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 <너를 사랑한다는 건>

 

p.10

스스로 자신을 모욕하는 것의 매력은

칼을 얼마나 깊이 찔러야 하는지 알고,

외과 의사처럼 정확하게 가장 예민한 신경은 피해가는 데 있다.

그것은 자신을 간질이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혀 해로울 것이 없는 장난이다.

엘튼 존은 가수와 눈이 촉촉한 시인들의 진부한 전통에 따라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예술이

자신의 열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탄식하는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불렀다<'당신의 노래 Your Song', 1969년>.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잠시라도 자신의 재능을 의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비하하는 것은 언뜻 겸손해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오만한 믿음, 즉 사실 자기가

보석 같은 노래를 썼다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있다.

스스로 자행하는 이런 모욕에 관해 존슨 박사가 말했듯이,

이것은 유쾌한 장난이다.

그런 장난을 하는 남자는<이런 경구들은 적어도 20세기 중반까지는

여자들이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이 얼마나 여유가 있는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적 자신감이 조금도 없다는 내용을 곡조에 담아 노래로 부르려면

얼마나 큰 음악적 자신감이 필요할까?

여유 있는 태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자기중심적인 야비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존슨 박사가 말하는 자기 비하는 자전거를 타는 아이가

"보세요, 엄마, 나 손 놓고 타요" 하고

자신만만하게 구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탄다는 것은

자존심이라는 손잡이를 단단히 잡을 필요에서

일시적으로 놓여날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편없는 가수야" 또는

"아, 나는 정말 버릇없는 놈이야" 하고 즐겁게 소리치며

자전거의 타성에 몸을 맡기고 언덕을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에는 귀엽기만 하던 비하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그 비하엔 날카로운 발톱이 돋는다.

 

p.20

"적절하고 충실한 이야기에 담아낼 가치가 없는 삶이란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 자신과 똑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이 아주 많으며,

그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실수와 실패,

회피와 임기응변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태란 장식과 위장을 떼어놓고 생각하면

매우 균일하여, 인류에게 공통된 것을 제외할 경우

좋든 나쁘든 다른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p.84

그녀는 강한 남자를 숭배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황소를 타고 마을을 통과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순한 상표 가운데 하나를 골라 결혼했다

<크리스토퍼는 유원지에서 조랑말을 타는 것도

상상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이런 어긋남을 두고 자신을 탓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이 다른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매일 응징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는 그녀가 대학 시절에 만났던

화가 자크가 아니라는 이유로.

킹스턴의 작은 집은 그녀에게 익숙한 생활과는

한참 거리가 먼 방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로저스 부인은 다른 사람들의 부를

냉소하는 취미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질투로 받아들여졌다.

 

p.86

"어머니는 늘 내 옷에 대해 판정을 내려.

내 옷을 두고 정교하고, 아주 시적인 비유를 찾아내.

예를 들어 이런 식이야.

'그걸 입으니 꼭 은하계 사이를 여행하는 우주선의 여승무원 같다, 얘.'

아니면, '<초원의 집>에 나오는 멋진 가족의 딸아이가 입어도

안 어울린다는 말은 못할 것 같은 드레스인데.'"

 

p.89

이사벨은 오래전에 일어난 일을 전해주고 있지만,

이야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사벨은 음식이 입에 가득 들어 있지 않을 때도

이야기를 잠깐 멈추곤 했다.

아직 빈번한 이야기로 단련되지 않은

민감한 재료에 이르면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이사벨은 꿈을 꾸는 상태로 접어들어,

무지한 외부자에게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을 전하기보다는

그녀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느꼈는지 자문해보는,

개념적으로 역설적인 과정에 빠져들었다.

 

p.93

루시는 이사벨이 "전형적인 샌드위치 문제"라고 부르는 것에

시달리고 있었다.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 낀 둘째인 것이다.

이것은 형제들에 비해 루시에게

신경증적 증후가 많다는 것을 설명하는 한 방법이었다.

이사벨은 이 점에 죄책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루시가 샌드위치의 가운데 들어가 무시를 당하고 있다면,

그 샌드위치의 위쪽 반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으로 대화가 전개되는 것이 두려워

누가 보아도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낮은 수준으로

화제를 축소시키는 습관이 있었다.

총리의 정치력에 관해 토론을 하면

그가 머리를 어떻게 빗는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최근의 소설이 화제가 되면

표지 색깔이 저자의 눈과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p.172

수동성의 환상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앤드루 오설리번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난파나 비행기 사고를 당할 때의 이상적인 동반자로,

막대기 두 개로 불을 피우고, 바닥깔개와 대나무로 천막을 세우고,

라이터로 구조대의 눈길을 끄는 법을 알았다.

재난이 아닌 상황에서 이런 능력은

보험 청구서, 집안 배선, 이사벨의 벽걸이 전화기에 딸려 온

성가신 나사 두 개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p.178

이사벨이 앤드루에게 솔직해지지 못했던 것은

혼자 남게 되는 것에 대한 수치스러운 공포 때문이었다.

