘 사이의 연관성이 너무나 깊어 저런 비교가치를 따진다는 것이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소설은 기억 상실증에 걸려 보지 않은 우리들에게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전한다. 사실 ‘불행한 과거를 지닌 주인공의 이야기라 그렇다, 주인공이 아름다운 추억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과거는 소중한 거다.’ 라 말 했을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은 그런 방식으로 나를 찾는 기억에 관한 관점이 아닌, 철저히 과거에 대한 집착과 관련 된 관점으로 봐야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내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과거의 기억을 쫓아가며 벌이는 행동을 보다보면 책 뒤에 실린 어느 일본 문학 평론가의 말처럼 주인공을 향해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는가!’란 말이 내 입에서조차 저절로 나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누구나가 이 소설을 재미를 위해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은 어떠한가에 대해 떠 올려본다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과거라는 극점을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자칫 소설을 위한 소설적인 이야기로 비춰지기 쉬운데, 결국엔 그것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구실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이야기 안에 지어진 튼튼한 뼈대로 보여 진다.

또한 그것은 마지막에 가서 속마음으로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와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이 과감히 현재의 나를 선택하는 장면으로 지금, 그리고 현재의 순간이 더 중요함을 그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에서도 확실하게 보여 진다.

물론 결말을 보자면 절대로 행복한 마무리라 할 수 없지만, 그 대신 작가는 주인공에게 또 한 번의 삶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그리고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암시를 던지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것이 자칫 순환이라고 하는 운명론적인 면을 부각시킬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통해 현실의 우리는 그저 지금의 순간을 더 느끼고 즐기겠다는 자각의 의지를 각인시켜야 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그러한 차원에서 인간 천연의 본성에 더 다가가기위해 우리가 과거로부터 뭔가 배우겠다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과거 때문에 희생당하는 일은 제발 없도록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