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에 가고 싶다
하얀눈을 떠올리게 되는 새하얀 백지의 표지와 걸맞게 뭔가 많은 것을 담아내는 시들이 빼곡히 적혀있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아무래도 '시' 일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함축적인 의미들을
되새김질 하다보면 뭔가 작가의 이야기들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생기고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게 되면 뭔가 한숨이 나온다고 해야할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접하는 시집들은 메말라있던 감성들을 일깨워 주기도 하고 기억의 끈을 이어 어느 한순간
추억속의 나를 되돌아 볼수 있게 만들어주는거 같다.
책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리고 많은 사찰들을 방문하면서 그곳에서 느낀 작가의 감성을 시로 나타내고 있는데
불교를 믿지 않더라도 사찰의 고즈넉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시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이해할수 있고
특히 책과 사진을 통해 그 사찰에 방문해서 작가가 느낀 감성들을 오롯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 치고는 꽤 많은 시들을 담고 있는데, 아래는 책에서 읽었던 책들중에 기억남는 몇개의 시들을 정리했다.
어느 계절이라도 이 시집을 들고 책을 읽는다면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각 계절의 매력을 느낄수 있을거 같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랑 그리고 시와 어울리는 사진들을 감상할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거 같다.
화엄사에서
다 지고 말 꽃이거늘
검버섯 얼굴에 걸리면 다 소회하고 말 것을
아, 참답게 살았는지 궁금해지면
스스로 마주하고 술 한잔 따르리라
하늘의 구름인 양 맑게 개어 흐르더냐
창가에 놓아둔 바람이더냐
다 갚아주고 속살만 남겨 더듬어 보아도
배냇내나는 빈 몸이라면 본전이다
뫼에 지는 노을, 당랑거철이라, 삶은 고단하게 흐르는 것
첫눈 뜨고 보이는 대로의 내 것이라
아, 안고 놀다보니 한평생 그대여라
달 밝은 밤 서운함에 깃한 정 마무리하고
보따리 챙겨들어 구름 속으로 찾아가려는데
심드렁 찻잔은 달에 둥둥 뜨고
샛강은 토란대 물고 토라져 한없이 슬퍼지는구나
보타사
(벗어놓은 신을 보다)
살얼음판을 걸어왔을 테지
가만가만 육신에 짓눌린 거동을 살피면서
막 새로 사 신은 듯 그렇게 봄바람에 실어 왔을테지
누군들 새신이고 싶지 않을까
누군들 꽃신이고 싶지 않을까
때로는 비에 젖은 듯 욱신거리며 걸었을테고
때로는 돌부리에 채이면서 산을 넘었을테고
때로는 후미진 골목을 돌아 이 자리에 왔을 테지
지은스님 아미타불, 풍경 소리만 봄볕을 물고
솔송 사이로 새신 신고 가만히 내려앉네
간절하게 하라
간절하게 하라
이 새벽이 오는 기도처럼 간절하게 하라
별빛 지나간 자리에 솟아난 풀잎처럼 간절하게 하라
머지않아 뜨겁게 떠오를 햇살처럼 간절하게 하라
삶은 슬픈 것, 슬픔을 고요하게 흔드는 바람처럼 간절하게 하라
생은 어느덧 멀리 왔음에
눈물을 쏟듯 간절하게 하라
강물에 모여든 봄의 소요처럼 간절하게 하라
아, 묵음의 바다로 떠나는 돛단배처럼 간절하게 하라
두손 놓고 짙게 드리워진 평야의 붉은 여명처럼 간절하게 하라
사랑, 그 이상의 길을 가듯이 운명처럼 간절하게 하라
가을을 버리다
가을 낙엽 떨어지는 소리에 울어본다
아주 떠날 것 같은 날
심각해진 하늘과 우울한 흥정을 했던 날
변함없는 벗에게 던져버리고 펑펑 울고 싶다
진실하지 못했는가
허물은 없었는가
혹여라도 무언가 큰 기대가 있었는가
놓자, 이 가을 하늘처럼 푸르고 말리라
욕심 부리지 말자
사는 것의 완결은
질시 혹은 미움일 수도 있다
아프다 살 한점이 볕에 말려지는 듯 갈증도 대단하다
종종 걸음 쳤던 봄과 여름이 가을에 와서 아프다
때로는 슬프지 않았던 구름을 벗했고
그들로 아프던 시절을 위로 받았던
한순간을 잊지 않으리라
잘 가라, 나의 잡음 많은 가을이여!
인생이 별거더냐
꽃이 피는 것도 한순간
꽃이 지는 것도 한순간
평생 도를 닦아도 한순간
평생 업을 씻어도 한순간
즐거움도 괴로움도 한순간
분노도 성냄도 한순간
수평의 저울질도 한순간
치우침도 모자람도 한순간
태어남도 죽음도 모두 한순간
처음도 마지막도 한순간
뜨고 지는 것도 한순간
첫 장도 종장도 한순간
점과 열도 한순간
우주와 미물도 한순간
스님과 목사도 한순간
죽은 자와 산 자도 한순간
아, 기억하라 우리는 모두 티끌인 걸
늘 한순간 차를 곁에 두고 아슬함에 있다는 사실을
꽃이 좋은날 2
아, 꽃이 피는가 싶더니 비처럼 내리는구나
바람결에 흩어지는 저 꽃잎, 누군가는 무심히 밟고 지나려니
누군가는 가슴에 오려 담아두려니
우리네 삶도 언젠가 저 처럼 떨어지리니 분노하지 마라
저 하늘의 햇살 눈앞에 어른거리는구나
저 볕아래 들판은 기지개를 펴고
저 햇살에 물오른 들풀이 자려니
아, 우리네 삶도 햇살처럼 빛나리니, 화내지 마라
제 마음 가는곳에 진실과 진리가 있으려니
그곳에 마음의 이끼를 지우고
꽃처럼, 햇살처럼 모든것을 맡겨두어라
오직, 내 사랑이 이르는대로 자애로워라
사랑하는 법
간절히 하라
숨은 듯, 은거의 빛으로 간절히 하라
노을빛에도 놀라지 말라
한생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
그리움으로 목숨처럼 하라
간절히 하라
드러내지 않는 겸손함으로 늘 새날처럼 하라
늘 파릇한 풀빛의 순결로 하라
시련을 등에지고 고난에 박해 당한 순교자처럼
간절히, 간절히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