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미 <쿨하게 한걸음>

 

p.7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일곱시.

K가 예약한 레스토랑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음식값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접시에 담긴 음식은 열살짜리를 위한 듯 양이 적었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아늑해서 마음에 들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는 남자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콤팩트를 꺼내서 얼굴을 비취보았다.

마스카라가 번지지는 않았나 뺨이 번들거리지는 않나 살펴보는

여자의 눈동자에 설렘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나는 여자의 귓불에 달린 진주귀고리보다 그 건강한 기대감이 부러웠다.

서른살이 넘으면서부터 생일이나 밸런타인데이 같은 기념일에

흥미나 기대를 갖지 않게 되었다.

계속되는 실망감이 기대를 없앤 건지,

나이가 들면서 어차피 그날이 다 그날임을 깨닫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바라는 건 특별한 날 싸우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p.22

갑자기 머릿속으로 스무살이 되던 때가 떠올랐다.

그땐 주변에 의미없는 친구들도 많았고

애인 될 가능성이 있는 남자들도 많았다.

물론 모든 감정은 극단적으로 부풀어 있었고

커피를 열 잔은 마신 것처럼 쓸데없이 들떠 있긴 했다.

선택해야 할 것은 너무 많았고

그것들이 나중에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 것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그에 비해 삼십대는 뭐랄까.

별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이 저혼자 열린 느낌이다.

궁금한 것도 없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문을 도로 닫고 싶은 심정이다.

삶의 무게를 혼자 짊어져야 하고

시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이십대에는 더이상 자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스스로 성숙하다고 느끼지만

삼십대에는 좀더 성숙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p.24

부글거리던 연애만 국자로 걷어내도 인생은 참 단출해진다.

거품만 걷어냈을 뿐인데 내용물이 반 이상 사라져버린 냄비를 들여다보면

한심하고 처량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몇년동안 내가 관계를 맺은 세상이라고는

직장과 K와 몇명의 친구들뿐이었다.

그런데 그 편협한 세계 중 하나가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채워넣을 것에 대해 아무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공백은 예상보다 꽤 컸다.

나는 남아돌게 된 시간과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패닉상태에 빠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내가 모텔방에 두고 나온 것은 K가 아니라

안락함과 익숙함의 한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친밀하고 편안하고 닭살 돋는 감정으로 가득하던 세계.

하지만 언제까지나 사라진 세계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p.57

첫째아이가 놀이방에서 돌아오는 두시까지는 여유가 있다며

연재는 과일을 천천히 깎았다.

과일 깎는 품이 제법 조신한 가정주부처럼 보였다.

갓난아이는 누에고치처럼 옷과 이불에 둘둘 말린 채

아기용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집 안의 공기는 분유 냄새처럼 온순했다.

가구의 모서리는 모두 둥글고 위험한 물건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스무살 무렵에 연재는 술 마시는 걸 굉장히 좋아했는데

냉장고에는 우유와 주스밖에 없었다.

집 안 어디를 둘러봐도 연재의 특징이나 취향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다.

아이엄마가 된다는 건 예전의 모든 나쁜 버릇과 결별한다는 뜻일까.

색깔이 지워지고 모서리가 둥근 가구로 거듭난 연재의 변화가

마술처럼 느껴졌다.

 

p.63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상한 패배감 같은 게 마음을 무겁게 했다.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하지만 미모도 출중하고

부유한 남편을 만나서 번듯하게 가정까지 꾸리고 사는 삼십대 여자와

가진 것도 없고 인구감소의 주범 역할을 하지만

머릿속에는 늘 생각이 들끓고 있으며

무언가를 향해 질주하고 싶어하는 삼십대 여자가 있다면,

세상은 누구의 편을 들어줄까. 누굴 선택하고 지지할까.

질문 자체가 너무 초라한가?

사실 대답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그래도 가끔은 진지하게 묻고 싶다.

누군가, 내 편은 정말 없나요?

 

p.66

정말 상상과는 너무 다르다.

