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너는 모른다>
p.7
시체가 발견된 것은 5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비둘깃빛 가운을 부대자루처럼 뒤집어쓴 성가대원들이
직사광선 내리쬐는 교회 뒤뜰에 줄지어 앉아
2부 예배 때 부를 찬송을 연습하는 시간,
지난 밤 처음 만난 연인들이 숙취 때문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뜨겁고 어색한 두번째 섹스를 나누는 시간,
조기축구회 유니폼을 입은 이기적인 가장들이
넓적다리와 정강이 근육을 조였다 풀었다 하면서
중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시간이었다.
p.8
일요일 오전 열시.
회사원은 늦잠을 자고 교인은 기도를 하고
연인은 사랑을 속삭이며 누군가는 축구공을 찬다.
막 몽정을 시작한 사내아이들이 강가를 이유 없이 배회하는 것도,
강바닥을 흘러다니던 시체가 홀연히 떠오르는 것도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p.28
어떤 남자를 만나도,
항상 이제야 간신히 이 사람을 만났다고 믿어왔다.
가까스로 만들어진 둘만의 성(城), 친밀하고 일정한 규칙,
토요일 저녁에서 일요일 아침으로 이어지는 기분 좋은 빈둥거림,
젓가락 두 벌, 칫솔 두 개, 서로 느슨하게 어깨를 붙이고
케이블채널의 재방송 드라마를 보던 시간들이
갈기갈기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빛이 없는 방에 웅크린 앙상한 여자아이였을 때부터
그녀의 생에 드리워진 불길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 하고 있었다.
p.33
특별히 엄마가 포기한 것들 리스트의 비교적 위칸에는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식장에서는 엄마 같은 신부를 위해
빅 사이즈의 웨딩드레스를 준비해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엄마는 식이 진행되는 내내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선
말끔한 표정을 짓느라 애썼을 것이다.
순백의 면사포를 쓴 그녀는
그 순간 정말로 뱃속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노라고
자기최면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곤 하객들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주기를 간절히 바랐으리라.
그때 드레스의 배 부분을 가로지르는
우스꽝스런 장미 레이스 장식 안쪽에서
들킬까봐 덜덜 떨고 있었을 작은 아기를 생각하면,
은성은 슬픔으로 빗장뼈가 빠개질 것 같았다.
p.35
유지는 뭐랄까, 눈동자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누가 물어보는 말에만 짧게 답할 뿐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법도,
먼저 입을 열어 종알대는 법도 없었다.
그런 태도가 은성을 편안하게도 불편하게도 했다.
아이는 비단 은성에게만이 아니라 누구한테나 골고루 무심했다.
혜성에게도, 아빠에게도, 심지어 제 엄마에게조차
우유를 넣은 딸기젤리처럼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유지 앞에서 아빠와 새엄마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짝사랑에 빠진 얼간이처럼 굴었고,
그것은 은성에게 비밀스런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씁쓸함을 맛보게도 했는데,
유지의 무관심한 태도가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
날 때부터 그 아이는 부러 눈꺼풀을 깜빡여
어른의 주의를 끌 필요가 없었고,
작은 몸의 중심을 더욱 낮추며 부모의 애정을 간구할 필요가 없었다.
p.55
인생에는 한들한들 부는 산들바람에 몸뚱이를 맡겨도 되는 시간이 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삶이란 조금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기차에서
시속 오십 킬로미터의 속도를 견디는 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때 옥영과 밍은 걷잡을 수 없는 속력으로
서로를 허겁지겁 읽어나갔다.
그들은 곧 상대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유 대신 서로의 털뭉치를 핥는 두 마리 새끼고양이들처럼
성탄절 꼬마전구가 둘러쳐진 울타리 안에서 서툴게 사랑에 몰두했다.
우주가 그들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착각한 건 아니었다.
울타리 너머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이제 그것이 균형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규정해야 안심하는 자신이
참 비겁하다고도 생각한다.
p.56
그녀가 혹시 내가 따돌림당하는 건 아닐까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면, 밍은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했다.
