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
서울은 어수선하다.
벚꽃의 망울이 팝콘처럼 부풀어 톡톡 터지기 시작했다.
봄이 절정을 향해 막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얼굴에 닿는 바람에서 한없이 육감적인 흙냄새가 났다.
흐드러지고 보드라운 공기에 사람들의 옷이 얇아졌다.
하지만 느닷없이 4월의 벚꽃 위로 12월의 폭설이 쏟아졌다.
벚꽃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봄바람에 낭창낭창 흩날리지 않고 밑으로 수직 낙하해버린 것이다.
룸메이트인 은영은 벚꽃을 보다가 말했다.
"쇼크사군!"
꽃들도 병드는 이상한 계절이다.
'죽을 사' 아닌가.
위대한 시인도 잔인한 달이라고 그렇게 목 터지게 부르짖더니
결국 이 모양이다.
p.17
원래 세상 모든 보스들은 난 뒤끝 없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이 말은 '나는 대단히 뒤끝이 많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회화가 덜 된 어린애들은 윗선들이 하는 말을 해석해내는 능력이 없다.
회사도 가르쳐주지 않는 냉혹한 조직의 생리란
보스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논리, 이성, 상식, 성과, 인간성 같은 아름다운 말?
이런 건 보스의 한마디면 끝장난다.
쟤, 이상하게 맘에 안 들어!
기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들어왔겠지만
이곳과는 영영 굿바이 하는 것이다.
p.21
에디 슬리먼의 옷을 입은 남자 모델들을 보면 황홀하다.
영화배우 강동원은 얼마나 멋진가.
이번 달 화보를 장식한 그의 옷들,
특히 가느다란 팔과 다리에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는
그 옷들은 모두 에디 슬리먼의 작품이다.
말라비틀어져서라도 그 옷을 입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건
어찌 되었든 그가 만든 옷이 멋지기 때문이다.
에디 슬리먼의 옷은 성별과 나이를 초월한다.
니콜 키드먼 역시 그가 만든 셔츠를 즐겨 입었고,
동종업계의 경쟁자인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 라거펠트는 음식을 조절하며 몸무게를 무려 42킬로그램이나 뺐다.
라거펠트는 살리에르처럼 모차르트를 질투하다 머리가 돌아버리는 대신,
젊고 시니컬한 패션 천재를 사랑하는 쪽을 택했다.
살도 빼고, 예쁜 옷도 입고, 정말 영리하다.
p.32
"똥 밟았어, 너!"
은영은 아무리 긴 얘기라도 한 줄로 요약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세 시간을 울며 애인 얘기를 하던 친구에게는
'여자 있네'라는 네 글자로,
사흘을 전화하며 고민상담을 하던 후배에겐
'찢어져!'란 단 세 글자로 상황을 정리했다.
p.37
"이서정. 그러니까 네가 처음 맞선 본 남자한테도 차인 거야."
은영은 가끔 내 아킬레스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릴 때가 있다.
등을 치듯 툭. 툭.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이 없거나,
남자에게 한 번도 거절당해 보지 않은 자의 오만이다.
p.39
어차피 우린 편견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구성해 나간다.
20대엔 새로운 편견을 수집하기 위해 많은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리고 30대부터는 그 사소한 편견들을 점점 확신하고 강화해간다.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친구와 선배들의 조언도 지겨울 만큼 들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엔 그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편견들이 있을 뿐.
p.43
그때 깨달았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일어난 모멸감은 절대로 학습되지 않는다는 걸.
실연을 이미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이 조금 더 견딜 만한 것이 되거나,
그럭저럭 삼킬 만한 것이 되진 않았다.
애인과 헤어진 지 1년이 다 되었는데도
그때의 모멸감은 전혀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p.53
어째서......
이다지도 쉽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걸까.
이 세상엔 지구 둘레만큼의 오해와 한줌도 안 되는 이해만 존재하는 걸까.
p.81
나는 종종 패션계 사람들의 속 안이 공갈빵 같다고 생각한다.
예금통장, 펀드, 하다못해 보험 하나 없으면서
그들은 일단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나라 보험 회사들은 전부 다 망할 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차피 인생이란 언제 끝장날지 모르는 부도수표에 가깝다.
p.92
은영은 다짐을 받으려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나야말로 제발이다!"
제발 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는 그런 유치한 짓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은영은 꼭 그걸 해야 직성이 풀렸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어린 아이 시절로 퇴행하는 순간들이 있다.
은영에게는 바로 이런 순간이 그렇다.
손을 걸고 나면 최은영은 꼭 여섯 살짜리같이 웃었다.
