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슈미트 <내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
p.50
아주 세련된 여자 몇 명이 나를 지나쳐
고급스러운 피트니스 클럽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날씬한 다리에 타이트한 명품 운동복 바지를 입고
앙증맞은 가죽 신발을 신었으며,
어깨에는 멋진 명품 운동 재킷을 걸치고
가냘픈 목에는 작은 수건을 둘렀다.
저런 여자들이 뭐 하러 운동을 하는지 의문이었고
나도 모르게 질투를 느꼈다.
어쩌면 나도 운동에 재미를 붙이면,
머지않아 저런 운동화와 앙증맞은 바지를,
그리고 수건을 목에 두르고 날마다 이곳을 출입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p.72
루카스는 아직도 1시간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는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예쁜 검은색 레이스 속옷을 입고
그의 주의를 끌어보려 애썼다.
"나 목욕했어."
"개운해?"
루카스가 나를 올려다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응, 아주 상쾌해."
내가 섹시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음악을 틀었다.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검은색 레이스 속옷 차림으로 소파 앞에서 춤을 췄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브래지어를 풀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브래지어를 벗었다.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는 브래지어를 루카스에게 던져 명중시켰다.
비싼 레이스 브래지어가 정확히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의 반응은 이랬다.
"미쳤어? 이렇게 높은 단계까지 온 적이 없는데 자기 때문에 죽었잖아."
루카스는 그제야 올려다보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또 내가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옷 아직 안 입었네."
그는 내가 나체 상태라는 걸 확인했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나는 다시 옷을 주섬주섬 찾아 입고 일단 포기했다.
루카스가 지구를 점령하려는 외계 생물체에게서 지구를 구하기 전에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 같았다.
p.107
서른 넘은 여자가 결혼식에서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짓이다. 나도 잘 안다.
남자들은 이런 시선을 느끼면 여자가
"너는 언제 청혼할 건데? 우린 언제 결혼해? 나 사랑해?"라고
묻는 것 같아, 금방 겁을 집어 먹고 너무 중압감을 느낀 나머지
관계마저 끝내버리는 수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행위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고
오늘은 왠지 도발을 하고 싶었다.
p.160
나무가 즐비한 곳에 다다르자, 나는
이름이 '질투 난 심장'인 인디언 추장처럼
나무 사이를 슬금슬금 걸어 다녔다.
그리고 내 뒤에는 이름이 '흥분한 청소 닭'인 인디언 여자가
중간중간 쓰레기를 주우며 따라왔다.
p.168
"루카스, 나 집에 가야겠어.
이런 냄새를 풍기면서 사람들 틈에 낄 수도 없고,
냄새 때문에 속이 안 좋아. 집까지 태워다줄 거지?"
"자리 비우기 힘든데. 조금 있으면 경찰서에서 사람이 다시 나올 텐데
그때 내가 있어야 해."
"자비네가 처리하면 될 거 아니야! 알아서 하라고 그래!"
"왜 그래? 개똥을 밟은 게 내 잘못도 아니고
자비네 잘못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래?"
"왜 그러냐고? 내가 똥 속을 헤집고 다니는 동안 자기는 뭐 했어?
그 환경-광신도 여자랑 붙어 앉아 있었잖아.
그래놓고 나보고 왜 이러냐고?"
"유치하게 왜 이래? 혹시 생리해?"
더는 참이다. 이제는 정말 끝이다.
나는 이런 말은 딱 질색이다. 혐오한다.
남자들은 할 말이 없으면 꼭 이렇게 묻는다.
여자의 태도가 자기 때문이라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자기랑은 전혀 상관없고 결백하다고 믿는다.
다 생리 탓이고 생리를 하는 여자 탓이다. 정말 간단하다.
"아, 됐어!"
p.188
초라하다, 초라하다 해도 지금의 내 모습처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침대 위에 앉아 울고 있었고,
화장은 다 번졌고, 티셔츠는 너무 꽉 끼었다.
나는 자기 연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만약 나처럼 침대에 앉아 비참하게 우는 친구가 있다면,
나는 뭐라고 충고했을까 생각해봤다.
아마도 제발 정신 차리라고 말했을 것이다.
카타는 엄마에게 갔고 곁에는 다른 친구도 없었기에
나는 이 말을 혼잣말처럼 나 자신에게 내뱉었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화장이 조금 번지기는 했지만
아직은 괜찮은 얼굴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말했다.
"안토니아, 제발 정신 좀 차려. 오늘 저녁을 어떻게 보낼지나 생각해!"
p.202
결혼을 앞둔 이자벨의 처녀 파티로,
회사 동료였던 이자벨은 지루함 그 자체였다.
어찌나 지루한지, 만약 이자벨과 말을 하면
제아무리 케이트 모스라도 마약 1킬로그램을 먹고도
잠에 취해 런웨이에서 쓰러질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보다 더 지루한 남자랑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으면 다른 모든 사람은
철인 3종 경기를 세 번 왕복하고 온 것 같은 기분에 빠지곤 했다.
p.312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켰다. 아무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음성 사서함을 들어보았다.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친구 같은 여자가
다정한 목소리로 음성 메시지가 하나도 없다고 알려주었다.
전화 속 여자도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최근 며칠 동안 계속해서 나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알려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p.316
나는 루카스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가 회사로 전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어쩌다 회사로 전화해도 상당히 사무적인 어조로
짧게 통화하고 끝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웬만하면 회사로 전화하지 않았다.
죽은 물고기처럼 차가운 그의 태도가 싫었다.
p.325
루카스와 내가 다시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멜로드라마에서는 모두 껴안고 해피엔드인데,
현실은 그게 아닐까 봐 두렵다.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정말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방송 편집실에서 일하던 니나 슈미트의 첫 장편소설
그녀는 이 작품 하나로 일약 스타작가가 됐다고 한다
딱딱한 독일 문학 시장에 유쾌하고 코믹한 별이 나타난 것이다
엉뚱하고 발랄한 여주인공의 행동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그려진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해피엔딩
아마 곧 영화화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그냥 웃고 싶을 수도 있다
주제 의식이라든가, 사회 비판 같은
골치 아픈 것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등단작에는 그런 것이 필요하겠지만
우선 등단한 다음에
내 마음대로 쓰는 책들은
그저 시트콤 같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