이 공포 때문에 그녀는 그의 사랑스러운 면들에 매달리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앤드루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는 했지만 전기를 다 읽고 나서

"흠, 마운트배튼은 내가 상상하던 영웅이 아니었네"하고

치워버리는 산뜻한 태도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이사벨은 그를 대신할 사람이 있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자신의 마운트배튼을 포기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가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p.197

공감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 행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은

비뚤어진 시각 때문에 대체로 왜곡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운이 좋고 민첩하면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특권을 누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적어도 잠시라도

우리의 상대성을 넘어설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p.209

이사벨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분도 달랐다.

만일 그녀가 전기를 쓴다면

사람들 손바닥의 수분 함량 묘사가 많이 나올 텐데,

그것은 내가 전혀 주목하지 않는 부분이다.

그녀는 옛날 교장 선생님이 손바닥에 땀이 많이 나는 사람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늘 손바닥이 튼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폴은 여름에 손바닥을 자주 비볐으며,

세인트아이브스 출신의 한 고객은

유머 감각이 그의 손만큼이나 거칠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p.217

어른이 십대를 대하는 잔인한 방식,

자신은 그때와 근본적으로 결별했다는 느낌 때문에 가능한 잔인성을 보면,

하나의 몸을 계속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속기 쉽지만,

사실 한 사람 안에는

여러 사람이 줄을 서서 바글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가는 것은

계주에서 배턴을 넘겨주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똑같은 팀의 구성원들이지만 주로의 서로 다른 구간을 달리는 것이다.

이 비유는 차이와 연속성 양쪽을 다 보여준다.

선수 교체는 변화를 상징하며,

배턴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연속성을 상징한다.

 

p.233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이런 고민을 표현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직접 경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서 느낄 만한 것을 생각하여

그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리 형제가 고문을 받고 있다 해도, 우리 자신이 편안하다면

우리는 그가 겪는 고통을 절대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상상에 의해서만

그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상상에 의해 우리 자신을 그의 상황에 집어넣고

우리 자신의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상상으로 남들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의 미덕에도 불구하고,

베개 이론의 우울한 전제는 남들의 경험을 진정으로 상상하려면

충분한 경험이 축적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적된 경험만으로는 절대

우리 자신을 넘어선 곳에서 만나는 감정들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전제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내가 전에 한 번도 고문을 당해보지 않았다면 어쩔 것인가?

그런 경험도 없으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괴로운 운명에 처한 형제를 어떻게 동정한단 말인가?

지난번에 혼잡한 지하철을 탔을 때를 상상하며,

그 경험을 백 배 확대해볼까?

거기에 이를 뽑던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종기를 째던 경험의 기억을 섞으면 될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경험을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p.301

어떤 사람의 행동이 중요할수록

그 사람의 하찮은 것들도 흥미를 자아낸다.

내가 하수구를 청소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내가 몇 시에 자든 아무도 코딱지만큼도 관심을 안 갖겠지만,

<위대한 유산>을 쓰고 11시에 자는 것을 좋아하면

모두가 관심을 가질 것이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하수구를 청소하면서 동시에 아내도 죽인다면,

틀림없이 내 얼굴이 신문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반면 하수구를 청소하는 동시에 일요일 아침마다 차에 광택을 내면

사람들은 분명 잊을 것이다. 이 결합에는 필수적인 조건인

지위와 행동 사이의 불일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p.330

"나도 왜 내가 머리를 올리지 않는지 모르겠어.

어쩌면 올려야 할지도 몰라.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안 그래. 나도 이유를 몰라.

그건 내가 왜 치즈를 정육면체로 자르는지,

내 우편번호의 끝자리가 무엇인지, 나무 빗을 어디서 샀는지,

직장까지 거리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내 자명종에 어떤 배터리가 들어가는지,

왜 나는 화장실에서 뭘 못 읽는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야.

나한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나한테는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너한테도 납득이 안 될 괴상한 것들이 가득해.

나도 독서를 더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TV 보는 게 더 편해.

나한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툴툴거리를 사람들이 한번 달려들어보고 싶다는 의욕을 더 자극해.

나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싶지만, 그럴 만큼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

행복해지고 싶지만, 행복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싶지만, 차가 더 편해.

아기를 낳고 싶지만, 어머니가 되는 게 무서워.

내 인생에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8시 15분이 지났기 때문에 이러다 지하철을 놓치는 게 아닌가

안달하고 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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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인 줄 알고 샀는데 다 읽고 보니

2005년에 나온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이

제목만 바뀌어서 나온 것이다

아놔 뭐 이런 경우가 =.,= 나 그 책 있는데

표지가 바뀌는 건 봤어도 제목을 이런 식으로 바꿔 팔다니 낚였다!