십대 후반, 혹은 이십대 초반쯤에는 서른살 정도면

인생의 모든 것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있을 거라고 믿었다.

표면적으로는 나 혼자 사는 원룸과 재산 목록 일호로 꼽는 잘 빠진 자동차,

열정을 다해 일하고 싶은 직업과

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약간 버거운 연봉,

뭐 이런 것을 소유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뿐 아니라 거창한 삶의 목표를 향해 질주하며

나를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인생의 동반자와

사랑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21세기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닐 거라는 상상보다

훨씬 현실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서른살 이후의 인생이란 날개를 활짝 펴고

그 궤도를 따라서 멋지게 비행한 하면 될 거라고 기대했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 때문에 살짝 지루해질 수도 있지만,

갈팡질팡하고 불투명한 스무살 무렵에는

오히려 그런 것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젊음의 절정으로 빛날 삼십대를 생각하면 황홀해졌다.

그래서 그때는 서른살이 넘으면 인생을 견뎌내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런데 서른셋씩이나 되고 보니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삼십대는 빛나지도 않고 젊음의 절정도 아니며

여전히 바람과 파도가 아슬아슬하게 키를 넘기는 태풍 속일 뿐이다.

안정적인 궤도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이루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이 안정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가슴을 짓누른다.

인생은 점점 더 살아가기가 팍팍하고

피 속에는 세상의 찌꺼기까지 잔뜩 끼어 혼탁해진 것 같다.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다. 물론 나 자신에게 말이다.

이런 지경이니 사십대는 기대와 상상이 되기는커녕

낭떠러지 같은 기분마저 든다.

사십대를 기대하기에는 인생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없다.

독하게 마음먹고 인생이라는 밭을 다 갈아엎기 전에는 말이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p.95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영화는 꿈의 산업이고, 이건 누구나 그 일을 꿈꾼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의 욕망과 재능과 불면과 치기를 먹고 자라는 존재라는 것.

한번 그 집에 들어가서 하인 노릇을 시작하면

웬만한 구박과 중노동, 박봉에도 불구하고

다른 집에 가서 일하기가 싫어질 정도로 중독된다는 것도.

게다가 내게는 영화에 바칠 만한 재능이나 제물(祭物)도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설거지하는 하인 노릇이라도 안될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p.243

생각할수록 동남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없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동남은 고통에 대해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도서관에서 만나는 동안 나는 그애에게서

공부가 안된다, 힘들다, 외롭다, 죽고 싶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잘 견디고 있는 줄 알았다.

그애는 절대 울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힘들고 아프면 오히려 그걸 느끼는 자신을 책망하며

그 고통을 외면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이 엄살의 시대에 바보같이.

동남이 울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p.244

죽음은 산 사람들에게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장례라는 긴 의식을 통해 그런 자리를 마련한다.

사실 나도 나자신과 그다지 원만한 사이는 아니다.

싸움과 냉전과 불만과 후회가 끊이지 않았다.

한때는 뻗어나가는 고민과 이상을 현실이 따라가지 못했고,

때로는 현실에 안주하느라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다.

언제나 이게 아닌데, 좀더 나은 삶이 있을 텐데, 라고 중얼거리지만

하루하루 시간을 때워가기 바빴다.

그러고 나면 분노와 자괴감이 치밀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보잘것없는 삶마저 전복될까봐 두려웠다.

그러다보니 나와 화해할 틈이 없었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삶은 꽤나 평화로울 것이다.

 

p.252

나의 상태는 인터넷 검색 화면 하단에 뜨는 문구와 다를 바 없다.

'웹싸이트를 찾았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중......'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오른쪽 구석의 작은 볼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읽으면 읽을수록 형편없는 평론을 쓰고 있지만,

마감까지 넉넉한 시간이 남은 것도 아니고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할 게 분명하지만,

나는 도전하고자 하는 무엇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듯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간극을 좁히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

서른세살이 되고 보니 서른세살이라는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고,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결혼을 했거나 안했거나,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없거나,

있었는데 모호해졌거나 없었는데 생겼거나,

행복하거나 불안하거나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혹은 그것들의 혼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재의 양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나의 서른셋 이후는 과연 어떤 풍경이 될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한번 멋지게 꾸려가보기로 했다.

