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지구영웅전설>

 

p.27

"넌 어떤 편이야?"

그 당시엔 편을 나누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얘기를 하다가도 꼭 친구들은

'넌 어떤 편이야?'란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나뉘어

대립해 있던 시절이었다.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나라는 남과 북으로,

운동회에선 청군과 백군이, 영화에선 좋은 놈과 나쁜 놈이.

그리고 지진아들은,

이를테면 육백만불의 사나이와 슈퍼맨이 대결을 한다면

넌 누구의 편인가,

소머즈와 원더우먼이 싸운다면 넌 누구의 편인가 따위를

잘도 진지하게 모여 따지고 의논했던 것이다.

 

p.32

친구가 잡지의 첫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쥐구멍 속에 비친 한 뼘의 햇빛처럼,

눈부신 무언가가 그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둘러서서 볕을 쬐는 쥐들처럼, 우리는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대개 프리즘을 거쳐 분산된 햇빛처럼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었다.

그 길고 매끈한 다리의 사이에는 그래서 영롱한 무지개라든지,

그 빛을 받은 찬란한 화초라든지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썰어놓은 돼지의 간(肝)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p.33

정확히 세 시간 후, 나는 계모가 일을 나가는 빌딩의 옥상 위에 서 있었다.

계모에게 말 못 할 원망이 있었던 게 아니라,

빌딩의 옥상이란 곳이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계모의 이름을 댈 수 있는 이 빌딩이 그래서 나에겐 제격이었다.

결심을 굳히는 데 한 시간, 준비를 하는 데 한 시간,

빌딩을 찾고 올라오는 데 한 시간을 소비했다.

이제 더는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

준비해온 빨간 보자기를 목에 묶으며 나는 생각했다.

잠시 이 빨간 보자기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것은 뭐랄까, 오랜 고민 끝에 생각해낸 자살의 도구였다.

막상 결심을 굳히고 나니 은근히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소문과 손가락질이었다.

그래서 그 어떤 아이디어가 나에겐 필요했고,

결국 나는 '슈퍼맨의 흉내'를 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엔 육백만불의 사나이를 따라하거나

슈퍼맨을 흉내내다 죽은 아이들이 꽤 여럿 있었다.

이미 신문에도 몇 차례나 그런 죽음이 보도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황당한 일도 눈에 띄는 일도 아니었다.

단언컨대, 목에 두른 빨간 보자기를 보는 순간 경찰은 단정지을 것이다.

또 슈퍼맨을 흉내낸 것이러곤.

신문기자도 포르노의 더러운 추문 따위는 파고들 겨를이 없을 것이고,

담임도 죽음 앞에선 굳게 입을 다물 거란 생각이었다.

나는 나의 자살을, 단지 '그럴 수 있는' 평범한 죽음으로 가장하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실제로 매어보니, 빨간 보자기는 생각보다 훨씬 초라한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러닝의 가슴팍에 커다란 'S'자를 그려넣었다.

비록 빨간색이 아닌 검은색 사인펜이었지만,

이 정도면 알아보겠지, 하며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채점을 죽음보다 싫어했던 나는,

여간해선 빨간색 펜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죽는 그 순간에도, 지진아와 슈퍼맨 사이에는

그 정도의 극복하기 힘든 핸디캡이 도사리고 있었다.

옥상의 난간에서 바라본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p.45

꿈만 같았다.

지구상의 어떤 인간이 가끔 슈퍼맨에게 응석을 부려

하늘을 맘껏 날아볼 것이며

-물론 배트밴은 차갑기 그지없지만-

로빈과 함께 월드시리즈의 결승전을 관람하며

목놓아 뉴욕 양키스를 응원할 것이며,

원더우먼으로부터-물론 목소리일 뿐이지만-

"키드, 스파이더맨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호출을 부탁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p.53

"축하해. 이제 자넨 영웅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이게 현실일까?" 내가 소리쳤다.

"물론."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너의 영혼은 백인이니까."

 

p.53

1990년 3월 21일의 일이었다.

나는 영웅들의 축하 속에서 바나나맨의 심볼과 마스크,

강렬한 노란색의 특수복과 배트맨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해준

바나나스카이콩콩을 선물받았다.

DC코믹스의 사장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선언하는

기념패를 제작했으며,

호외로 나의 프로필과 무척 과장된 활약상을 대서특필해주었다.

