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낭만적 사랑과 사회>

 

p.10

남자애와의 데이트가 대부분 그렇듯

오늘도 베니건스에서 샐러드와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특별히 갈 곳이 없었다.

상우가 "비디오방이나 갈래?" 했을 때

나는 "글쎄......"하며 얼버무렸지만

결국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얌전히 앉아 비디오를 보던 그애가

입술을 부딪쳐왔을 때 나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키스할 때 눈을 뜨는 건, 나 바람둥이야, 라고 광고하는 일이다.

그러나 첫 키스에서 여자가 너무 적극적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새침한 척, 입술을 아주 약간만 벌려주었다.

상우의 입맞춤은 능수능란했다.

민석이처럼 무작정 냄새나는 혓바닥을 쑥 밀고 들어오지도 않았고,

승재 오빠처럼 (1) 상대의 입술을 벌린다; (2) 혀를 집어넣는다;

(3) 서너 차례 회전시킨 다음 상대의 혀를 핥기 시작한다, 는 식의

매뉴얼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변죽만 울리다 말지도 않았다.

상우의 입술은 뭐랄까, 우유에 적신 스펀지케이크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한 완력마저 느껴졌다.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상우가 혀를 움직이기 좋도록

입술을 조금 더 크게 벌려주었다.

 

p.20

내 인생, 엄마처럼 사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스스로 중산층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으며,

허울만 좋은 중소기업 임원의 아내로,

이십몇 년 결혼 생활 동안 백화점 세일 때 허접한 옷 골라 사고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다닐 수 있게 된 걸 생활의 여유라고 생각하는,

쉰 살 다 된 여자의 인생을 떠올리면 정신이 바짝들곤 했다.

나를 임신하지 않고 아빠 같은 남자와 서둘러 결혼하지 않았다면

엄마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 낭만적 사랑과 사회

 

p.81

잠결에 아랫배가 와락와락 아파 눈을 떴더니

우당탕탕 한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 씨, 요즘 좀 잠잠하다 했더니 또 시작이었다.

초장부터 불을 뿜어대는 화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불을 뒤집어써보았지만

하이 소프라노로 질러대는 아빠 목소리가 생생한 화음을 이루어

귓가에 스테레오로 울려 퍼졌다.

남들 다 자는 이 새벽에 얼굴들도 두꺼웠다.

 

p.86

약 한 달 전 그들, 그러니까 우리 아빠

K대 사회학과 부교수 45세 김용진 씨(대화명: 슬픈 늑대)와

고졸 백조 20세 조영미 양(대화명: 깜찍이)은

모 인터넷 채팅 전문 사이트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둘이 번개에서 만나는 순간 번개처럼! 불꽃이 파바박 튀었다.

둘은 나이와 직업과 처지의 장벽을 모두 뛰어넘어

영화처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깜찍이는 슬픈 늑대의 처자식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관계를 청산하려 애써보았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둘의 사랑은 그야말로 하늘만이 허락한

아주 특별하고 고귀한 사랑이라고,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고,

슬픈 늑대가 눈물로 치맛자락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망할......)

그러다 깜찍이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임신이 의심되는 증세 앞에서

슬픈 늑대는 별안간 깜찍이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원래 귀찮으면 바로 쌩까는 게 그 사람 특기다.)

한술 더 떠 슬픈 늑대는 그 뱃속의 애가

누구 씨앗인지 알게 뭐냐고 뻔뻔하게 큰소리까지 쳤다.

('씨앗'이라니, 십대 소녀인 내가 듣기엔

상당히 원색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슬픈 늑대의 의심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깜찍이는 그동안 전남자친구 (채팅에서 만난 서른두 살의 백수였단다) 및

그 전전남자친구(오다 가다 만난 동갑의 재수생이었단다)와

'어쩔 수 없이' 몇 번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뱃속의 애가 그들의 '씨앗'이라는 건 죽어도 아니었다.

맹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슬픈 늑대 오빠는

깜찍이의 변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부정한 여자 취급하며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다음날, 웬 여자애(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이 무슨 쌍팔년도 삼류 드라마 같은,

초(超)저질 통속 스토리란 말이냐.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그 뱃속의 애는 내 동생이 되는 거였다. - 소녀 시대

 

p.150

어머니들의 관심은 보다 현실적인 데 있었다.

아들 여자친구의 조건과 며느릿감의 조건은 엄연히 달랐다.