그는 일체의 단체활동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관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밍은 생래적으로 하나의 개인이었다.
결코 외톨이인 줄 모르는 외톨이,
빛 없는 선반 위에 따로 보관된 통조림처럼 안전하고 유일한 개체,
스스로 적막할 운명을 타고난 자. 그것이 밍이었다.
혼자 먹을 저녁밥이 담긴 검정 비닐봉지를 천천히 흔들면서
어둑한 타이베이 거리 한 모퉁이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영원히 옥영은 저릿한 통증에 사로잡힐 것이다.
p.86
집에 돌아와서 라오밍이 준 선물을 열어보았다.
어른 손바닥만한 직사각형 상자 속에는 향수병이 들어 있었다.
어린이용 향수였다. PETIT SEN BON.
어떻게 읽는지는 알 수 없었다. 레몬향이 어슴푸레하게 맡아졌다.
카드는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던 생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유지는 오래도록 궁금했다. 왜 그는 사라지고 말 것을 선물했을까.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순간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지만, 짧고 서툰 첫번째 연애편지가
기억의 서랍 맨 아래칸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처럼.
아이는 아직 그것을 잘 몰랐다.
p.111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랐었다.
타이베이의 어떤 연인들도 같이 가지 않는 곳,
남의 사랑을 시기하는 신이 있어
어떤 애절한 인연도 단칼에 갈라놓는다는 그곳,
지남궁에 이번에는 반드시 가려고 했었다.
밍과 손을 맞잡고 그 사원 계단을 느긋느긋 올랐다가 내려오고 싶었다.
오를 때는 하나였다가 내려올 때는 각각이 돼 있고 싶었다.
환한 대낮이어도 좋고,
어둠이 고요히 숲을 감싼 한밤이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 오래된 책을 부디 평화롭게 덮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도 때가 아닌가보았다.
아니 어쩌면 둘에게는 그런 허영조차 허락되지 않는지도 몰랐다.
p.122
아침에 컴퓨터를 켜고 중요한 이메일 몇 통을 체크하고 나면
인터넷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였다.
포털사이트의 메인뉴스에 괜히 혀를 차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고,
골프 동영상을 보며 스윙 폼을 연습하기도 했다.
손님과 약속장소를 잡기 위해
'서초동 맛집' 같은 걸 검색하는 일도 잦았고, 그러다가
'김치찌개'가 맞는지 '김치찌게'가 맞는지 괜히 찾아보기도 했다.
가끔은 유흥가 탐방기를 올리는 남성 전용 게시판에서
허풍 섞인 후기를 읽으며 낄낄거렸고,
본의 아니게 요상한 성인사이트로 납치되면
컴퓨터에 악성코드라도 깔릴까봐서 서둘러 빠져나오곤 했다.
그의 본격적인 업무는 오후 다섯시 반,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부터 시작되었다.
p.163
누가 뭐라 해도 결단코 바뀌지 않는 것을 진실이라고 부를까?
알 수 없었다. 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아이가 짐작하는 건 겨우 그뿐이었다.
타인을 겨냥한 악의는 어쩌면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 풍선 같았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쪼그라들지 않았다.
뻥 터져버리는 순간을 기다리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아이는 바닥을 보고 걷는 때가 늘어났다.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친구에게도 아무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입술을 열면
예기치 못한 말들이 딸려나올까봐서 혀를 동그랗게 오므렸다.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말들을 작은 어금니로 오독오독 깨물었다.
p.223
옥영은 수강생들과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다.
같이 한잔 하러 가자고 권하면 서너 번에 한 번꼴로 응하는 식이었다.
술자리에서도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가 오래지 않아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날게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그녀가 조금 재수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옥영이 건방지게 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녀는 비교적 친절했고 누가 묻는 말에
반드시 잔잔한 미소 띤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온도로 웃는 여자였다.
그런 점이 그의 눈에는 사회생활의 노련한 매너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자존감과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 쓰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이때껏 그가 본 어떤 여자들과도 달랐다.
