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별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물 그대로라는 소식입니다.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자체가 도라는 것입니다. 종교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그 속에 있습니다. 절에 와서 법회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길을 찾기 위한 것이지, 절 안에 무슨 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 일상 안에, 내가 부딪히는 인간관계에 바로 도가 있고, 진리가 있고, 불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 또다시 법정 스님의 유언이 생각난다.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도록 도와 달라 하시던 그 말씀이.

그래서 책을 읽는 도중 아무 밑줄도 치지 않았으련만 지금 후루룩 소리가 날 정도로 책을 넘기다 보인 저 한 부분을 나도 모르게 옮겨 쓰고 만다.

글쓰기를 멈춘다.

모든 사물 그대로라고, 저 말씀에 내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법정 스님이 윤회종료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삶을 살다 가셨길 지금 이 순간 마음속으로나마 두 손 합장하여 빌 뿐이다.

 

 

왜 제목이 ‘시작과 끝’이 아니라 ‘끝과 시작’일까, 이 책을 읽으며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도 나의 목을 죄고 있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불필요한 관습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간단한 어순에조차 인간의 무의식은 늘 침입한다. 그리고 그 세포는 자기복제와 분열을 계속한다. 그 속에서 태어나는 많은 언어들 가운데에는 시어도 있다. 그러나 시어는 그 복제와 분열의 사슬을 끊어야 얻을 수 있는 단어들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은 그러한 시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과 공간, 역사, 사물, 인간, 자연, 종교, 전쟁, 등등 시인으로써 그녀가 쓴 시들을 사진으로 비유하자면 마치 360°로 찍힌 파노라마 사진과도 같았다.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 모를 그 사진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어느 순간도 놓치지 않는 신비스런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더불어 이 책에는 그러한 시들과 함께 그녀의 노벨 문학상 수상소감 연설문도 함께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그녀가 말하는 영감(靈感)에 관한 것이었다.

『영감, 그게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감이 솟아난다는 사실입니다.(……)살인자들, 독재자들, 광신자들, 몇 가지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정치가들 역시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또 열광적인 아이디어로 그 일을 수행하고 있지 않냐구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른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것,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합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는 모든 지식은 결국엔 생존에 필요한 열정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소멸되고 맙니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르겠어’라는 두 마디의 말을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진정한 시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합니다.(……)시인은 자신이 쓴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망설이고, 흔들리는 과정을 되풀이 합니다.(……)그래서 ‘한 번 더,’ 또다시 ‘한 번 더,’ 시도와 시도를 거듭하게 되고, 훗날 문학사가들은 어떤 시인이 남긴 계속되는 불만족의 징표들을 모두 모아 커다란 클립으로 철하고는 그것들을 가리켜 ‘시인이 일생 동안 쓴 작품’이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영감(靈感)에 관한 저 말이 어디 문학가들에게만 필요한 것일까.

숭산 스님이 말씀하신 ‘오직 모를 뿐’이란 문장엔 저런 뜻도 있겠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늘 몰라 답답하지만 생존하기 위해선 그만큼 알기 위한 노력의 힘이 필요함으로 모른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생명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드는 에너지일지도 모르리라.

아무튼 이 책은 영감(靈感)의 보고(寶庫)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과거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불필요한 관습이 행하는 복제와 분열의 사슬을 끊어 만든 새로운 시각의 시어들로 가득한 보고(寶庫).

그 사슬이 끊어졌다고 해서 끝인가, 죽음인가.

아니다, 분명 무언가는 그와 동시에 시작된다, 탄생이 있다.

또한 우리는 애초에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도 모르며 사는 영혼들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겉과 안을 구별할 줄도 모를 만큼.

 

누구든 형이상학적인 문제들과 세상에 널린 부조리에 푹 빠져 이번 생의 삶을 진리 탐구에 힘을 쏟아보는 것도 나름 의미는 있겠으나, 그래도 어쩌다 시트콤 같은 일상 속에 빠져 있다보면 이런 게 사람 사는 재미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훨씬 많다.

그렇게 스스로 재미있게 살려면 충분히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간접적인 재미의 경험을 위해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 줄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 ‘도쿄 밴드 왜건’과 그 속편인 ‘쉬 러브스 유’이다.

죽은 증조할머니가 유령의 존재로 1인칭 관찰자가 되어 여전히 헌책방을 운명하며 시끌벅적 개성만점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이 소설은 그런 4대가 모여 사는 홋타 집안의 대식구가 맞이하는 일상의 특별한 에피소드들을 미스터리하면서도 명랑하게 풀어내고 있다. 마치 유쾌한 가족 드라마를 보듯 말이다.

특히 저 대가족 중에서도 2대 째인 60세 유명 괴짜 로커 가나토가 핵심 인물인데,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기도 한 그가 노란 염색머리를 하고는 누구의 일이건 사사건건 ‘러브가 지상 최고!’임을 외치는 모습을 보면 참 재미있는 사람이란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론 멋있는 사람이란 생각 또한 들게 한다. 나도 나이 들면 저런 스타일의 마인드로 살수는 없을까, 하는 소망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러브는 말이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는 거란다.”』

『다마사부로(애완 고양이의 이름)가 그 팔 안에서 또 야옹하고 우네요. “야옹이구나. 역시 러브는 울어야 하고말고.”』

『“아버지야.”(......) 그래요. 가나토의 기타소리예요.(......) 음악은 바람을 타고 아주 큰 소리로 울려 퍼졌어요.(......)“아니 이거 뭔 소란이여?”(......)보니까 나미코네 아파트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다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어요. “옥상이야?” 아오가 중얼거렸어요. “게다가 <올 유 니드 이즈 러브>야.” 콘도 중얼거리네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설들을 통해 보여준 작가의 자세이다.

왜냐하면 내가 앞서 그저 지나가듯 가족 드라마라는 단어를 이용했지만 사실 그 점에 대해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아, 역시 그렇구나!’ 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작가가 보여준 어떤 일관성이 저래서 빛이 났네, 라고 하는 것이 가히 저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에피소드들을 읽으면서 이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결국 소설 말미에 작가는 이 소설책들에 관한 헌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많은 눈물과 웃음을 거실에 가져다준 텔레비전 드라마에”』

그렇지 않아도 작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홈 드라마적인 분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잘 이끌어 간 모습에 감탄했는데, 이것은 소설 내용과는 별도의 감동을 선사한다.

그런 드라마들을 보며 살게 해준 사람들에게 그가 바치는 보답의 자세가 저런 감동을 맛보게끔 한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그런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이 충실하고도 다양한 스토리 전개로 이어져 독자들에게도 전해진 것으로 느껴진다.

후덥지근한 이 여름, 가벼우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피어나도록 하게 만드는 소설들이었다. 나 스스로 지금보다 조금 더 명랑해지자 마음먹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염세주의자로 소문난 어느 유명한 철학자조차 말하기를 밝고 명랑한 마음만큼 확실하게 보답을 주는 것도 없다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