그 호외의 제목처럼 그야말로 '바나나맨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바나나맨이 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가까운 맥도널드에서 네 개의 빅맥세트와 로빈의 치킨버거를 산 후,

월마트에 들러 원더우먼이 부탁한 탐폰을 사오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임무였다.

 

p.81

"이해할 수 없어. 정말 고약한 취미야!"

로빈에게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웅 로빈의 개인 벙커 속이었고, 그 속엔 우리 둘뿐이었다.

벙커라고 한다고 해서 군대시설 같은 걸 생각하면 곤란하다.

말인즉슨, 호텔의 스위트룸과 같은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특히 로빈의 벙커는 코넬대학 소속의 일 년차 치어리더의 방처럼 요란하다.

말인즉슨, 외장(外裝)의 보호장벽을 일컫는 뜻에서

영웅들의 방을 '벙커'라 부르는 것인데,

바로 그런 이유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엔 벙커를 이용했다.

흐느끼는 로빈의 모습이 요란한 벙커의 인테리어 때문에

더욱 슬퍼 보인다. 뭐랄까, 디즈니랜드의 꽃동산에서 치러지는

장례식 같은 걸 지켜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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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소설의 매력을 알 수 있었던 책

단편만 읽었을 땐 사람들이 왜 박민규 박민규 하는지 몰랐는데

장편을 읽으니 그의 웃기고 도발적인 상상력에 놀라 까무라칠 뻔

그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단편집 <카스테라>보다

그의 장점이 흠뻑 젖어있는 장편 <지구영웅전설>을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한국형 영웅인 '바나나맨'의 탄생 비화도 웃기고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 각 영웅의 특성에 맞춰

미국을 까댄 것도 통쾌하다

비판의 수준의 깊이가 없고 평이하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 점이 대중에게 먹힐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박민규는 같은 잡지사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직장을 때려치고 2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글만 썼"다 한다 아내 대박!!

그리고 그 동안 쓴 소설은 단편이 서른 편,

오백 매 분량의 경장편이 두 편,

천이백 매 분량의 장편이 한 편. 박민규도 대박!!

그래서 그는 수상소감에

"연연하지 않음으로써 연연해준,

이 풍진 세상에서 나를 방목해준"

아내에게 영광을 바친다

 

멋지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우선 나는 2년 동안 단편 소설 10편, 장편 1편에 도전 ㅋㅋ

살림도 해야 하므로

정이현 <오늘의 거짓말>

 

p.16

남자 나이 서른이 넘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비 오는 일요일 밤은 음주 단속의 사각지대라는 것.

느닷없이 연락해오는 옛 동창은 십중팔구

다단계 회원 가입 권유의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주의해야 하며

예전 여자의 애정 문제에 관여하는 일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는 것.

그런 식의 사소하고도 세속적인 지혜들은

예기치 못한 화를 미연에 막아준다.

경험 법칙에 의해 나는 침묵의 카드를 선택했다.

- 타인의 고독 (제5회 이효석문학상, 2004)

 

p.39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5시 55분

서초구 서초동 1675-3번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한 층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에 지나지 않았다.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 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주말 저녁에는 증권회사 신입사원인 남자 친구와,

실제로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모범적 이성 교제를 위한 데이트 매뉴얼>에 나오는 방식대로 데이트했다.

성실하고 지루한 데이트였다.

노력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1990년대가 겨우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당혹스러웠다.

참 아름다운 한 해였지, 라고 말하려다 생각해보니

마치 아무 전화번호나 눌러 부동산 투자를 권유하는

텔레마케터가 된 것처럼 무책임한 기분이 든다.

그래, 무언가 특별한 1995년이었다고, 그렇게 기억해두기로 하자.

- 삼풍백화점 (제51회 현대문학상, 2006)

 

p.86

남편이 그 보험회사의 전무이사 이름을 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남편은 비평준화 시절

명문이라 일컬어지던 K고등학교와 S대 상경대학을 졸업했다.

동창의 인맥은 차마 짐작하기 힘든 곳까지 구석구석 연결되어 있었다.

웃겨, 정말. 그 알량한 학연이 뭐라고들 그러나 몰라.

평소 마뜩잖게 여기곤 했지만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와락 의지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 어금니

 

p.97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함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거짓말은 다만 내 밥이지.