딸 남자친구의 조건과 사윗감의 조건이 같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남자의 어머니는 장래 며느릿감의 면면에 대해

새삼 곰곰이 따져보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남 앞에 내세울 만한 장점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이내 섭섭해졌다. 자그마한 체격이나 오종종한 이목구비는 그렇다 쳐도,

어쩌다 마주칠 때 별말 없이 목례나 할 뿐

사근사근하게 감겨오는 애교가 없는 점이 불만스러웠다.

비서라는 직업도 시답잖았다.

공무원이나 교사처럼 안정적이지도 않았고

뾰족하게 돈을 많이 벌어올 성싶지도 않았다.

바야흐로 남녀가 평등한 시절이었다.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제 아들 혼자 뼈 빠지게

처자식을 부양하는 광경을 상상하자니 입맛이 썼다.

그렇다고 결혼 반대를 전격 표방하고 나서자니

아무래도 명분이 부족했다.

하긴 내 욕심 차리자고 남의 딸자식 인생을

끈 떨어진 갓으로 만들 순 없지.

남자의 어머니는 결국 자신처럼 선량하며 배려 깊은 시어머니는

다시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처음부터 다잡아야 해! 남자 어머니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자 어머니 역시 장래 사윗감이 전적으로 미더운 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헤아려봐도 도무지 뭐 하나 비범한 구석이 없는 거였다.

주변에 하나둘씩 혼사가 늘어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지지리 못해 부모 속깨나 태우던 옆집 딸내미는

일찌감치 의대생을 꽉 잡아 단숨에 의사 사모가 돼버렸다.

인생 대역전이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적당한 앙혼(仰婚)이

여자에게 흉될 리 만무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해빠진 딸이

제 성정대로 연애도 너무 소박하게 했다는 미련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사윗감이 인물이 훤한가, 붙임성이 있나,

결정적으로 장남이 아니기를 한가.

헤아려보면 폭 한숨이 나왔다.

그냥 저냥 평범한 게 제일이지, 뭐.

남들 앞에서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면서

여자의 어머니는 결연히 읊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귀한 우리 딸 눈에 눈물나게만 해봐라!

 

p.161

여자가 꿈꿔온 결혼 생활은 또래 집단 평균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흰 프릴이 달린 커튼, 앙증맞은 이인용 식탁,

32인치 완전 평면 텔레비전, 세피아 톤으로 현상한 결혼 액자.

그리고 자유! 귀가 걱정 없이 심야 영화를 관람할 자유,

부모에게 둘러댈 필요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 갈 자유,

국에 밥을 말아먹든 밥에 국을 말아먹든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자유.

결혼에 대한 여자의 소박한 기대는 진정으로 그게 다였다.

그런데 남자는 지금 여자의 꿈을 와장창 박살내는 발언을

저토록 무신경하게 툭 뱉어내고 만 것이다.

그러고도 모자라 먹던 자장면을 입 안에 마저 처넣고 있는 것이다.

여자의 절망과 분노는 깊디 깊었다.

여자의 음성은 바들바들 떨리고 목덜미엔 푸르스름한 핏줄이 섰다.

수진: 오빠가,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너.

여자가 이렇게까지 히스테릭하게 나올 줄 몰랐던 남자는

엉겁결에 목청을 높였다.

재호: 야,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

수진: 그걸 몰라서 물어? 어떻게......

        어떻게...... 같이 살자는 말이 나올 수가 있어?

재호: 에이 씨, 너 좀 심하다. 우리 부모님이 무슨 전염병 환자냐.

남자의 입술에 춘장 찌꺼기가 묻어 번들거렸다.

풍선을 빼앗긴 일곱 살짜리 아이처럼

여자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 홈드라마

 

p.210

십육 세, 인생의 정수, 청춘의 고갱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연실은 상수리나무 가지에서 저절로 툭, 떨어지는 햇도토리만치

야물찬 사람이 되리라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노력만 한다면 반드시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이십세기 모단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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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현대 여자 작가의 소설책을 주로 읽는다

백영옥, 정한아, 전아리, 김민서의 유쾌하고 발랄한 감성에

자극을 콕콕 받아 온몸이 쑤시곤 한다

그리고 이내 좌절... 왜 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ㅠ8ㅠ

모두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작품들이지만

이들 중 몇 작가의 작품은 기복이 있다

어떤 것은 너무 좋아 데굴데굴 구를만큼 기똥차지만

또 어떤 것은 그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이현은 한결같이 완벽하다

그녀를 문단에 나오게 한 첫 작품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최근의 장편 <너는 모른다>까지 무서우리만치 재밌다

