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동안 강석경의 소설 "가까운 골짜기"의 도예가가 자꾸만 생각났다.
그 소설의 주인공이 생활도자기를 굽는 도예가로서 예술의 혼을 제대로 보여주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어서다.
<요리, 그릇으로 만나다>는 일본 희대의 요리인이자 도예가인 로산진의 독특하고도 기이한 삶과 예술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검은 바탕의 붉은 글씨의 표지를 벗겨내면 다시 붉은 바탕의 검은 글씨로 쓴 제목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나는 우선 이 표지의 디자인이 참 맘에 들었다. 아주 일본스러운 느낌을 잘 살린 듯 해서다.
재작년 일본의 도쿄를 여행할 당시, 검은색과 붉은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문화를 참 많이 접했었다. 젓가락으로 식사하는 일본의 요리를 담는 그릇들이 대부분 그러했고, 거리에서 만나는 일본 여인네들의 기모노의 무늬 조합이 그러했다.
선명한 색대비는 일본의 가부끼도 연상시키고, 우키요에라는 에도시대의 전통채색목판화도 연상된다. 검은 바탕의 붉은 꽃잎..일본은 그렇게 내게 각인되어 있다. 또한 로산진은 바로 그렇게 강렬하게 한 세상을 예술의 미학과 함께 살다 간 사람이다.
그릇과 관련하여 내게는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0여 년 전 새벽 세시경에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 곤한 잠을 자고 있던 우리가족은 화들짝 놀라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니, 세상에나 부엌의 상단 싱크대가 떨어져 있었다...아악~~
그 씽크대 안에는 친정할머니때부터 쓰시던 접시세트와 결혼선물로 받은 예쁜 찻잔, 특이한 주전자 등 소중한 그릇이 한가득이었다. 여기저기 뒤져보니 깡그리 깨져버리고 남아있는 것은 할머니의 국화꽃무늬 소박한 접시 몇개와 동그란 절편무늬 찍힌 청회색접시 몇개 였다. 그나마 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그러나 한동안 깨져버린 할머니의 접시로 가슴앓이를 호되게 했어야 했다. 결혼때 준비했던 셋트그릇은 하나도 남김없이 깨져버렸지만, 오히려 획일적인 그릇에 질려있던 나는 이 사건을 한편 다행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의 그릇사기는 정당한 이유를 부여받았고, 지금도 나의 식탁은 각양각색의 그릇으로 수놓아진다.
요리는 그 요리에 맞는 분위기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지론이었다. 패션의 완성이 구두에 있듯이 요리의 완성은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무렇게나 담아먹는 음식은 단지 허기를 때우기 위한 것 뿐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릇과 요리에 대한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이 책을 선택하게 했다. 기타오지 로산진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 한권으로 그의 삶은 나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위대한 아마추어, 멀티아티스트, 독학독보, 등의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로산진은 일본 현대 도예가들이 남긴 작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도자기와 요리, 서예와 전각, 회화, 칠기등 그의 세계는 경계가 없었기에 천재였고, 그 천재의 삶의 팔할은 요리와 그릇이었다. 현재 일본 도자기의 위치는 로산진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존심과 감각을 지녔으면서도 누구의 스승이 되지도 않고, 오로지 스스로가 전부였던 로산진의 삶은 그 자체가 바로 예술이었으며 내게는 엄청난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의 사기장을 끌고 간 나라 일본이 이제는 도자기의 나라로 불리기까지는 세번의 도자기 혁명이 있었다. 첫번째는 다도와 그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조선 사발은 이 다도에서 큰 역할을 한다. 두번째는 끌고간 조선의 사기장인 이삼평의 백자빚는 기술로 백자무역을 통한 국가적 부를 축적한 것으로써 근대 개화기에 한반도를 지배하는 막강한 힘이 되었주었다
세번째는 음식문화에 있어서 도자기의 대중화이다. 모리쓰케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일본의 음식문화는 디자인 뿐 아니라 분위기와 요리, 그리고 그릇이 만나는 예술적인 지점을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에술을 사랑하고 그 예술을 지켜낼 줄 알고 미의식에 대한 깊은 심미안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들었다. 그들만의 다도문화와 음식문화는 지금 현재 세계속의 일본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하기까지 로산진이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을 감동으로 이끄는 요리가 바로 예술'이라고 했던 로산진이 일상적 요리에 감동을 수놓았고, 바로 그것이 로산진이 일으킨 혁명의 핵심이며, 일본 요리의 진화이자 일본 문화의 확장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로산진이 그렇게도 열광했던 조선의 도자기, 장농, 반다지 등을 통해 우리 문화의 가치를 돌아보며 도자기문화에 대한 우리의 의식의 자성을 촉구하며 더 나아가 문화정신마저 희미해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저자의 뜻은 오롯이 내게 전달되어졌다. 일본인들의 조선에서 건너간 사발을 대하는 자세에 부러움을 넘어서서 문화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뼈아프게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로산진의 천부적인 요리감각이나 전각, 서예, 도자기를 예찬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의 얘기를 통해서 멜라민 수지, 플라스칙이 점령한 우리의 밥상, 우리의 현실이라고 한다.
언젠가 남원에 소재하고 있는 생활도자기 생산업체인 '인월요업'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여전히 예술의 혼을 불태우고 있던 노작가를 보면서 우리나라 도예산업의 새로운 희망을 봤었다. 그래서 사제를 털어서 운영하는 도자기박물관을 지인들에게 적극 홍보하기도 했었다.
갈수록 문화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는 현 시대의 흐름속에서 진정 우리에게 맞는 우리만의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그 의미를 유지, 확장해나가는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일본이 달의 문화(스스로 창조해 온 문화라기보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문화를 뿌리로 자신에게 맞도록 키운다-이도다완, 기무치)를 발전시키고 있을 때, 이제 우리도 태양의 불씨(김치)를 되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곧 태양의 문화(본류의 문화)도 다시 활활 타오르리라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