밥은 하루에 세 번 먹고 거짓말은 하루에 스무 번 정도 하니까,

거짓말은 내 밥일 뿐만 아니라 커피이자 담배이며 맥주이고

또한 교통카드인지도 몰라.

나는 하루에 스무 번 거짓말을 하여 스타벅스의 아이스 모카를 마시고,

마일드 세븐을 사 피우며, 술집에서 친구들 눈치를 보지 않고

국산 맥주보다 이천 원 더 비싼 벨기에산 호가든을 주문하지.

교통카드를 꽉꽉 채워 충전하지만

어떤 날 아침엔 칠 센티미터 구두굽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거든.

그럴 땐 오지 않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오른팔을 척 올려 택시를 세워.

기본요금 거리의 지하철역 앞에서 택시를 내리는 순간에는 항상

관자놀이가 얼얼해지도록 갈등하지.

회사까지, 그냥 타고 가버릴까, 그럴까, 이대로 쭉.

 

p.123

퇴직금은 쥐꼬리만해.

이걸로 오래 버티긴 힘들 것 같아서 적금을 해약했어.

'만기가 얼마 안 남으셨는데 아까워요.'

은행 여직원의 만류에 진정성이 묻어나서 싫지 않더라.

그 은행의 영업전략 또한 고객에게 진심을 다해 응대하라,

는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내일은 일단 늦잠을 자겠어.

그러곤 느지막이 일어나 방을 구하러 나갈 거야.

나무늘보처럼 마음껏 뒹굴거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찾아서.

언제까지 엄마한테 얹혀살 수는 없잖아.

내가 가진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옥탑방뿐이겠지만

내 머리꼭대기 위에 아무도 없을 테니 오히려 안심이야.

그런데 설마 당신, 옥탑방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곳에서 하루 종일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아무거나, 하고 싶어지는 걸 할래.

무위도식과 허송세월의 시간은 헛되다는 충고라면 사양할게.

헛되고 헛되는 모든 것이 헛되면 좀 어때.

우선 방바닥에 길게 엎드려 쉴래.

그러다 심심해지면 가까운 지하철역 앞으로 가서,

택시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는 사람들을 구경하지 뭐.

그러다가 또 너무 심심해지면 아작아작 팝콘을 씹으면서,

내가 태어난 해에 씌어진 한국어로 된 책들을 모조리 읽게 될지도 몰라.

그럼 나는, 저 미지의 1979년 7월 7일

서울의 대기 온도와 바람이 불어오던 방향, 바람의 속도 같은 것들.

1979년 7월 7일생의 불완전한 거짓말, 진짜 비밀의 공포에 관하여.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 오늘의 거짓말

 

p.127

그 남자의 목욕 생활은

또래 대도시 거주민들의 평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땀이 많이 나는 여름철에는 매일,

봄과 가을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샤워를 했다.

겨울에는 간혹 이틀을 넘긴 적도 있었으나

그래도 일주일에 세 번은 꼭 향 좋은 보디샴푸를 목욕타월에 묻혀

성의껏 몸을 닦았다.

자주 샤워를 한다고 해서 대중목욕탕엘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한 달에 두세 차례는 대중탕에 들러

열탕과 냉탕을 번갈아 오가며 때를 불리곤 했다.

술을 아주 많이 먹은 몇 번인가는

술집 근처 사우나의 수면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는

해장목욕을 한 뒤 아침에 귀가한 적도 있었다.

섹스를 하기 전에는 가능한 한,

섹스를 한 뒤에는 반드시 욕실에 들러

사타구니를 중심으로 한 하복부를 벅벅 문질러 씻는 것도

대부분의 성인 남성들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몹시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비교적 무난한, 중상(中上) 이상의 청결도를 유지하고 있는

삼십대 남자였다.

- 그 남자의 리허설

 

p.165

과외전면금지조치가 내려진 것은 1980년 7월 30일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길고 요상한 이름의 조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어머, 오늘 과외 선생님 오시는 날인데 깜빡했네.

그냥 너희들끼리 재미있게 놀렴.

이것은 금지된 문장이었다.

네 입에서 저 비슷한 소리라도 새나오는 날에는

그야말로 결딴 나는 거라면서, 엄마는 신신당부와 협박을 반복했다.