근데 뭐, 그 책은 아직 안 읽어서 새 책 읽는 기분으로 읽긴 했다

결국 원제 <Kiss and Tell>-유명인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언론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

이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과 <너를 사랑한다는 건>

이 두가지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둘 다 번역이 좀 황당하긴 한데 그래도 키스가 들어가는 게 좀 나은 듯 ^^;;

본문의 번역은 최근에 나온 은행나무 거

<너를 사랑한다는 건>이 매끄럽고 자연스럽긴 하다

이로써 나는 내가 좋아하는 보통씨의

'사랑과 인간관계 3부작' 소설을 모두 소장한 셈이다

심지어 <Kiss and Tell>은 두 권

그리고 다른 것도 있다 <불안>

읭? 난데없이 책 자랑 ㅋㅋ

(이것도 예전에 <불안의 책>이란 이름으로 나온 적이 있군

낚이지 않게 조심하자 하하)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어렵게 말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은 알랭 드 보통이 독보적인 것 같다

사랑학 종결자라고나 할까~? ㅋㅋ

그리고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의 모든 글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단 사실!

갑자기 동질감 느낀다

나도 내가 경험하지 않은 건 잘 못 쓰는데...

 

그러므로 실제 보통씨의 아바타인 소설 속 주인공은

여자친구에게 "공감 능력의 부족"이란 이유로 차인 후

사람에게 공감하기 위하여, 공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해해야 하므로

한 여자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유명인을 주인공으로 할 경우, 위인전이 될 수 있으므로

평범하고 일반적인 여성을 대상으로

실제로 전기와 유사한 형태로 서술하는데

어린 시절, 저자와의 친밀도, 가계도, 냉장고 속,

기억, 은밀한 부분과 심리테스트까지 다방면에 걸쳐

섬세하고 치밀하게 그녀를 쓴다

 

소설을 읽다보면 영화 <소셜네트워크>의 첫장면이 떠오른다

거기에서도 똑똑한 건 알겠는데 자꾸 따지고 들어서

차인 남자 '마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여자 주인공 이사벨이 여행을 앞두고 비행기 공포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자는 전혀 그 기분을 알아주지 않고

비행기의 안전성과 비행기의 행로를 예로 들어가며 

그녀의 걱정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걸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실로 짜증나는 타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전기의 완성과는 별개로 그는 그녀를 전부 파악하는데 실패한다

사실 전기 작가라고 하여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나도 나 자신을 모르는데 누가 누굴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공감'은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게 어느 정도 일리는 있으나

완벽한 이해와 완벽한 공감은 태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보통씨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인데

별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별 거 아닌 걸 어렵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너무 똑똑해서 책을 읽는 잠깐 사이에

뭔 소리하는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에

한글자 한글자 정신줄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다 읽고 나면 까칠하고 집요하다 할지라도

날카롭고 냉정한 그와 사랑에 빠지고 말 것이다

백영옥 <아주 보통의 연애>

 

p.12

최차장은 알코올중독자다.

마감 때면 편집팀 야식비 명목으로 지출하는

맥주와 와인의 양이 도를 넘고 있다.

최차장은 최근 특집기사로 '알코올중독 클리닉 체험기'를 쓴 적도 있다.

사적인 고민을 기사화할 만큼 그는 마음이 여리다.

영수증은 최차장이 결국 '최부장'이 될 수 없었던 이유도 말해준다.

인사과에서 그의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전부 체크하고 있는 것이다.

공이사는 불륜에 빠졌다.

공이사의 영수증엔 모텔 상호가 찍혀 있었다.

양수리 '꿈의 궁전'. 그 시작은 이미 오래전일 것이다.

법인카드 내역서에 개인 영수증이 섞이는 실수를 한 걸 보면

방심한 게 틀림없다.

더 놀라운 건 공이사가 지금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는 패션지 <B>의 유차장.

이들의 영수증엔 같은 장소가 유달리 많다.

유차장과 공이사의 영수증에 번갈아 찍힌

'BAR701'의 회식비를 정산하다가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이들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이곳에 갔고,

BAR701이 문을 닫는 새벽 두시에 술값을 계산했다.

BAR701은 편집팀의 회식 장소가 아니라 이들의 밀회 장소였던 것이다.

<모드>의 패션팀 수석 이정우는 중독자다.

일중독, 알코올중독, 커피중독에 심각한 활자중독 증세도 있다.

그에겐 '적당히'란 존재하지 않는다.

늘 야근을 하고, 터무니없이 많이 읽고, 지나치게 마신다.

하루 다섯 잔의 에스프레소, 다섯 캔의 맥주가

마감 때면 어김없이 두 배로 늘어나는데,

특이하게도 그는 물건을 짝수로 사지 않는다.

일곱 권의 책, 열세 캔의 맥주, 스물한 개의 로즈마리 화분.

모두 홀수다. 둘로 나눠지는 건 불길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이정우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와 관련된 숫자 기록들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p.17

엄마는 바빴다. 분유값을 벌어야 했고 집세를 내야 했다.

나와 놀아준 기억도 없다.

대신 직장 근처 맥도널드에서 늘 종이봉투가 터지도록

빅맥과 밀크셰이크를 사왔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서 나중엔

터진 종이봉투까지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부족해서였는지 모르겠다.