마치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어딜 봐도 야무지게 생긴 서른 한 살 여자에게
저런 맹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걸 알아버린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공유했기에
아마 평생 그녀의 친구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p.95
사실 데이트하면서 자기 밥값도 내지 않는 형편없는 인간이란 말은
엄밀히 말해 남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여자들이 데이트에 나가기 위해 쓰는 비용과 노력, 시간을 생각한다면
남자들은 생각 없이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을 거다.
만약 아니라고 우기는 남자가 있다면 왁싱으로 온몸의 털을 뽑아버리거나,
15센티미터짜리 하이힐을 신겨서
서울의 청계천 광장 보도블록 위를 딱 2시간만 걷게 하고 싶다.
결국 아무리 우겨대도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p.97
카프라제 접시에서 치즈 대신 토마토만 골라 먹으며 내가 물었다.
김민준은 내가 남긴 쫄깃쫄깃한 모짜렐라 치즈만 골라 먹었다.
토마토만 골라 먹는 여자와 그녀가 남긴 치즈말 골라 먹는 남자.
어쩌면 우리는 완벽한 궁합의 연인이 될지도 모른다.
p.102
나는 한약을 싫어했다.
맛은 써서 먹기에 고약하고, 먹으면 울렁거린다.
체질 문제라기보다 심리적인 문제였다.
어린 시절, 사약을 마시고 죽는 사극 <장희빈>의 엔딩 장면을
너무 자주 봤던 것이다.
전인화에서 정선경, 김혜수까지!
사발째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죽는 장희빈을 세 번이나 본 셈이다.
게다가 새하얀 소복 위로 쏟아지는 시뻘건 피는 어찌나 처참하던지.
어릴 적부터 다양한 한약을 먹어왔다.
키가 큰다는 약, 머리가 총명해진다는 약,
생리통을 없애준다는 약, 견비통에 효과가 좋다는 약,
허약 체질을 개선해준다는 약, 약, 약......
그리고 기적적으로 정말 내 체질이 바뀌었다.
나흘을 굶어도 1킬로그램 밖에 안 빠지는 저주 받은 체질로 말이다!
p.106
처음 기자가 되었을 때, 친구들은 열광했다.
내가 영화와 레스토랑 담당 기자가 되었을 때는 더 그랬다.
영화배우 장동건이나 귀여운 조인성을 만날 수 있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공짜로 저녁을 먹으면서
폼나는 해외 출장도 수시로 갈 수 있으니 얼마냐 좋냐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진실은 간단치 않다.
가령 서점 직원은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사표를 낸다.
비슷한 예로 요리사의 아내는 집에서 남편이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유명 레스토랑의 요리사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다.
이유는 맛있고, 빨리 먹을 수 있고, 간단하기 때문이란다.
라면 한 개의 가격은 7백 원이고
그가 굽는 샤또브리앙의 가격은 17만원이 넘는다.
그는 자신이 구운 스테이크를 먹지 않는다.
단지 구워줄 뿐이다.
대개 진실은 이런 황당한 것들이다.
p.107
편집장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스테이크가 아니라 스테이크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팔아라.
결국 스테이크보단 제대로 찍은 스테이크 사진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알맹이보단 때때로 포장지가 더 중요했고
'외면'이야말로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신봉하는 곳이었다.
p.119
나는 드라마의 통속성이 좋았다.
'통속通俗'이란 세상과 통한다는 말 아닌가.
그 좋은 말을 사람들이 한껏 폄하해 쓰는 건
어쩐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적 만족을 느끼며 니체나 들뢰즈, 지젝을 읽고, 타르코프스키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비평하듯 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울고 웃게 만드는 힘,
내 꿈도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을 거란 믿음,
세상이 어쩌면 살만한 곳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노인과 아이를 동시에 열광하게 하는 것,
나는 이것이 드라마가 가진 통속의 힘이라고 믿는다.
p.136
고등학교 동창인 여자친구들 사이의 우정이란 그런 것이다.
한 남자에게 똑같은 증오의 눈길을 보내고, 동시에 열광하는 것.
어느덧 남자에 대한 취향은 비슷해지고 싫어하는 것도 비슷해진다.
10년 동안 한 침대를 쓴 부부처럼.
p.146
일과 휴식의 경계 없이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하다 보면
가끔은 정신을 놓을 마큼 재미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가십은 사람들에게 숨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것은 나이 서른에 먹는 불량식품처럼 유해하지만 달콤하다.
휴게실의 수다는 그랑데 사이즈의 카푸치노 한 잔이 바닥나도록
끊이지 않았다.