어제는 이 책을 다 읽고 너무 좋았는지

꿈 속에서 정이현 작가랑 대담도 했다

 

특히 '홈드라마'란 단편은 결혼을 앞둔 남녀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렸는데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이야기랑

닮아서 다시 우울해졌다

아, 왜 난 이런 대본 형식의 구성방식을 생각하지 못 했을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이란 표현은 이런 때 쓰는 걸까

어쨌거나 닥치고

정이현 찬양

얼굴도 오목조목 귀엽고 예쁩니다요~

금나나 <나나의 네버엔딩 스토리>

 

p.170

"인생은 하나의 수행이다. 갈고 닦으면서 나아가야 해.

하나의 고비를 넘으면 또 다른 고비가 오고,

그것을 넘어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너에겐

지금 상황이 실패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란 상대적인 거야.

네가 여기서 좌절을 하면 실패지만,

이것을 뛰어넘어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다면

그건 실패가 아니라 좋은 경험이 될 터이니

이보다 더 좋은 수행이 어디 있겠니?

네가 만약 이번에 의대에 합격을 했다면

넌 틀림없이 넘쳐흘렀을 것이다.

나나야, 일이 뜻대로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이 뜻대로 되면 뜻을 가벼운 데 두나니,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수행으로 삼아라."

 

p.182

내가 부러워했던 것은 미국의 모든 평가 문화에는

한국엔 없는 것이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정성'이었다. 학생 한 명의 실력을 평가할 때,

우리나라는 대부분 시험 성적을 가지고 일률적으로 판단한다.

시험을 치고 그것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곧바로 학생의 성적이 결정되는 것이다.

철저히 결과 중심의 평가 시스템인 셈이다.

하지만 하버드에서 본 미국의 평가 시스템은

결과와 과정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었다.

시험성적 외에도 학생이 써 낸 페이퍼,

그 페이퍼를 써 내기까지 학생이 기울인 노력,

그리고 한 학기 동안 학생이 해당 과목에 보여준 열의 등이

모두 평가의 대상이 된다.

교수와 조교의 오피스 아워에 얼마나 열심히 찾아왔나,

수업 시간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나,

학기 초에 비해 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얼마나 많은 학문적 발전을 이루었나 등등이 모두 고려된다.

사실 학교 측으로 보자면 시험성적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결과 위주의 평가 시스템이 간편할 것이다.

컴퓨터에 성적을 입력하는 동시에 평가가 다 끝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전산 처리를 통해 성적을 출력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하버드는 시험 외에도 숫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성실성, 참여도, 열의, 성장, 발전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한마디로 교수와 조교가 머리카락이 빠질 정도로

한 명 한 명에게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며 고민하는 것이다.

5년 전 한국에서 미국 대학을 준비하면서도,

그리고 하버드에서 미국 의대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똑같은 것을 느꼈다.

대학의 입학사정관은 편한 직업이 아니다.

학생 한 명의 지원서 파일만 해도 에세이와 추천서,

포트폴리오 등을 다 합쳐서 서류 봉투 하나가 가득 찬다.

그걸 하나하나 꼼꼼히 읽고 인터뷰 대상자를 추리고,

또 인터뷰를 하고 격력한 토론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선별하는 것은

그야말로 사명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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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틈이 읽다 결국엔 다 읽었다

하버드에 간 것도 대단하지만

4년간의 긴 시간동안

의사라는 꿈을 가지고 그 곳에서 버텨낸 점

꿈이 좌절되었을 때 절망하지 않고

겸손하게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점

성숙하고 멋지다 ♥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언니의 냄새가 킁킁

아름다운 그녀의 행보가 기대된다

더 멋진 삶을 살게 되길

최고의 남자와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되길

나나 잘하라고? 넵!

천명관 <유쾌한 하녀 마리사>

 

p.28

"너무 걱정하지는 마. 걔네들은 곧 돌아갈 거야.

찾다가 못 찾으면 지들도 돌아가겠개, 어쩌겠어.

여긴 LA보다 훨씬 춥거든. 흑인들이 추위에 약하다는 거 알지?