엄마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단지 하루 종일 빅맥을 먹을 수 있다면

홍금보 같은 뚱보가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내게 맥도널드는 타도해야 할 미국문화의 쓰레기가 아니었다.

다정한 고향의 맛, 맥도널드가 없었다면 헤쳐나가기 힘들었을

외로운 여섯 살 인생이었다.

그 인생 속엔 달콤한 밀크셰이크와 케첩이 흐르는 빅맥,

고소한 프렌치프라이가 늘 함께했다.

소아비만이라는 당연한 옵션까지.

나는 뚱뚱하고 굶주린 맥도널드 소녀였다.

 

p.20

부양해야 할 자식을 낳은 게 아니라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친구를 얻었다고 착각하는 젊은 여자의

아이들은 종종 유년기를 박탈당한다.

그 아이들은 시간을 건너뛰어 조로하게 된다.

나이에 따라 생기는 단계적인 성장통 대신

시간이 축적되어 생긴 체념이라는 노인성 근육을 주렁주렁 매단 채,

정지된 세상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나는 영악한 열두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

보고 싶지 않은 진실을 봐버린 열두 살 '노인'에 가까웠다.

 

- 아주 보통의 연애('아무도 모른다')

 

p.51

윤비서는 한층 진화된 그,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는 시간의 빈틈을 언제나 완벽한 모양으로 재단해

'회의'와 '미팅'으로 채워넣었고, '골프회동'과 '휴식'이라는 말 속에

그의 은밀한 사생활을 이중박음질로 단단히 숨겼다.

그녀의 말 속엔 거짓말탐지기 따위로는 잡히지 않을

훈련된 신중함이 있었다.

그녀는 '예, 아니고'란 말로 자신의 감정을 백 퍼센트 표현할 수 있는,

그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토록 근사한 입술을 가진 여자가

비밀을 지킬 줄 아는 극소수 수컷의 우성인자를 가졌으니,

이 또한 얼마나 매혹적인 일인가.

 

- 육백만원의 사나이

 

p.92

사실 디자인은 내 전문 분야이기도 했다.

종이라면 늘 친구 같은 기분이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고, 매번 종이로 뭔가를 만들었다.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이트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 청첩장 살인사건

 

p.121

똥 말이다. 너무 안 나온다. 육십 년 동안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이상했던 건 그날 아빠의 목소리가

컴퓨터 음성변조 목소리와 흡사했다는 것이다.

어딘가 이 세상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은 게 영 뒤끝 찜찜한 목소리 말이다.

병원 가봐. 만성변비가 치질 되고, 대장암 된다잖아.

알아. 그래서......

그러니까 가보라고.

글쎄다, 그래야겠지.

아빠의 말투는 늘 이런 식이었다.

뭘 하겠다는 완결형이 아니라 뭐하겠지, 라는 두루뭉수리한 가정형.

나는 그게 늘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아빠는 계속 배가 부글거리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매일 고기만 먹으니까 그런 거잖아. 갈비 좀 그만 먹어!

도대체 아빠 인생에 대책이란 게 있었나, 라고 묻는다면

아빠도 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대책 없기론 그의 자식들(중 하나인 나)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음식은 버리는 게 아니야. 우리 땐 그러지 않았다.

나 없이 우리만 존재하는 김호봉식 말투. 저것도 지겨웠다.

야채 먹어, 야채! 그것도 싫으면 하루야채인지 뭔지,

그런 것도 나왔잖아.

그래야겠지. 근데 습관이 잘 안 돼서.

바꿔, 습관!

요즘은 가슴도 아프다.

형, 변비면 똥구멍이 아파야 되는 거 아냐?

느닷없이 탁구공을 굴리던 삼촌이 끼어들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뭐?

내가 아빠를 보며 다시 물었다.

크게 얘기해봐, 못 들었잖아.

근데 이것이 우리 식구가 들은 아빠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p.137

우물 밑바닥에 있으면 올라갈 일만 남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튼튼한 두레박이 내려오길 기다리거나, 스프링 달린 신발이라도 신고 점프해서 올라가길 꿈꾼다.

그러나 첫 직장이 삼류라면 마지막 직장도 삼류일 가능성이 높다.

기가 막힌 수미일관이다.

일간지 기자가 삼류 잡지기자가 될 가능성은 있어도,

삼류 잡지기자가 일간지 기자가 될 가능성 따윈 없다.

일간지의 인턴기자에서 주간지, 여성지, 무가지, 삼류 포르노 잡지까지 차곡차곡 내려온 내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이젠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나는 그냥 나였는데 말이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나인 채로 살았기 때문인지도.

아니, 그냥 노무현 때문이었다고 말해야겠다.

벼랑 끝까지 몰리게 되면, 누구 하나 기댈 사람이 아쉬운 법이니까.

 

p.139

원래 상사들이란 아랫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럼 아버지들은?

원수인 줄 알고 막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데 이렇게 멘트하는 인간들이다.

내가 니 애비다!

