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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해안가에 자리잡은 우리 도시에 안개가 자주 낀다.

늦은 밤 귀가하는 길에 만나는 안개도,

아침 일찍 눈을 떠 베란다에서 마주하는 안개도 하나의 공통점을 지닌다.

그것은 현실을 저만치 벗어나게 하고 왠지 모를 몽환적인 상념에 빠지게 한다는 것.

아사다 지로의<가스미초 이야기>는 바로 몽환적인 그리움으로 채색되어 떠오르는 과거의 추억에 대한 기록이다. 가스미초는 '안개마을'이라는 뜻을 가지낟.

바야흐로 차분히 지난 여름의 열정을 가라앉혀주는 가을의 속성탓인지 부쩍 옛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초등카페를 기웃댄다던가, 동창모임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무래도 점점 나이들어가는 중년의 자리매김의 특성인 아닌가 한다. 어쩌면 앞으로 만들어갈 이야기보다는 살아온 시간에 대한 기억하고 추억할 내용들이 많아졌다는, 그래서 내 나이가 계절로는 바로 노란 은행잎 지는 가을인가 싶다.

벤치에 앉아 있는 똑 닮은 학생과 초로의 신사의 모습.이들은 한사람의 세월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이노 무에이'라는 할아버지와 그 손자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두사람을 보면서 절로 드는 생각은 세월의 무게이다.

가스미초,라는 도쿄의 지도에서 이미 사라진 과거의 명칭인 마을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노 무에이' 할아버지의 삼대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손자인 '이노'가 화자가 되어 펼쳐지는 8편의 다양하면서도 따뜻하고 눈물겨운, 그리고 삶의 보편적이면서도 비밀이 가득한 이야기는 읽는 이를 하여금 절로 그리움과 함께 추억여행으로 이끌어준다.

그 안에는 우정, 사랑, 야망, 죽음, 만남, 비밀, 정으로 대변되는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고 그 이야기들은 점점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지난 세대의 애환과 우수가 담겨 있다. 그것들을 돌이켜보면 또는 같이 호흡하며 고등학생 이노는 성장해간다. 우리는 이노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우리네 각자의 삶이 어떻게 성장해 왔는가 반추해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청춘의 기억은 오래된 영화의 스틸 사진과 비슷하다.

하지만 기억은 스틸 사진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더러워진 만큼 교묘하게 각색되고 수정되며, 때로는 황당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내 마음의 서랍 속에 숨겨놓은 이 신비한 체험도 과연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124P-

빌딩의 계곡 사이를 한 알갱이, 두 알갱이 반짝거리며 흘러가는 안개에 시선을 고정하자, 마치 엄청나게 많은 스틸 사진을 흩뿌린 것처럼 흑백의 나날이 되살아났다. -264P-

계절마다 저만의 특색으로 매력을 뽐내지만, 유독 가을이라는 계절은 우리네 생각을 과거로 회귀케 하는 묘한 힘을 가진 거 같다. 지금 이 자리가 아닌, '청춘'으로 대변되는 그 한 시절, 그 시절은 어쩌면 추억속에서 윤색되어 흑백사진처럼 무수히 우리 눈앞에 펼쳐지지만, 지난 시절을 정리하며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 시간이 가을이 가지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하여 그들의 우울증이 부각되곤 했는데, 과학적으로 규명해 보면 오히려 여성들이 세로토닌의 분비가 잘 안돼서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그 탓인가, 이 가을 부쩍 우울증에 빠져 허덕거렸는데, 이 책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모른다.

안개마을 이야기를 통해 가을의 화려함은 정점에서 내려가는 쇠락의 아름다움이며, 그러한 쇠락을 낭만으로 받아들이는 타나토스가 바로 가을의 정서이며, 또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차분히 올 가을속 나의 삶을 정리해 보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가을 중년의 나이에서 쓸쓸해하는 당신들이 읽어보면 매우 만족할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