내가 여기서 봐서 아는데 걔네들은 조금만 추워도

손난로를 가지고 다녀. 그리고 아까 일기예보를 들었는데

이번 주말부터 날씨가 더 추워질 거라고 했어."

나는 흑인들이 추위에 약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빨리 천사의 도시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한편,

프랭크와 남편이 한국에 있을 때

둘이 얼마나 많은 사고를 치고 돌아다녔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그런 남편과 함께 헤쳐가야 할 미래가

갑자기 너무나 막막하게 느껴졌다. - 프랭크와 나

 

p.53

토마스, 당신은 사랑에 배신당한 여자를

당신의 소설 속에 등장시킨 적이 있나요?

그날 나는 수면제를 다섯 알이나 먹고도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잤어요.

처음엔 나의 직감이 어긋났다고 믿고 싶었어요.

시간이 너무 많은 주부가 흔히 상상해볼 만한 일이라고 말예요.

그래서 시트콤에 나오는 대로

엉뚱한 오해가 불러일으킨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랐어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작은 후추씨는

하룻밤 새에 거대한 숲으로 자라나

나를 꼼짝 못하게 가두고 말았어요. - 유쾌한 하녀 마리사

 

p.74

갈색 뿔테안경을 쓰고 있는 그의 얼굴엔

거창한 야심이 사라진 대신, 회사원다운 조심성과 규칙성이 엿보인다.

그는 말하자면, 행복해지길 원하기보다는

단지 불행해지는 게 두려운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p.79

팔 년 전, 대서의 아버지가

머릿속에 번진 종양을 수술한 지 이틀 만에 죽었을 때

그의 가족은 평생 가난한 농부로 살아온 가장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첫날, 일월 일일이었다.

그때 대서는 크리스마스 날 저녁이든, 자신의 생일 날 아침이든,

사람은 아무 때나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례식 날, 처음 이곳을 찾은 대서의 가족은

계곡을 향해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과 공사가 채 끝나지 않아

여기저기 파헤쳐져 황토가 붉게 드러난 황량한 풍경 때문에

모두들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수원에서 지업사를 크게 하는 고모는

오빠를 어떻게 이런 데다 모실 수 있냐고,

사정이 어려우면 진작 자기한테 얘기를 하지 그랬냐고

울면서 대서를 원망했다.

생전에 오빠에게 양복 한 벌 해준 적 없는 그녀였지만

입관을 할 때 갑자기 관 위에 엎어져,

"오빠, 미안해요. 내가 죽일 년이야. 내가 죽일 년이라고" 하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는 통에

상주와 문상객들을 모두 민망하게 만들기도 했다.

푸른 잔디도, 풍성한 슬픔도 없는 가난한 장례식이었다.

몇 년 사이에 공동묘지는 곧 빈자리를 채우고 푸른색으로 덮여갔지만

성묘를 올 때마다 대서는 그해 겨울, 혹독했던 장례식 풍경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p.82

대서가 앉아 있는 무덤 근처에는 몇 그루의 노간주나무들이 서 있고

그 사이를 빠르게 오가는 참새들이

갑작스런 사람들의 행렬에 놀란 듯 시끄럽게 지저귄다.

진입로부터 울렁대기 시작한 가슴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대서는 밑에 내려가면 무엇보다 먼저

차 안에 놓아둔 목캔디를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인사부에 있는 최차장은, 그가 자주 가슴이 울렁대는 것은

심장에 화(火)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뭔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충격적인 일을 겪었을 때

심장에 무리가 오게 되는데,

그럴 때는 단것을 먹으면 좋다는 얘기도 했다.

대서는 한 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자신이 갖다놓은 꽃다발 옆에 나란히 놓여 있는

동생의 꽃다발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p.97

대서의 앞에 가고 있는 자동차 뒤 유리창 스티커에선

'아이가 타고 있어요'란 글자가 노랗게 반짝인다.

대서는 그 말이, '우리는 지금 행복해요.

그러니 제발 우리의 행복을 해치는 위험한 짓일랑은 하지 말아주세요'

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경아가 태어났을 때 대서도 카센터에 가서

노란 바탕에 크고 귀여운 글씨로 쓰여 있는

'아이가 타고 있어요'를 사다 붙였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세상이 완전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어떤 절대자에 의해 그의 가족이

보호받고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많은 게 변했다.

이젠 작은 충격만 와도 곧 부서질 것처럼

그들을 감싸고 있는 막이 너무 얇아져 있다.

