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p.32
유년기 그것은 누구에게나 실락원이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다'라고
어떤 시인을 말했다.
어린 시절은 의외의 놀라움, 신비와 호기심,
감동에 넘친 지루하지 않은 한 페이지다.
그리고 우리는 몇 살이 돼도 그 장을 펼쳐 보고 싶어진다.
p.43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p.103
나도 보트를 타고 떠내려가면서
강변의 재미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빈 사람의 쾌활하고 솔직하고 구김살 없고 거리낌 없는
대도회인다운 세련된 감각과 심미주의, 찰나적인 쾌락의 추구,
그러면서도 한없이 호인이고
악의나 치사한 점은 티끌만치도 없는 성품이
무슨 계시처럼 일순간에 파악되었다.
p.135
나도 주혜도 작가를 지망하고 있었다.
재능에 대한 정당한 회의를
어린 연령과 또 열렬한 지식욕이 가려 덮고 있었다.
하늘은 넓었고 우리는 얼마든지 날 수 있다고 믿었다.
p.136
또한 흔히 딸이 그렇듯 아버지를 숭배하고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음에 들고 싶다는 욕망이 의식 밑에도,
또 의식 표면에도 언제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이 실현되는 때마다
나는 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행복했었다.
p.144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 본다.
p.154
전에는 욕망도 많았다.
중학교 때, 죽어도 평범한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지금껏 어느 마녀의 저주같이 따라다니고 있다.
나를 그렇게 형성하려고 하고 있다.
p.155
이상과 꿈이 우리를 만든다.
우리에게도 뜻밖인 형태로.
동화같이, 분홍 솜사탕 맛같이 느껴지는 유년기,
인식에 모든 것을 바쳤던 10대와 20대,
타자(사회)와 첫 대면한 이래의 여러 가지의 괴로움,
아픔, 상처에 뒤덮인 20대 후반기......
지금 회상해 보면 한마디로 내가 '어렸었다'는 느낌뿐이다.
꿈이 너무 컸었다.
요구가 너무 지나쳤었다.
나 자신에게 타인에게 우주 전체에게......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책이 맘에 들때(지금은 그것이 벤의 서간집이다)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p.188
많은 사랑을 적당한 방법으로 받고 자라난 사람만이
정상적인 정서와
남을 사랑하는 마음의 부드러운 풍요를 지닐 수 있따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p.206
어떤 저명한 평론가는
'여자는 남편하고 결혼하는 것이지
남자하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말로 지언(至言)이다.
그 반대 입장에서도(남자의 케이스에도) 물론 진리일 것이다.
나는 남편과 결혼했다.
그리고 그 남편 속에서 '남자'를 추상해 내려고 노력해 보았다.
p.259
내가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워했었던 것은
내가 과연 그 미래의 내 아이에 대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를 좋아하고 있지 않던 내가
내 아이라고 해서 예외적인 태도를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게 되리라는 관측을 불허했었다.
그러나 출산이 끝난 직후 내 아이와 첫 대면을 했을 때
이 공포는 사라지고 말았다.
'첫눈에 반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주먹보다도 작고 완전히 동그란 머리와 긴 머리카락
그리고 벌써부터 생긴 그 자체에 대한 기갈을 느끼는 듯
손을 빨고 있던 모습, 귀여운 울음 소리......
아무튼 한눈에 마음에 들어 버린 정화였다.
너무나 작았고 생기에 넘쳐 있었다.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나에게 의존해 있었고 약했다.
p.280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채워진 사람, 풍요한 사람이다.
갈증을 모르는 사람이다.
p.318
너무 큰 행복의 한가운데서 - 1964.2.26.
너무 큰 행복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을 상실할 예감으로 자꾸 불안해지는 모양이다.
p.320
방법 - 1964.4.1.
격정적으로 사는 것 -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p.321
재능 - 1964.4.1.
재능을 일상 회화 속에다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사랑의 마약 밀매상적 요소 - 1964.4.1.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 밀매상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p.322
임신 - 1964.4.12.
임신이나 하고 싶다. 모든 과제에서 도피하기 위해.
보다 가정에 뿌리 깊어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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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전에 친구에게 빌린 책을 이제서야 다 읽었다
뭐랄까...... (그래도 밝은 책이라고 했지만)
우울한 기운이 느껴졌달까
자살 얘기가 많이 나오는 시기에
자살한 천재 작가의 책은 위험한 것이다
어쨌거나 일본의 장수 할머니를 제치고
기네스북에 오르고 말겠다는 삶에의 강렬한 집착이 있는 나는
자살은 생각만으로도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한다
사람은 때로 죄를 짓기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