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있다>
p.15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
(사실 감정을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려면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p.22
우리가 장미꽃에 대해 쓸 때 장미꽃이 되고,
별에 대해 쓸 때는 별이 되어야 한다.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대상과 자아를 합쳐라.
그것과 몸으로 하나가 된 순간 시는 내 안에서 절로 흘러나온다.
필요한 것은 몰입이다.
시는 머리로 쓰는 게 아니다. 시는 몸으로 쓴다.
우리 몸의 숨결, 피의 맥동이 바로 시다.
외부에서 내 안으로 오는 게 아니라
내 몸의 숨결과 피의 맥동 속에 숨어 있던 것이
번쩍 섬광을 발하며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 그게 영감이다.
우리가 쓰는 시는 우리 몸에 각인된 것들이
결국은 내 안에서 숙성되어 흘러나오는 것이다.
p.105
수용소의 대학살에서 늠름하게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는
돌연 1987년에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자살은 살아남음에 대한 수수께끼와 같은 물음을 우리 내면에 던진다.
아우슈비츠 이후 암흑의 세상에 밝혀진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던
그는 왜 그 등불을 꺼뜨렸을까.
절망과 불행보다는 안락과 허무가 더 많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
p.112
스물은 빨리 지나가고 서른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몇 번의 풋사랑과 이별, 그리고 어물어물 하다 보면
'부러진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오듯' (김소연) 서른은 온다.
아무것도 준비 없이 맞은 서른은 힘들다.
절망하기에는 이르고
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늦어 버린 나이가 서른이니까.
세상이 녹록지 않다는 것도 이미 알고,
세상이 내 인생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 버렸다.
그런 서른 살에 치욕과 사랑은 함께 온다.
이제 겨우 서른일 뿐인데, 인생을 다 살아 버린 듯
어느 날 갑자기 삶이 헐겁게 느껴진다.
p.116
누구도 젊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일이 어색해지는 나이, 그게 삼십 세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지 않았다면 다시 일어서서 걸어야 하리.
당신은 삼십 세인가?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일어서서 걸어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
p.129
사람은 나이를 많이 먹어 늙는 게 아니라
꿈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
내겐 꿈이 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젊은 것이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도종환 <담쟁이>).
담쟁이는 벽을 만나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말없이 타고 올라간다.
청춘의 심볼이 언제나 푸른색인 것은 포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걸 읽고 세상 모두가 나를 비난할 때조차
머리를 똑바로 쳐들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청춘이다.
p.155
지오 폰티에 따르자면 '분수는 하나의 목소리'고,
'계단은 소용돌이'며,
'발코니는 한 척의 범선'이고,
'문은 한 장의 초대장'이다.
p.169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읹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김경온 옮김, 두레, 1995
p.177
예술가란 빈둥거리다가 벼락같은 영감이 올 때만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날마다 인내와 열광의 불가사의한 피륙을
일의 나날 속에서 빈틈없이 짜'는 사람이 예술가다.
그가 날마다 짜는 불가사의한 피륙이란 그의 창조적 운명을 가리킨다.
참다운 예술가란 날마다 제 시간과 노고를 바쳐 일하는 예술가다.
일의 운명을 쉬지 않고 직조함으로써
마침내 예술가란 운명의 카펫을 완성하는 것이다.
일의 운명을 타고난 예술가가 지피는 아궁이에서
불(상상력, 기억, 시)이 꺼지는 일이란 결코 없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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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200권 이상을 읽은 기분이다
다독가(그의 서재는 도서관에 버금간다)인 시인 장석주가
손수 양서를 선택하여 명문을 되짚어주니 얼마나 용이한지!
평소 시의 함축적 의미를 이해 못하는 탓에 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좋은 시와 시인의 삶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소설가도 가난하지만 시인의 삶 또한 얼마나 척박하며 외로운지
아프고 불우하며 요절한 시인들의 삶을 읽는 부분에선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향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내 불이 되어버린 그대들이여, 오 아름다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