네가 과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나는 순간

엄마는 경찰서에 끌려가고,

아빠는 그나마 붙어 있던 회사에서도 단칼에 해고된다는 거였다.

우리 식구 다 끝장이야.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다, 절대로!

- 비밀과외

 

p.217

그녀는 변한 것이 없었다.

어깨를 덮는 길이의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방긋 미소 지었다.

"현주 맞지? 어쩜, 세상에. 얼굴 너무 많이 상했다. 못 알아볼 뻔했잖아."

나는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품이 헐렁한 청재킷과 청치마,

드라이어로 한껏 세운 뒤 헤어스프레이를 뿌려

닭 벼슬처럼 빳빳하게 고정시킨 앞머리,

발목까지 올라오는 흰색 캔버스천의 농구화까지.

양채린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1989년의 모습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났다.

 

p.224

어묵꼬치처럼 매듭 없이 긴 손가락,

깨알 같은 블랙헤드로 뒤덮인 콧잔등,

크게 웃을 때마다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황금 재질의 어금니.

그래도 쌍꺼풀 없이 큰 눈은 제법 어글어글하고,

둥근 턱 선이 선량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중매쟁이의 말에 의하면 남자는 막내아들인 데다 연봉도 적지 않다고 했다.

결혼이 늦어진 것은 단지 때를 놓쳤을 뿐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이 담배도 술도 좋아하지 않으며 신실한 장로교 신자이므로

일요일에는 꼭 아침 예배에 참석한다고 강조했다.

 

p.247

"언제는 남자에 환장한 것처럼 굴더니 왜 또 변덕이냐."

아내를 자궁암으로 잃었다는 마흔두 살 의사와의 맞선을 거절하자,

엄마는 단박에 비아냥댔다.

"하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한번 결혼했던 남자는 나도 영 안 내킨다."

엄마는 오해했다. 그가 상처(喪妻)한 남자라 싫은 게 아니라,

상처(傷處)를 가지고 있어서 싫었다.

회사에서는 자잘한 실수를 반복해 직속 상사에게 질책을 들었다.

"왜 이렇게 부주의한거야? 정신을 어따 팔고 다니는 거지?

쯧쯧, 하여튼 나이 든 여자들이란."

상사가 대놓고 혀를 찼다.

그의 질타가 내 잘못보다 과도하다고 느꼈지만,

평소와 달리 화가 나지 않았다.

와사비가 많이 들어간 초밥을 무심코 입에 넣은 것처럼

코끝이 확 아려왔을 따름이다.

- 위험한 독신녀

 

p.279

그는 완강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고집스러운 입매에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그 남자는 무척 피로해 보였다.

썩어 들어가는 내장을 확 까발려

쇼윈도에 진열하고 싶다는 욕망이 주춤주춤 사그라졌다.

그래, 언제나 딱 여기까지였다.

물고 뜯고 찢고 부수고 피 흘리는 전투는 우리와 거리가 멀었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막는 태도가

공동생활에 합당한 지혜라고 믿어왔다.

평화적 거리를 유지하자는 무언의 약속.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격렬한 부부 관계인지도 몰랐다.

- 어두워지기 전에

 

p.300

상현은 세 번 데이트 당 한 번 꼴로 연희에게 키스했으며

입술을 붙였다 떼는 시간은 최장 10초를 넘지 않았다.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젖가슴을 쓰다듬기도 했지만

손을 브래지어 속으로 밀어넣은 적은 없었다.

상현의 스킨십은 어쩐지 본인의 들끓는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예의의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 이 사람은 적어도 여자를 고무 인형으로 대하는

플레이보이는 아니니 안심이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니까.

연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남자가 여자의 몸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녀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는 간접적 신호일까.

그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상현은 연희에게 이미 명료한 자기 의사를 밝힌 것인지도 모른다.

- 익명의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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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정이현 작가의 2번째 단편소설집

이걸로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 그녀의 작품은 모두 다 읽었다 ^0^

기술적인 면에서도 야무지고, 예술적인 면에서도 감동이다

타인의 고독, 삼풍백화점, 어금니, 오늘의 거짓말, 그 남자의 리허설,

비밀과외, 빛의 제국, 위험한 독신녀, 어두워지기 전에, 익명의 당신에게

10편 다 대단히 재밌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 난 언제쯤......

정이현 책 백번 필사해야겠다

 

고예나 <마이 짝퉁 라이프>

 

p.10

편의점에는 시계가 없다. 시계뿐만이 아니다. 창문도 없다.