 

- 가족 드라마('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p.171

H가 말했었다.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가 사랑하는 건 자신이 아닌, 책이었다고 말이다.

넌 활자 속에서만 날 독점하려고 했잖아.

예의 편집자 같은 말투로 쾨테나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하면서

아니라고 부인하겠지.

하지만 네가 내 원고를 고칠 때마다, 상기된 얼굴로

내 삶에 박힌 못들을 전부 뜯어내려고 했단 걸 난 알아.

넌 그냥 형용사야. 독립된 명사가 될 수 없지.

당연히 동사도 될 수 없어.

넌 섹스나 키스도 책으로 배워야 하는 사람이니까.

살아서 뜨거운 피가 도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애정이 있긴 한 거야?

사랑과 질투를 구별하는 건, 편집자로서 중요한 자질이야.

넌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질투하는 거야.

네가 쓰지 못한 내 책을 질투하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작가가 편집자에게 할 수 있는 충고인지는 몰라도,

남편이 아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문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건 내가 아니라 그였다.

소설 속에서 그가 후배임이 분명한 누군가의 진짜 이름을 울부짖을 때,

나는 사체의 내장을 늘어놓는 검시관처럼

그의 글에서 보이는 비문과 오자를 뽑아 전부 열거하고 싶었다.

어른들이 하는 사랑은, 죽을 듯 힘든 새벽을 맞이하고도

아침 일곱시에 일어나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그 아이의 가방을 싸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뜨거운 사람인지, 어디까지 뜨거워질 수 있는지 알았더라면,

내게 차갑단 말은, 더구나 너는 스스로 존재하는 명사가 아니라

누군가를 치장해주는 형용사일 뿐이란 말 따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 보여주지 못한 건 내 잘못이며

전부 보길 원치 않은 건 그의 잘못이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의 실패일 것이다.

아무리 그릇의 짝을 맞추고 황실 장미가 새겨진 커피 잔을

계절마다 사들여 유리 장식장 안에 넣어놓는다 해도,

우리는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의 황실 귀족들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 강묘희 미용실

 

p.218

미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리본 달린 커다란 박스에 포장되어

어느 날 내 책상 앞에 배달되었다.

파란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

잘 닦인 빨간색 베리제인 에나멜 구두를 신은 어른 앨리스의 모습으로.

나는 언제나 그녀가 나와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이

실수로 잘못 배송한 선물이라고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가령 우디 앨런의 영화 속에서 대사로만 존재하는

정신과 의사 같은 부류로, 지나치게 지적이고 복잡한데다

여자와는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유일한 취미가 마스터베이션일 것 같은 사람 말이다.

나로 말하면, 사탕을 좋아하는 건치 연예인 같은 부류의 여자가 딱 좋다.

충치 하나 없이 웃으면 여남은 개의 이빨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어서,

어김없이 입을 벌려 세어보고 싶게 만드는 여자들이 있다.

그런 여자들은 대부분 크게 웃고, 크게 울며, 자기 감정 표현이 확실하다.

섹스 후에, 싫거나 좋거나 상관없이 '오빠 좋았어!' 정도는

날려줄 줄 아는 센스. 영화를 보여주면 커피 정도는 사는 옵션!

애매모호란 말은 어쩐지 프랑스 말처럼 느껴져 질색이다.

프랑스 영화처럼 내용 파악 안 되고, 복잡한 여자? 정말 싫다.

그러니까 미라와 내가 진짜 연애를 하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미라 같은 상상력 과잉의, 정신상태 복잡한 여자와 말이다.

그러나 미라는...... 어쩔 수 없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다.

왜냐구? 예쁘기 때문이다.

얼굴은 작고, 가슴은 크고, 발목은 가늘고, 엉덩이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예쁜 애들은 자기가 얼마나 이상한지 잘 알지 못한다.

투명한 유리 공예품처럼 얼마나 잘 깨지는지도.

 

p.225

돼지고기로 섹스토이를 만드는 법,

마스터베이션 시리즈 같은 농담들, 다정한 몸짓에도 불구하고

지난 사 개월 동안 미라는 나와의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달뜬 고등학생들처럼 키스나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어째서 이토록 왕성한 식욕은 발랄한 성욕으로 이어지지 않는단 말인가!

 

- 미라

 

p.242

이상한 날이었다.

지하철이 연착되었고 사람들이 먼저 타겠다고 드잡이하는 동안

셔츠의 단추가 세 개나 뜯어졌다.

팀장과 마주치기 싫어 돌아간 삼층 화장실 복도 앞에선

장모가 사줬다는 그의 번쩍이는 페라가모 구두를 밟았다.

책들의 ISBN 기호를 입력하는 동안 컴퓨터가 열세 번 다운되었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복사기의 카트리지가 다 말라버렸다.

관리실에 가서 새 토너를 달라고 했을 때, 총무가

이세상 토너는 네가 다 쓰는 것 아니냐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날 아홉시 뉴스에 지하철 연착 사고 같은 건 방송되지 않았다.

