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나이 마흔의 사회학자 조은(63·동국대 교수·사진)은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철거가 한창이던 사당동으로 들어갔다. 유니세프의 철거지역 아동 연구 프로젝트를 위해서였다. 2년 반 뒤 현장연구가 끝나고 연구팀은 해체됐다. 그의 손에는 녹음 테이프와 슬라이드 사진들이 남았다. 5년 뒤 조 교수는 철거민중 하나인 정금선 할머니 가족을 다시 찾았다. 공공근로를 하는 할머니와 일용건설 노동자 아들, 손자손녀 3대 가족. 평생 철거지역을 전전하며 대물린 가난을 벗지 못했지만 자존심을 잃지 않은 가족이었다. 어느덧 조교수의 손에는 동영상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16일 폐막하는 제1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고 화제작은 조은 교수, 아니 조은 감독의 다큐 ‘사당동 더하기 22’(이하 ‘사당동’)였다. 국내의 손꼽히는 여성 사회학자인 그가 22년간 관찰한 정할머니 가족의 역사다. 이들의 삶에는 분단, 개발주의, 이주와 다문화 등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계기들이 녹아있다. 그래서 극중 내레이션처럼 “이것은 한 가족의 얘기가 아니다.”

‘사당동’은 국내에서는 이례적인 영상사회학 연구인데다 등장 인물들의 진솔한 면모가 다큐로서의 재미를 더한다. 조교수는 2003년 여성의 시점에서 한국전쟁을 묘사한 장편소설 『침묵으로 지은 집』을 발표해 소설가 된 데 이어 감독 타이틀을 추가하게 됐다. 자신의 작업을 “영상으로 쓴 사회학적 글쓰기”라고 소개했다.

-다큐를 찍게 된 배경이라면.

“사당동 현장연구 후 그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정할머니 가족은 사당동 철거민 수백명 중 유일하게 상계동 임대아파트를 얻었다. ‘도시빈민은 주거문제가 해결되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건드렸다. 이들을 계속 인터뷰하면서 연구자료와 교재로 썼다. 2001년에는 개인적으로 2편의 다큐를 만들었다. 본격 다큐를 구상하게 된 것은, 다큐 연출 경험이 있는 대학원생 박경택씨가 카메라맨으로 결합한 2004년부터다 .”

	세공일을 하는, 정할머니의 큰 손자 영주씨는 필리핀의 빈곤 여성 지지와 결혼한다.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치른 후의 두사람. 다큐는 지지의 출산으로 끝난다. 다문화 가정의 시작이다. (사진 上) 2007년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함께 모인 가족들. 왼쪽부터 큰 손자 영주씨, 작은 손자 덕주씨, 아버지, 손녀 은주씨.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제공]

- 정할머니 가족에 주목한 이유는.

“세가지 점에서다. 철거민중 유일하게 집이 생겨 가족 해체를 피했다. 어린 손자들을 통해 빈곤의 대물림을 관찰할 수 있었고, 할머니가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할머니가 농촌 여성을 대변한다면 정할머니는 도시빈민여성을 상징한다. 정할머니는 또 평생을 떠도는 이주자, 난민으로 살았다. 월남한 후 부산 난민촌, 철거된 서울 양동을 거쳐 사당동에 들어간 1세대다. 결혼 1년만에 가출한 큰 며느리는 중국 교포, 큰 손자며느리는 필리핀 여성이다. 다큐의 마지막에 나오는 필리핀 여성의 출산은 4세대 코시안(한국인과 동남아시아인의 혼혈)의 등장이다. ”

- 다큐에 대한 가족의 거부감은 없었나.

“전혀. 오히려 ‘워낭소리’보다 재미있어야 할텐데 농담하며 날 격려했다. 이들을 만난 것은 연구자로서 큰 행운이었다. 가난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도 깨뜨린다. 특유의 솔직함과 질펀한 화법으로 한국사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틀기도 하고. 이들에게 스스로 말할 기회를 주는, 즉 ‘렛 뎀 스피크 아웃(Let them speak out)’이 중요했다. 어려움을 지켜보며 안타깝기도 했지만 구제하듯 나서지는 않았다. 간접적인 도움, 최소한의 알선에 그쳤다. 자존심있는 가족이라 오히려 이런 내 태도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됐고. 애초부터 다큐 제작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처 영상에 담지 못한 장면들이 안타깝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영화제에는 손자손녀들이 그들의 자녀를 데리고 참석해, 관객의 큰 박수를 받았다.”

-사회학자로서 영상작업의 의미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학문간 경계가 견고하다. 앞으로 내가 하고픈 얘기에 맞는 매체를 자유롭게 고를 생각이다. 이들 가족이 허락하는 한 계속 찍고 싶다. 기왕 다큐로 만들어졌으니 많은 이들, 특히 정책 당국자들이 보고 빈곤층에게 주거공간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깨닫길 바란다. 철거는 현재진행형 문제다. 철거 현장의 폭력성이나 대책은 22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데 우리 사회의 비극이 있다.”

양성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