숨을 가다듬고 일보 전진하면서!

절대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막을 내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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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고른 책은 아닌데 내가 때마침 서른셋이 됐다

그래서 더 많이 공감했고 하마터면 울 뻔하기도 했다

서른셋의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어떤 소설을 쓰고 싶냐고 묻는다면

이런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은 책

재밌는 공감가는 조금은 묵직한

아쉬운 점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작위적인 인물 설정과 부자연스런 등장?

 

참 오랜만에 글을 남긴다

제목처럼 "쿨하게 한걸음" 내딛고 싶고

그래야만 하는 서른셋

태민아 엄마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박완서 <기나긴 하루>

 

p.33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글이 써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 당한 것 같은 인명피해,

나만 만난 것 같은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나만 겪은 것 같은 극빈의 고통이

실은 동족상잔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훗날 나타난 통계숫자만 봐도 그렇다.

우린 특별히 운이 나빴던 것도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 끔찍한 전쟁에서 평균치의 화를 입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이 복수나 고발을 위한 글쓰기의 욕망을 식혀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내 집 창밖을 지나는 무수한 발소리 중에서도

내 식구가 귀가하는 발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몇백, 몇천 명이 똑같은 제복을 입고 운동장에 모여 있어도

그 안에서 내 자식을 가려낼 수 있는 것처럼.

내 자식이 딴 애들보다 덜 똘방똘방하고 어리숙해 보일수록

사무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p.95

찬바람 난 지 언젠데 자꾸 속에서 열불이 나려고 해서

손사래로 부채질을 하다 말고 내가 미쳤지,

나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북북 세수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뭐가 미쳤다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이 판국에 손사래로 바람을 내려는 건 확실히 미친 짓이지만

더 미친 짓은 남편에게 뭔가 하소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오늘 온종일 내가 무슨 일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지

최소한 남편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근하려는 남편에게 슬쩍 운을 뗀다는 게,

여보 나 왜 이렇게 울과가 치밀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했더니

그가 한다는 소리가 갱년긴가보군, 했다.

그래 갱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화상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지가 여자에 대해 뭘 안다고.

의학적인 답변으로는, 나 지금 갱년기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팔십 노인들이 모여 앉아

갱년기 타령을 하는 것을 참아내야 할 걱정으로

아침부터 울증에 빠져 있는 아내에게 그건 할 소리가 아니지.

 

-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p.148

글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녀석이 꼭 이 땅에서,

내 눈앞에서 잘살아주었으면 하는 내 간절한 소망의 참뜻을,

지랄같이 무책임한 전쟁이 만들어놓은 고아인 저 녀석을,

온 정성을 다해 남부럽지 않게 키운 게 결코

내 어머니를 떠맡기고자 함이 아니었음을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담.

제가 잘되고 잘사는 것으로, 다만 그것만으로

나는 내가 겪은 더럽고 잔인한 전쟁에 대해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고

그때 받은 깊숙한 상처의 치유를 확인받을 수 있다는 걸

어떻게 저 녀석에게 알릴 수 있을 것인가.

 

- 카메라와 워커

 

p.238

서양 여자들이 체중을 줄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듯이

이곳 아파트의 여자들은 남의 흉내를 내기 위해,

순전히 남을 닮기 위해 다이어트를 했다.

나는 이런 닮음에의 싫증으로 진저리를 쳐가면서도

철이네만 있고 우린 없는 세탁기를 위해

콩나물과 꽁치와 화학조미료와

철이 엄마식 요리법만 가지고 밥상을 차리고,

철이 엄마는 내가 살림 날 때 올케한테서 선물로 받은

미제 전기 프라이팬을 노골적으로 샘을 내더니,

오로지 그녀의 요리법 하나만 믿고 형편없는 장보기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나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십팔 평짜리 아파트를 위해

칠 년의 세월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상실했듯이.