각각 아파트 십구층과 이십사층에서 두 여자가 투신자살한 사건이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었다.

채널을 돌리려고 하다가 리모컨이 고장났다는 걸 알았다.

겨우 드라이버를 찾아 리모컨을 반쯤 분해했을 때,

배터리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버튼을 있는 대로 누르고 손바닥으로 마구 친 탓에

이미 볼륨 버튼 하나가 떨어져나간 후였다.

 

p.257

샨티는 늘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한 흔적들을 남김없이 없애곤 했다.

땀, 눈물, 침, 짧게 고불거리는 체모와

바닥이나 내 무릎 뒤 부주의하게 말라버린 정액까지.

샨티는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지 않은 것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샨티는 점점 주인이 먹고 내뱉는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는

관상용 식물처럼 변해갔다.

그가 직접 먹이를 넣어주기 전엔 아무것도 먹으려들지 않았다.

샨티가 몸을 움직여 먹이를 먹는 유일한 순간은

우리가 서로의 몸을 섞고 긴 시간 사랑했을 때뿐이었다.

계절을 넘기기 위해 한 움큼씩 털이 빠질 때마다

샨티의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나는 샨티가 끔찍했다.

샨티가 생존을 위해 스스로 몸을 움직여 먹는 유일한 음식이

그의 몸에서 나온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샨티를 갖다버리기 위해 몇 번이고 집 근처를 배회했었다.

소독저처럼 마른 그 몸을 부러뜨리는 꿈을 꿀 때마다,

나는 그의 몸을 파고들며 매 맞은 어린아이같이 울었다.

 

- 고양이 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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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뿐만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좋아하는 백영옥 작가의 단편집

두말 할 것도 없이 나오자마자 사서 봤다

<스타일>과 <다이어트의 여왕> 등 장편 외에

그녀의 단편은 어떤 개성과 색깔을 가지고 있을까 기대감이 컸는데

나쁘진 않았지만 장편이 더 좋았다는 결론이다

 

문학동네 등단작을 비롯한 여덟 편의 단편은 모두 '캐릭터쇼'다

그녀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인물의 독특한 취미나 습관, 버릇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비교불가의 트렌디한 묘사가 시선을 끈다

(영수증 모으는 여자, '가족 드라마'의 가족 모두,

'미라'의 미라 이 미친 년도... 하나같이 특이하다)

하지만 그뿐

정확한 것 같으면서도 모호하며

(예를 들면, '육백만원의 사나이'에서

주인공이 알거지가 된 상황이 구체적인 듯 하면서

정확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서술되지 않았다

난 명확한 걸 좋아하는데)

읭? 하는 사이 끝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난 또 그녀의 작품이 나오면 또 제일 먼저 사서 보겠지~?

다음 작품은 장편이었으면 좋겠다 ^^

박완서 <친절한 복희씨>

 

p.47

후배가 미리 답사까지 해보고 정했다는 음식점은 해물탕집이었다.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기본적인 몇 가지 해물에다 각종 야채와 양념을

기호에 따라 집어넣어가면서 손수 끓여 먹을 수 있는 잡탕은

시원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었다. 값도 적당했다.

값싸고 맛있고 풍성하기까지 하니 최고의 식사였다.

통유리로 된 창가 자리여서

노천 카페 같은 기분이 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요샌 뭐든지,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돈 버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여봐란 듯이 하는 세상이니까.

 

p.65

한번 뒤집혔던 세상이 원상으로 복귀해서

미처 숨 돌릴 새 없이 다시 뒤집혔다가 또 한 번 뒤집히는

엎치락뒤치락 틈바구니에서 우리 집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고

그 남자네 집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라는 큰 몸뚱이가 그런 자반 뒤집기를 하는데

성하게 남아날 수 있는 백성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여 우리는 서로 조금도 동정 같은 거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고통은 김치하고 밥처럼 평균치의 밥상이었으니까.

만약 아무도 죽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고 온전한 가족이 있다면

우리는 그 얌체 꼴을 참을 수 없어

그 집 외동아들이라도 유괴할 것을 모의했을지도 모른다.

 

p.74

그러나 그건 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 그 남자네 집

 

p.150

취직을 해보니 회사라기보다는 공장이었다.

내가 회사라고 알고 있는 데는 강북의 중심가나

강남의 고층 빌딩에 있는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는 사무실이어야 하고,

사장실은 비서실 거쳐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복도나 층계참에 자판기가 있어야 하고,

남자직원은 담배를 피우고,

여직원은 그런 남자들을 흘금거리며 풍평회를 하거나,

누가 리모컨으로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질서 정연한,

아득한 지상의 차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옥상이 딸린 곳이라야 했다.

아는 사람이 그런 회사에 있어서 가본 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연속극에서 보고 익숙해진 웬만한 회사를

나름대로 정형화시켜본 거였다.

골고루 보잘것없는 친척 중에서 그 아저씨는

유일하게 큰돈 번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 정도는 과대망상이 아니었다.