그러니 이곳에는 낮과 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이곳은 화장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해와 달을 볼 수 없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화장실.

나는 오래 전부터 아버지가 이런 말을 건네는 상상을 했다.

집에서 너는 한 칸만 쓰도록 해라.

그러면 주저 없이 화장실을 선택할 것이다.

먹을거리가 쌓여 있는 부엌도,

심심함을 달랠 수 있는 텔레비전과 푹신한 소파가 있는 거실도,

옷과 침대가 있는 내 방도 아니다.

나는 씻을 수 있고 쌀 수 있는 화장실을 선택할 것이다.

샤워 부스에서 냉수마찰을 한 뒤

세숫대야에 물을 떠 놓고 기도를 할 것이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나르시시즘 놀이도 할 것이다.

그게 지겨워지면 욕조 안에서 잠을 잘 것이다.

몸을 정갈히 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매일 한 후

변기 위에서 심신 수도를 할 것이다.

인간은 물만 마시고도 오래 살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마치 화장실에서의 생활은

태초의 원시인 생활과 흡사하다.

당연히 아버지는 나에게 저런 질문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주 옛날부터 화장실을 쓸 때마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왔다.

다른 사람들 역시 아무도 물어보지 않을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살아생전 절대 물어보지 않을 질문에 대한 답을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꾸깃꾸깃 보관하는 사람들.

그들은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나에게 묻기만 해라.

나는 변기에 앉아 생각하는 로댕처럼 아주 진지하게

'화장실'이라고 말해 줄 것이다.

 

p.25

나는 지금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내세울 수 있는 것도 없다.

남보다 한글을 빨리 깨우쳤다는 것을 가지곤

어디 가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나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바로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걸 알고

일찌감치 그 꿈을 포기했다.

꿈이 없으면 어깨가 무겁지 않다.

꿈은 누가 시켜서 간직하는 게 아니다.

차라리 누가 시켰으면 호소할 곳이라도 있을 것이다.

자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피 흘리며 걸어가는 젊은이들.

나이가 들수록 꿈은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

그냥 살아 나가면 된다.

특정한 꿈이 없으므로 날개가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것처럼

나는 하루하루가 자유롭다.

 

p.41

B는 엄청난 마당발이다.

깊고 좁은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나와는 정반대다.

동아리 사람들, 아는 선후배, 함께 술 마시는 사람들, 고기 뷔페 계 모임,

알바하면서 만난 사람들, 도서관 패밀리, 동네 친구들 등등

그 많은 인맥을 왜 '관리'하는지 내 상식으론 이해가 안 가지만

B는 아주 열심히 관리한다.

B는 최소한 두 달에 한 번은 만나야 관계가 유지된다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 리스트를 따로 메모해 두곤 한다.

B는 초등학교 때 게임하면서 친해진 남자 아이와

아직까지 연락을 하고 지낸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쓸모없고 쓸데없는 인간관계는 무조건 청산하자는 식이다.

특히 남자는 더욱 그렇다.

나는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자주 보는 편인데 그때마다 몇 명씩 지운다.

그럴 때마다 나의 인간관계가 알뜰하고 실속 있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을 지움으로 하여 남아 있는 사람들과

더 돈독해지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B와 나는 정말 반대다.

그런 B와 어떻게 베스트(best)가 될 수 잇었는지 의문이지만

어쩌면 당연한 이치인 것 같기도 하다.

극과 극은 원래 통하는 법이니까.

(여자들 사이에선 베스트 서열이 중요하다.

남자들은 다 똑같은 친구라고 생각하여 순위를 매기지 않지만

여자들의 세계는 터무니없이 까다롭다.)

 

p.56

아버지는 4대 보험에 들 필요도 없다.

연말정산 같은 건 더더욱 필요 없다.

명절 때 선물이나 보너스가 나오지도 않는다.

일용 근로 소득자에겐 전표가 찍히지 않는다.

그 사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보통 아버지들과 다르다.

아버지는 혼자서만 반짝인다.

원래 슬픈 것들은 혼자서만 반짝거리는 법이다.

 

p.102

사랑이란 상품은 돌고 돌아야 하는데 늘 구매하는 사람만 구매한다.