 

- 닮은 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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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박완서

그녀의 책은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요즘같이 바쁜 일주일에도

스트레스는 받고 책은 읽어야겠다면

박완서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현대문학, 2010년 2월) - 그녀의 자서전

 

빨갱이 바이러스

(문학동네, 2009년 가을) - 사연 없는 사람 하나 없다더니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문학의문학, 2008년 가을) - 사는 게 다 그런거지......

 

카메라와 워커 (한국문학, 1975년 2월) - 이 중 젤 재밌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상상, 1993년 창간호) -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마음을

                                 이보다 슬프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아픈 경험이 겹쳐져 눈물이 날 뻔

                             

닮은 방들 (월간 중앙, 1974년 6월) - 나름 야한 작품, 신선하다

김연수 <원더보이>

 

p.15

처음에는 아빠도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로 보였다.

그러니까 소주 한 병 정도만 마셨을 때까지는.

한껏 기분이 좋아지면 아빠는 자기가 꿈꾸는 일들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럼 질세라 나도 내 소원을 말했고,

언제부터인가 번갈아가며 소원 말하기는 우리가 즐겨 하는 놀이가 됐다.

1억원짜리 올림픽복권에 당첨되기, 오비 베어스에 투수로 입단하기,

대우 르망을 타고 아시아를 가로질러 파리까지 여행하기,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1천 미터를 2분 30초 안에 주파하기 등등.

이 놀이의 핵심은

절대로 이뤄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만 말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자꾸 말하다보면

조금씩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어서 시간이 조금 흐르자 우리는

소원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소원은 이미 다 이룬 사람처럼

1억원으로 무엇을 살 것인가,

어떻게 사인하면 프로선수의 사인처럼 보일까 같은 일들을 고민하곤 했다.

남들 눈에는 우리가 김칫국을 마시는 부자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마음만은 부자인 부자였달까.

내 소원 중에는 그해 5월에 개장한 서울대공원에 가서

돌고래쇼를 보는 것도 있었지만, 아빠가

"그건 반칙이야. 어려울 게 하나도 없으니까 소원으로 칠 수 없어"

라고 말할까봐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무렴, 내가 그냥 돌고래쇼를 보는 걸 소원이라고 생각했겠는가.

그때에는 엄마와 아빠가 내 양옆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지 소원이지.

 

p.157

토요일의 대숲으로는 바람과 날벌레들과 다람쥐들이,

'아빠가 살아 있을 때 더 잘해줬어야만 했는데,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안았어야만 했는데'라는 후회와

이제는 내게 다시는 한가롭게 스포츠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평범한 토요일 같은 건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예감과,

그렇다면 나란 인간은

살아 있을 값어치조차 없는 사람이 아니냐는 자책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토 형이 나를 찾아왔다.

강토 형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그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래전에 그런 목소리를 들었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더 어린 아이였을 때, 꼬마였을 때,

아빠가 일하러 나가고 없는 어스름 무렵,

골목에 혼자 앉아서 길어진 그림자를 바라볼 때,

그때, 내게 엄마가 필요했을 때.

강토 형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숨어버릴까 생각했으나

강토 형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나는 대숲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맞은편 마을 뒷산 너머 하늘로 노을이 붉게 물들었다.

그 하늘 한쪽에 샛별이 있었다.

나는 샛별이 지배하는 나라의 백성인 양, 고개를 숙였다.

대숲 옆으로 놓인 산길을 따라 강토 형이 올라왔다.

강토 형이 왜 여기에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도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강토 형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또 내가 어디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인지

그것도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강토 형이 내 손을 잡았다.

넌 나하고 있으면 돼. 강토 형이 말했다.

나는 맞잡은 두 손을 바라봤다. 그 손으로 온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나의 슬픔이 전해졌다. 강토 형이 더욱 힘을 줬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토 형의 슬픔이 내게 전해졌다.