 

p.163

"너 누가 뭐 하냐고 물으면 프리랜서라고 그래.

좀 거만하게 상대방을 약간 깔보는 태도로 그래 보란 말야.

넌 자랑할 건 안 하고, 창피한 건 감출 줄 모르더라."

"내가 뭘 감춰야 하는데? 나 창피한 거 하나도 없어, 언니."

"이런 맹꽁이, 프리랜서가 일용직 노무자하고 사는 게 그럼 자랑이냐?"

"언니가 그 사람을 그렇게 얕보면 어떡해?

그 사람이야말로 민중이야.

언니가 사랑하자고 외쳐 마지않던 민중."

"아유 이 맹꽁이. 그래 나 민중 사랑한다. 내가 민중이 아니니까.

가난뱅이가 가난 좋아하는 거 봤냐.

부자들이나 한때 가난했던 걸 부풀려서 자랑거리로 삼지"

 

- 거저나 마찬가지

 

p.186

고교 동창끼리 부부 동반으로 모이는 모임이 한 달에 한 번씩 있는데

왕년의 지방 명문고라 출세한 친구가 꽤 된다.

나는 서울 사람이 되고 나서 어찌어찌 연락이 닿아서 끼게 된 거니까

자세한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한 번이라도 출세라는 걸 해본 친구만 꾸준히 나오게 되어

그 모임의 명맥이 유지돼왔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마누라들이 남편을 말할 때 장관님, 차관님, 청장님,

시장님, 의원님 하는 식으로

남편이 거쳐온 관직 중 제일 높은 관직으로 부르는 게

그 모임의 관례인 것 같다.

장관 경력은 미쳐 두 달이 안 되고

그 후엔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고

불운을 겪다가 지방대학 교수직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친구도

마누라는 그를 교수님이라 부르지 않고

꼬박꼬박 장관님이라 부르는 모임이니까

교장 선생님 정도는 초라한 호칭이다.

마누라가 그 모임의 흉내를 내서 나를 교장 선생님이라 부르는 거라면

아마 나는 못 하게 했을 것이다.

마누라는 그전부터도 그랬고,

집에서나 밖에서나 그렇게 부르던 걸 못 고치고 있을 뿐이고,

나는 그 과시적인 자리에서 하나도 주눅 들지 않고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마누라가 사랑스럽다.

마누라가 주눅 들지 않고 나 역시 장관님이나 의원님 소리에

닭살이 돋지 않게 되었으니 마누라가 얼마나 고마우냐 말이다.

나는 마누라를 아끼고 사랑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누가 먼저 저승에 가면 거기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세상 뜨고 싶다.

왠지 요새 자꾸 그런 소원이 절실해진다.

 

- 촛불 밝힌 식탁

 

p.257

나는 그가 내 손등에 글리세린을 발라줄 때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준수하면서도 민감한 청년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

남을 배려할 때의 따뜻하고 근심스러운 표정.

나는 그때만 그런 고급스럽고 섬세한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낀 게 아니라 그 후 어디서도 만나보지 못했다.

인간의 얼굴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모르고

그 나이가 되었다는 게, 지지리 못살고 무식한 집에 태어나

고작 버스차장을 목표로 상경한 것보다 더 억울하게 여겨졌다.

그 대학생하고 다시 어째보겠다는 생각은 감히 품어보지 못했다.

임금님에게 잡혀본 손목을 비단 수건으로 싸매고

죽을 때까지 보물처럼 모시었다는 왕조시대의 어떤 기생처럼

그 기억은 내 마음속에 신전이 되어 있었다.

 

- 친절한 복희씨

 

p.271

버스가 정확히 내 앞에 멎었다.

그러나 나 때문에 멎은 건 아니고 내리는 사람이 있어서 멎은 거였다.

중년 부인을 한 사람 내려놓고 문이 닫히려고 했다.

나는 손을 들어 타고 싶다는 시늉을 했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냉큼 올라타고 나서 고맙다는 인사말까지 했다.

그러나 운전기사가 다짜고짜 시비를 걸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버스를 어느 문으로 타는지도 몰라요?"

할머니라니, 아직 칠십도 안 됐고, 다들 오십대로 보고

딸하고 백화점에 가면 매장 아가씨들이 자매간인 줄 아는 나한테

감히 할머니라니, 더군다나 오늘은 있는 대로 멋을 부려

사십대로 보아주길,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나에게

이 무슨 모욕적인 언사인가.

"네? 문을 열어주시길래...... 열린 문으로 타는 거 아닌가요?"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소리는 탁하고 악의적이었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승객은 예닐곱 사람밖에 안 됐다.

아까 내린 손님은 여자였는데 남아 있는 승객들은 다들 남자들이었고

한마을 사람들처럼 서로 인상이나 옷차림이 비슷했다.

도저히 정이 들 것 같지 않게 생긴 시골 사람들이었다.

