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제목을 무척 고민한 책이다. 책의 본문 내용을 살펴 보면 왜 자살이라는 단어가 들어
갔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가정이 편안치 않으면 자녀들이 모든 걸 잃고 포기 한다는 그리하여 생
을 포기한다는 무서운 은유?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다. 어린 새싹인 나와 진리의 소리가 나누는 대
화는 큰 감동으로 내게 다가온 작품이다. ****
처음
나는 아주 작고 여린 풀잎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잎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았다.
아무튼 어머니의 뱃속과 같은 대지에서 겨우 고개를
내밀었을 때 나는 보잘 것 없이 작고 허약했다.
너무 작은 나머지 주변의 풀에 뒤덮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주변에 있던 크고 억센 풀들은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았다.
아니 관심조차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은 따사롭게
비치는 햇살을 조금이라도 더 쬐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겐 그들만이 가야하는 길이 있었다.
그저 슬프고 외로웠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다시 대지의 품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햇볕을 차지하기 위해 풀들과 싸우기에는 너무 작고 허약했다.
그리고...... 사실은 햇볕을 쬐는 것조차 두려웠다.
햇볕을 쬐면 타 죽고 말 것 같았다.
좌절에 빠진 채 울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고요하고 은밀한 바람소리 같았다.
"아가야, 햇볕을 향해 고개를 내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죽고 말거야."
예나 지금이나 그런 음성은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고셍서 나는 음
성일 수도 있고, 나를 태어나게 만든 분의 음성일 수도 있다.
그 음성은 삶의 지침이 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음성을 진리의 소리고 불렀다. 이기적이고 욕
심많은 어른이 되고나면 진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잊어버려서좀처럼 듣기 어렵지만 어른
이 되기까지는 누구나 종종 들을수 있는 진리의 소리.
그래서 나는 마음만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란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이 성장하면서 마음도 자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지 귀만 기울이면 되는 데 어른이 되면 그 마저 쉽지가 않은 것은 자기 욕심을 쫓아가느라 정신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른이 되어서도 진리의 소리를 듣고 싶다면 귀 기울이는 법을,
아니 마음에 귀 기울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어른이 되고 나면 자기 손에 쥔 것과 호주머니 속 지갑에 있는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한다. 뿐만
아니라 점점 의심과 회의로 가득차서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다. 차츰 마음의 귀가 먹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일이 많아지면 절망과 분노가 독처럼 몸속에 쌓인다. 진리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지켜야 할 것, 잃어버릴 것들이 너무
많아지면서 진리의 소리보다는 욕망의 소리에 솔깃해지고 시비와 다툼거리를 찾으면 한몫 챙기
는데 혈안이 되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진리의 소리를 처음 들었기 때문에 그 생생한 소리에 놀랐다.
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그 음성이 마음 속 깊숙이 새겨져 버렸다. 처음이란 강하고 뜨거워서 화인
처럼 남는다. 그러나 나는 그 음성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린 나는 바보 같이 대답
했다.
"그냥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는 그게 죽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다. 포기한다는 것, 햇
볕을 피해 달아난다는 것,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
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나는 몰랐던 것이다.
문득 여행 중에 만난 전나무 숲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만히 있는 동안 다른 나무들이 자라지. 그러면 결국 나는 그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한 나무 그늘에 가려서 점점 죽고 말아.’
나는 전나무가 들려준 말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갓 세상에 나온 나는 죽음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
겠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품었다. 어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대지의 따스함과
평안함 뿐이었던 것이다. 대지의 품속에서도 사나운 일들을 겪었을지 모르지만 나쁜 기억들은 지
워지고 없었다.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동안은 지난 날의 숱한 풍파가 낭만으로 여겨지는 것처
럼......
"너는 이제 대지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어. 네가 만약 햇볕 보기를 포기한다면 죽고 말거야. 대지
는 희망이 있는 것들만 품어주거든. 가능성이 있어야 보호해준다고. 대지의 품속에 있을 때 너는
하나의 희망이었고 가능성이었던 것야. 그 덕택에 넌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어.
"대지가 나를 키운 거네요."
"음....."
음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알아서 하라고 하죠."
어린 나는 아무렇게나 말해버렸다. 모든 게 귀찮고 힘겨웠다.
"그런 건 아냐. 대지가 너를 품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네가 품고 있던 희망과 가능성이 너를 세상
으로 나오게 만들었으니까 결국 넌 스스로 껍질을 벗어리고 세상에 나온 거야. 그건 너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어. 아무도 도울 수가 없었다고. 네 껍질은 네가 벗어던져야 했던 것이지. 그리
고...... 앞으로도 네 힘으로 살아가야 해. "
"산다는 게 뭐죠?"
나는 불쑥 질문을 던졌다. 때마침 덮친 햇볕이 너무 뜨거웠고 바람은 사정없이 나를 휘감고 지나
갔다.
"네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하지만 분명한 것은 너는 지금 햇볕을
쬐어야 한다는 거야."
"그럼 산다는 건 햇볕을 쬐는 거군요."
"바람도 쐬게 되겠지."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네요."
나는 비관적이었다.
’겨우 뜨거운 햇볕을 쬐고 심술맞고 변덕스런 바람을 쐬기 위해 살아야 하다니."
"글쎄........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까 대답하기가 난감하구나. 비관하는 풀들이나 나무들에겐 아
무말도 할 수가 없어. 그러나 넌 아직 어리니까 기꺼이 말해줄게. 풀들이나 나무들이 햇볕을 쬐기
위해 사는 건 아니야
네가 살아가면서 찾아야 하는 건 의미란다."
"의미요!"
"너도 언젠가는 깨달았으면 좋겠는데....... 모든 것들이 깨우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각자의
삶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단다. 산다는 건 의미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거야. 문제는 모두들 여행을 도중에 포기하고 일상에 안주하고 만다는 것이지. 너무 바빠서 시산
이 없다고 말하면서 말야."
"아무튼 지금은 햇볕을 쬐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나는 진리의 소리가 들려주는 긴 잔소리가 귀찮았다. 피곤하고 졸음이 몰려왔던 것이다.
"그래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햇볕을 향해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장할 수가 있고 언젠가는 너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전 햇볕이 두렵다니까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 그러면 바람과 햇볕이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뿐만 아니라 너를 키워준단다."
"바람과 햇볕이 저를 키운다고요."
"그럼."
"믿을 수가 없어요. 바람은 나를 무구 흔들어 놓고 햇볕은 나를 태워죽일 것 같은데."
"네 주변에 있는 풀들을 봐. 햇볕을 갈구하고 있잖아."
진리의 소리와 다투고 난 뒤에 긴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진리의 소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 햇볕에게로 가자.’
나는 햇볕을 향해 악착같이 머리를 파고 들었다. 나를 뒤덮고 있는 풀들이 귀찮다는 듯 밀치거나
힘으로 짓눌러도 나는 굴복하지 않고 그들 사이를 뚫고 나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며칠 뒤 나는 햇볕과 당당히 마주했다. 처음엔 햇볕을 쬐는 일이 몹시 힘들고 괴로웠다.때로는 포
기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막상 풀들 사이를 뚫고 나와서 햇볕을 보게 되는 순간의 감동과 기쁨
은햇볕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계속.....
사랑,
자살,
바람,
햇볕,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