그것이 상호를 공연히 불편하게 했다.
p.231
서로의 영혼을 샅샅이 읽어낼 의무가 없는 관계가
옥영의 숨통을 터주었다. 언제까지 좁은 야채칸에 꼭 붙어서
뭉그러져가는 애기감자 두 알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밍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사나흘에 한 번 길지 않은 국제통화를 했고,
이박삼일간 각각 서울과 타이베이를 다녀가기도 했다.
밍은 낡은 황토색 잠바를 버리지 않았다.
가끔 발작적으로 그에게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나 다른 남자가 있어."
아니다.
"나 다른 남자하고 잤어."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고향마을 지도처럼 익숙한 그 손을 꼭 잡고 잠들었다.
그때는 그런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대상 없는 복수.
자고 일어나면 눈물이 고여 있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운명이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p.294
"여자?"
은성은 제가 뱉어낸 목소리에 놀랐다.
재우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있는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다.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강재우라는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에게 재우라는 존재는
미처 삼겨지지 못하고 어금니에 달라붙어버린 엿조각 같았다.
자주 성가셨으며, 가끔은 심심함을 덜어주는 역할도 했고,
그보다 더 드물게는 달콤하기도 했더랬다.
너무나 익숙하고 진부해서 안전한 달콤함이었다.
손가락으로 억지로 긁어내려 해도, 혀끝을 굴려 떼어내보려 해도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달라붙어 있는 파편으로만 여겼다.
p.350
신발장엔 마땅한 신발이 없었다.
나이키의 핑크색 코프테즈나 캔버스 운동화 따위들
아니면 십일 센티미터 킬힐이나
종아리를 꽉 조이는 롱부츠가 전부였다.
검정색 단화 같은 것이 어떤 차림에도 무난하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구입하게 되지 않았다.
신발장 앞에서 종종 아쉬워하곤 했지만, 구둣가게에 가면 왜
프루츠캔디처럼 알록달록한 하이힐에만 시선이 꽂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은성은 좀 망설이다가
샛노란 빛깔의 뾰족한 에나멜 구두에 맨발을 밀어넣었다.
그 행위는 그녀에게 이상한 안정감을 주었다.
p.394
"참 좋아."
아이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언니가 말했다.
입가에 묻은 달콤한 푸딩을 몰래 핥아먹는 소녀 같았다.
p.449
연길공항 세관검색대를 통과할 때에 본능적으로
조마조마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들킬까봐서
두려워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무표정한 젊은 공안 사내가 돌연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며
어디론가 질질 끌고 가는 일이 벌어진다면,
김상호는 끝까지 저항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이었다.
두 다리가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죽을힘을 다해 멀리멀리 도망칠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대개의 불안이 그런 식의 비실비실한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p.456
진옥영이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나타났다.
강남 생활권인 S경찰서에서 오 년째 근무하고 있는
경찰관의 눈으로 보기에 그녀는
'전형적인 강남 젊은 엄마' 스타일로 나타났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몸매와 헤어스타일,
일부러 공들여 멋 내지 않았는데 절로 우러나오는 세련미 같은 것.
이 근처의 아파트 단지에서, 교핑몰에서, 초등학교 앞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여자였다.
언젠가 동료 여순경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자
"시장 갈 때도 이백만원짜리 가방 들고,
백만원짜리 구두 신고 가면 누구나 그렇게 보여요"라는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었다. 어쨌거나 경찰관의 시선에
그녀가 썩 믿음직하고 신실한 주부로 비치지는 않았다.
-----------------------------------------------------------
정이현은 작가의 말에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고, 세상에 내놓는다 했다
느껴졌다 그녀의 진심과 수고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훌륭했다
정성스런 묘사와
글을 이끌어가는 쓸쓸하면서도 오묘한 분위기
인물 하나 하나에 대한 애정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김상호, 진옥영, 김은성, 김혜성, 김유지 어린이 그리고 밍
유지랑 밍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ㅠ8ㅠ
결말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런 결말은
가슴으로 낳은 주인공들이 더 이상 슬프지 않길 바라는
작가의 모성애가 아니었을까 싶다
앞으로 내 인생 최고의 소설로 꼽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