나는 오락에 굶주린 그들이 장난삼아

나를 갖고 놀려 한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라고 부른 걸 속상해한 것이 방금 전이었건만

이왕 태운 거 늙은이 대접으로라도 눈감아 줄 것이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할머니, 버스는 열린 문으로 타는 게 아니라 앞문으로 타는 거예요.

앞문이요, 앞문. 알아들었어요?"

나 귀먹지 않았다고 대들고 싶은 걸 참았다.

싱글대는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 걸 느끼면서

버스 한가운데서 손잡이를 잡은 채 무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할머니 앉아요, 앉아. 빈자리도 안 보여요?

뾰족구두 신고 비틀대다가 엉덩방아라도 찧으면 어쩌려고."

승객 중의 한 사람이 걱정하는 투가 아니라 놀리는 투로 그렇게 말하자

운전기사가 맞받았다.

"어쩌긴 뭘 어쩌겠어? 나만 덤터기 쓰는 거지, 뭐."

내가 그때까지 앉지 못하고 서 있는 건 앉을 줄 몰라서가 아니라

버스값은 내고 앉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버스값 넣는 통은 앞문과 운전석 사이에 있었다.

뒷문으로 탔기 때문에 달리는 버스 안에서

뾰족구두 신고 거기까지 가기가 난감했다.

정말 벌렁 나자빠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것은 불문가지거니와

저들이 박장대소하면서 즐거워하는 수모를 어찌 견디랴.

나는 마치 악당의 소굴에 볼모로 잡힌 것처럼 잔뜩 졸아서

기사가 하라는 대로 서 있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뒷문으로 탄 게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요금은 다음 정거장에서 버스가 설 때 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앉아서 핸드백에서 잔돈을 찾고 있는데

운전기사가 또 말을 시켰다.

"할머니 버스값 없어요?"

"아마 만 원짜리밖에 없을 거야."

승객 중의 한 사람이 맞받았다.

기사하고 승객들은 마치 한 마을에서 작당해서

어딘가로 심심풀이 삼아 나쁜 일을 저지르러가는 사람들처럼

권태로워 보이면서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런 소리까지 듣고 보니 잔돈을 찾는 손이 벌벌 떨리기까지 했다.

만일 정말 만 원짜리밖에 없다면 나동그라져서 엉치뼈가 나가는 것보다

더 큰 낭패일 것 같았다.

다행히 떨리는 손이 천 원짜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벌벌 떠는 내 손이 확인한 핸드백 속은 온갖 잡동사니로 엉망진창이었다.

운전석 쪽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의 안내방송에 의하면

벌써 여러 번 정거장을 통과한 것 같은데

버스는 정차하지 않고 곧장 달렸다.

내릴 사람도 탈 사람도 없는 정거장은 그냥 지나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달리면 우리 집에서 서울까지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갈 수 있겠다 싶어

좋으면서도 이상하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내가 천 원짜리를 손에 쥐고 비로소 마음이 좀 가라앉아서

차내를 돌아보면서 세어본 승객은

나하고 운전기사까지 포함해서 아홉 사람이었다.

나는 마치 내가 여덟 명의 이상한 사람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외로운 피해자처럼 느꼈고,

그중에 누구라도 내리든지 더 타든지 해야만

이 숨 막힐 듯한 악연의 구도에 균열이 갈 것 같았다.

 

p.276

내 상념은 내 양옆에 앉은 남자와 여자의

휴대전화질 소리 때문에 중단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인석에 앉을걸.

나는 내가 젊어 보인다는 자만심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노인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늘은 전철 안도 한산한 편이어서

노인석에도 일반석에도 빈자리가 넉넉한 편이었지만,

노인석에는 자리가 있고, 일반석에는 자리가 없을 때도

일반석 앞에 가 섰다. 젊은이들 앞에 서서도

행여라도 자리 양보를 얻어내고 싶어 하는

구차스러운 늙은이처럼 보일까 봐 교만하게 턱 쳐들고

아무것도 안 비치는 깜깜한 창밖에다 시선을 고정시키는 게

나의 전철 타는 버릇이었다.

 

- 그래도 해피 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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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를 추모하며 책을 한 권 샀다

워낙 많은 작품집이 있어 고르기가 쉽지 않았는데

정작 읽은 것이 없었다! 우선은 단편부터 시작하자

했는데 사투리나 처음 들어보는 단어 사용이 많았다

아, 역시 대작가님의 소설은 뭔가 다르긴 다르다

다양한 분야의 책으로 지식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완서 작가의 얼굴을 사진으로만 봤을 땐

호감가는 인상으로 마냥 선하기만 할 것 같은 시골 할머니 느낌인데

책을 읽어보면 깐깐하고 세련된 도시 할머니에 가까운 것 같다

그 당시의 정이현같은 느낌이랄까

당시의 엘리트로서 세태에서 한발 앞서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풍족하고 부유한 계층에 대한 관찰력과 표현력이 굉장하다 

 

그리고 가장 닮고 싶은 점은 수다스럽다는 것!

술술 읽히는 문장의 호흡이 으뜸인 데다가 그 내용이 재미있어서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시간 말이다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는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