분명히 본인들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갈 즈음엔
아마 애 셋은 낳아 키운다는 얘기가 돌지도 모른다.
이곳에선 소문이 늘 사실처럼 유통된다.
소문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문이란 단지 우리들의 행복한 오락이기 때문이다.
인생엔 신문에서처럼 '바로잡습니다' 코너가 존재하지 않는다.
p.184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인터뷰는 완벽했다. 촬영은 순조롭고 즐겁게 진행되었다.
나는 새끼 손가락만한 MP3에 3시간짜리 녹취록을 담았다.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한 영화배우 정시연의 목소리를 채집한 것이다.
이건 목소리를 읽은 대신 매끈한 다리를 갖게 된
인어공주를 인터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시 찾은 인어공주의 목소리가 정말 맘에 들었다.
특히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회한에 찬 자신의 인생을 고백할 때는 더욱 그랬다.
물론 민준 선배는 어떤 스커트를 입혀도 완벽히 소화해내는
인어공주의 미끈한 다리가 훨씬 더 맘에 들었을 것이다.
p.209
전화란 원래 기다리면 오지 않는다.
기다리면 오지 않는 것은 왜 이리 많을까.
애인, 키스, 편지, 생일선물, 합격통보, 1등 로또당첨.
기다리지 않아도 꼬박꼬박 날아오는 건 카드 청구서밖에 없는 것 같다.
p.253
시간이란 직선으로 흐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탔던 회전목마같이 돌고 돈다.
사람들의 기억이란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때때로 그것은 포개지고 겹쳐져서 어떤 것이 과거였고, 현재이며,
미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버린다.
p.261
마음이 심란했다.
행거에 잔뜩 걸려 있는 스키니 진들을 보니 더 그랬다.
몸무게는 다시 늘었고, 에디 슬리먼은 내게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데,
다음달 마감은 자꾸 앞으로 다가왔다.
p.261
"그럼 의사면서, 요리사에, 글까지 잘 쓰는 남자란 말이야?
박우진이 르네상스 맨이었어?"
p.264
사람들로 북적이는 극장 앞,
웅성대던 소음들이 전부 볼륨을 꺼버린 듯 잠잠해졌다.
나는 그 침묵 같은 고요함 속에서
나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그 길을 지나가는 중이었고 이 남자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해도,
나는 분명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을 것이다.
저절로 눈길이 멈추던 그곳에,
도리 없이 사랑에 빠져들게 할 정체 모를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과학자들과 사주학자들이 말하는
'호르몬의 농간'이나 '천생연분' 같은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에게서 어떤 광채를 보았다.
대책 없는 사랑에 빠진 여자들이 한순간 보게 된다는 그것.
p.265
그는 육체노동으로 얻은 자연스런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들어올리는 건 피트니스 클럽의 역기나 벤치 프레스 같은 게 아니라,
엄청난 무게의 양배추 박스나 고깃덩어리들이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은 그런 일상적인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그에게서 감동 받은 점도 바로 거친 노동의 일상이 주는 순수함이었다.
그러면서 그토록 명석하고 지적일 수 있는 것은
이 남자의 놀라운 균형 감각 때문이었다.
p.287
"'무이'에서 산 화이트 셔츠는 다른 사람 거야. 지금 내가 요리 배우는 쿠킹 스뉴디오에 다니는 남자. 나중에 소개시켜줄게. 그 남자 보면 너도 놀랄걸? 너무 작고 못생겨서. 하하."
은영이 망고를 한입 베어 물었다.
"먹어봐. 이 제주도 망고 그 남자가 사준 거야. 하하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꾸만 웃는 건 다른 게 아니다.
넋 나간 듯 시도 때도 없이 우는 것도 다른 게 아니다.
은영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불행을 가져다주는 복잡한 사랑이 아니라,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쾌한 사랑 말이다.
틀림없었다.
망고같이 상큼한 저 웃음소리만 들어도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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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실제로 패션지 기자로 일한 경력만 없었어도
나이가 조금만 더 어렸어도
난 그녀를 추앙했을지도 모르겠다.
읽다 보면 그녀 자신의 경험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탰을 뿐이란 생각이 든다.
나도 방송 작가로 있었던 기억을 되살리고
보태고 싶은만큼만 딱 더 보태 소설을 한 편 써볼까?
그러자 그녀가 좀 대단해 보였다.
패션지 기자로 일한 경력이 있는 모두가
그녀만큼 재미있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기자였던 자신의 모습을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 방송 작가였던 그 때의 내 모습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