강토 형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며,

 지금 그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두개의 슬픔이 합쳐졌으니, 고통받아야 마땅했지만

그 순간 나는 위로받았다.

 

p.237

그해에도 어김없이 봄은 다시 찾아오고 벚꽃은 만발했다.

아니, 만발했을 것이다.

솔로 앨범을 준비하던 폴 매카트니는

비틀스가 해산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그다음 날 끔찍한 우주선 사고가 예정돼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아폴로13호는 케네디 우주센터를 출발해 달로 향했다.

또 뭐가 있었더라?

아, 이스라엘의 전투기가 수에즈 운하 근처의 국민학교를 폭격했고,

일제시대 때 세브란스 병원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평생 한국인들을 도우면서 살았던 캐나다인 의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운명했다.

세상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엄마의 뱃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배배꼬면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침내 세상 속으로 나와 목 안에 가득했던 엄마의 양수를 토해내면서

첫번째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내 몸은 신비스러운 지구의 공기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 엄청난 생명의 기운으로.

그 안에 든 질소와 산소와 이산화탄소 같은 것들이

원자와 분자의 형태로 내 입안에 밀려들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첫번째 공기의 맛을 기억하지 못한다.

첫번째 눈물과 첫번째 웃음을,

그리고 처음으로 본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때, 나는 어떤 스타디움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스타디움은 클 것이다. 엄청나게 거대할 것이다.

그 기둥은 웅장하고 위엄이 넘칠 것이며 천장은 하늘에 가 닿을 것이다.

지구만큼 거대한 그 스타디움의 관중석에는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다가 죽은 모든 생명체가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거기에선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이어달리기 경기를 펼치는 중이다.

나는 이제 막 첫번째 공기를 들이켠 아이들 사이에 서 있다.

내 옆에 선 아이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은 한국 이름 석호필,

다름아닌 내가 태어날 무렵에 죽은 그 캐나다인 의사다.

81세가 된 그의 몸으로는 삶의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고통이 모두 지나가

이제는 점점 고요해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빼고 내게 배턴을 건네줄 선수가 누구인지,

내게도 삶의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고통을 전해줄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다.

아휴, 빨리 빨리 빨리. 빨리 좀 오지. 나는 소리친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우는 듯 웃는 듯 한 사람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다.

마침내 내 얼굴을 봤다는 사실이 기뻐서,

하지만 그게 이번 생에서 보는 마지막 얼굴이라는 걸 깨닫고

고통으로 마비된 채 엄마가. 나의 엄마가.

 

p.305

우주에 그토록 별이 많다면, 우리의 밤은 왜 이다지도 어두울까요?

 

그건 우리가 지구라는 외로운 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천문학자들은 우리 은하에 어림잡아

3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추정합니다.

이중에서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알려진 별은 현재로서는 지구뿐입니다.

그래서 지구는 고독합니다. 이 고독은 3천억분의 1의 고독입니다.

그 별들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하는 별이 하나라도 더 있다면,

이 고독은 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그때 지구의 밤은 지금보다 두 배는 밝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하나뿐입니다.

아무리 별이 많다고 해도 지구가 3천억분의 1만큼 고독한 한에는

지구의 밤은 여전히 어두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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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했다

김연수 소설이 원래부터 내 취향은 아니었다는 것을

100일 잔치를 막 끝낸 귀요미의 엄마인 나에게

독서라는 취미 생활은 이제 사치가 되어버렸고

더불어 너그러움이 사라져버렸다

없는 시간 쪼개 책을 읽는 만큼 좀만 재미가 없어도 화가 막 나는 것이다

이 책은 요즘 완전 스릴 넘치는 "너목들"처럼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의 이야기인데

마음이 콩밭(귀요미)에 가 있으니 눈에 안 들어오고

내가 왜 이걸 읽고 있나 백 번은 생각했다  

솔직히 재미는 없는데 그 이유는 알았다

소설의 마지막이 (김태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답다

"우리의 밤이 어두운 까닭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 문장을 얻기 위해 소설은 그리고 나는 여기까지 달려왔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