그리고 원래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교회에 다니는 이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험에 든다'라는 말이 바로 이런 의미일까? - 세일링

 

p.134

"얼마 전에 우리 이사가 그런 말을 하더라.

인생은 두루마리 화장지 같아서,

처음에는 아무리 써도 남을 것 같지만

반이 넘어가면 언제 이렇게 줄었나 싶게 빨리 지나간다고.

그 얘길 들으니까 나도 뭘 위해서 이러고 사나 싶은 생각이 들어."

- 농장의 일요일

 

p.278

그녀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커피숍 안을 둘러보았다.

점심을 일찍 먹고 들어온 회사원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사이로 지나가는

여종업원의 엉덩이를 무심코 쳐다보았다.

거기엔 그녀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소멸해버린 팽팽함이

팬티라인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스웨터 안으로 목을 움츠리며

지친 표정으로 남자에게 눈길을 돌렸다.

-휴, 나는 왜 이렇게 성질이 못됐지? 응?

사사건건 남의 약점이나 붙잡고 늘어지고......

내가 생각해도 좀 유별난 데가 있어.

-선생님, 요즘 애정결핍이신가 보네요.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하긴, 나도 내가 싫은데 남들은 오죽하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말했다.

마치 애원을 하듯이

-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

정말이지, 이건 내 솔직한 심정이야.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하고, 만나면 즐거워하고,

헤어지면 아쉬워하고...... 응?

나도 내가 쓴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

근데 왜 그게 그렇게 힘든 거지?

그렇게 하면 되는데 난 왜 그게 안 되는 거지? 

 

p.286

오래 전, 그녀가 딸아이를 낳았을 당시 남편은 미국에 가 있어

그녀는 조산원에서 혼자 아이를 낳았다.

식민지시대에 지어진 조산원 건물은 너무 낡고 추웠다.

하얀 페인트칠을 한 벽에는 푸른 이끼가 잔뜩 끼어 있어

마치 건물 자체가 죽어가는 식물처럼 보였다.

 

p.293

그녀는 의사와의 관계가

예정된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두 사람이 처음부터 암묵적으로 합의한,

일종의 게임 내지 유희라고 생각했다.

쉰 살이 넘은 남녀가 동갑이라는 이유로 친구가 되고,

함께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 침대로 가기 위한 과정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가?

그들은 그 절차를 우아하고 자연스럽게 밟아왔고

각자 맡은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해왔다.

이제 아무런 장애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게임을 끝내는 게 두려웠다. - 비행기

 

p.370

우리는 서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약속한 바는 없었지만 장래에 대한 얘기는

어느샌가 우리 사이의 금기가 되어버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위태롭게 이어가던 우리의 관계가

곧 끝날 것 같았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시한부 연애를 하는 연인들처럼

우리는 담담하게 봄날을 지나보내고 있었다. - 二十 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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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와 나, 유쾌한 하녀 마리사, 세일링,

자동차 없는 인생, 농장의 일요일, 13홀,

프랑스혁명사 - 제인 웰시의 간절한 부탁,

더 멋진 인생을 위해 - 마티에게,

숟가락아, 구부러져라,

비행기, 二十 歲

천명관 작가의 단편 11작품이 400여 페이지에 담겨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국내를 배경으로 한 것과

마리사, 존, 토마스, 샌디 등이 나오는 외국 소설같은 작품이 있다

난 그냥 한국을 배경으로 한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작품이 좋았다

(프랭크와 나, 세일링, 자동차 없는 인생, 농장의 일요일,

13홀, 숟가락아, 구부러져라, 비행기, 二十 歲)

 

특히 그가 등단한 작품 '프랭크와 나'는 시트콤 같다

상황은 분명 슬픈데 남들이 볼 땐 황당하고 웃긴 블랙 코미디

 

'자동차 없는 인생'은 그의 장편 <고령화 가족>

미용실 씬의 원형이 된 작품 같다

미용사를 성적대상으로 여기는 게 썩 유쾌하진 않았는데

모든 남자들이 머리 자를 때 그런 상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숟가락아, 구부러져라'는

지금은 사기꾼으로 밝혀진 유리 겔러의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서술 형식이 소설이라기보단 영화 트리트먼트 같다

그리고 엥~? 하게 되는 허무한 결말이 별로였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이름 나오는 소설만 써주셨으면 좋겠지만

아무렴 어떻든간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

결혼은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