나는 사랑을 쟁취하는 자들에게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R의 미니 홈피에 가면 남자 친구가 이벤트를 해 준 사진이 올라와 있다.

화살표를 땅에 붙여서 길을 인도하고 마지막에 도착한 목적지엔

하트 모양으로 세워 놓은 양초들에 불빛이 반짝인다.

그리고 촛불 가운데엔 남자 친구가 장미꽃 다발을 들고 서 있다.

사진은 분명 보라고 있는 것이다.

숨기고 싶은 것들은 올리지 않는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귀어도 그런 이벤트를 해 줄 것이다.

자기만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R 역시 다른 남자를 만나도 그런 이벤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R은 그런 이벤트를 늘 받아 왔으므로

다른 남자를 선택할 때도 그런 이벤트를 해 줄 만한 남자를

골라서 사귈 것이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그렇다.

엇갈리는 사람은 엇갈리기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만 하고,

아픈 사람은 아프기만 한다.

재화만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배급받지 못한 나는 내 사랑을 앗아 간 것처럼

사랑하고 있는 자들을 시기한다.

나도 한때는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안 하는 것만 못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그토록 쏟아 부었던 에너지는 지금쯤 어디로 갔을까.

아직도 지구 어디에선가 내 사랑은 무중력 상태로 떠 있으리라.

 

p.122

나는 어렸을 적에 좀체 울지 않는 아이였다.

그래서 지금도 잘 우는 아이를 보면 못마땅하다.

다쳐서 무릎이 깨져도, 놀다가 화상을 입어도,

칼에 손가락이 잘려 나갈 뻔하여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도

나는 눈물 한 방을 흘리지 않았다.

아픔을 견디는 일은 너무나 쉬웠다.

침착하게 명상에 잠기듯이 아주 천천히 걷거나 딴 생각을 하면 되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쳤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처는 늘 늦게 발견되었고 회복 속도도 언제나 느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p.129

나는 버스 안에서 허기진 배를 잊기 위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을수록 모든 게 확실해졌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내게만 그런 사람이었다.

내게만 이기적이고 무심한 사람이었다.

왜냐면, 나이기 때문에.

내겐 그런 게 어울렸다.

메마르고 가시가 돋아난 황무지 같은 벌판.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푸석한 곳엔 벌레들도 오래 살지 못한다.

그런 곳에 누가 자리 잡고 싶어 할까.

그런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받을 사람. 사랑받지 못할 사람.

 

p.136

B는 복수심 때문에 원나이트를 시작했다.

사랑했던 남자에게 받은 바이러스는 괜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나는 B와 첫 원나이트를 한 남자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도 남자다.

남자에게 옮은 성병은 남자에게 옮겨도 상관없다.

내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그도 언젠가 눈물 나게 되어 있어.

비록 그게 나를 떠올리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울게 돼 있어!!!

왜냐면 내가 이렇게 우니까.

B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한 잠언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B가 릴케의 잠언을 알 리가 없다.

지금 이 캄캄한 밤 어디에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너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릴케도 누군가를 울려본 적이 있을까.

릴케도 B 같은 사랑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슬픔도 성병처럼 전염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매독보다 더 끔찍하게 퍼지는 슬픔.

 

p.244

가짜가 진짜일까.

진짜가 가짜일까.

진실이 거짓말을 하는 세상이다.

세상이 만든 진실이 미워지면 너만의 가짜를 만들어라.

네가 원하는 그 상상이 진짜다.

네 진심이 깃든 상상으로 이 세상에 복수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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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까진(?) 20대의 툭 까놓고 하는 이야기

난 잘 모르겠지만(?) 분명 많은 젊은이들이 공감할 거다

 

처음에는 문장이 단문인데다

이야기마다마다 각각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뚝뚝 끊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의 가게와 자신의 출생,

과거 실연이 준 상처, 문자 메시지, 친구들의 사연 등

그러나 끝까지 읽었을 때

가짜와 진짜라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이야기 하나 하나가 얼마나 개연성이 있게 전개가 되었는지

새삼 감탄하게 된다

굉장히 짜임새 있는 구성이었어~!

 

고예나 작가의 작품은 둘 다 쉽고 재미있었는데

<우리 제발 헤어질래>가 좀 더 가볍고 경쾌하고 사건 위주의 서술이라면

<마이 짝퉁 라이프>는 주인공 진이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느껴져

살짝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