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 <마돈나>
p.26
하루히코 연배는 그런 화제도 있을 만한 나이다.
모두가 주택대출금을 안고 있고, 아이들 교육에 골치를 썩으며,
부모 모실 준비를 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
허세부릴 여지가 없다.
p.30
정기 인사이동이 있은 지 보름이 지나고
새로운 환경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을 시기였다.
도모미의 인상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늘 차분하게 일하고 있다.
언성을 높이는 일도,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 하루히코의 몽상이 그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부풀기만 했다. 특히 혼자 있는 출퇴근 시간에는
멋대로 도모미와의 스토리를 만들어 즐기고 있었다.
둘이서 출장을 가게 되고, 호텔에서 허물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술이 들어가서 취한 도모미는 요염한 눈으로
하루히코에게 안기듯 기댄다......
40대 남자에 어울리지 않게 머릿속은 온통 할리퀸 로맨스 세계였다.
정사 같은 구체적인 상상은 참았다.
거기까지 하면 아침에 도모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p.43
하루히코는 자기가 도모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주위에서 눈치 챌까 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런 것이 사내에 알려진다면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
관심 없는 척했다.
도모미를 포함해 부하들이 한잔하러 갈 때도 따라가고 싶은 것을 참고,
"2만 엔 미만이면 경비로 처리해줄게"라고 여유 있는 포즈로 보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욕조에 몸을 담그고 혼자 끙끙대는 것이다.
그 대신 업무는 도모미와 교묘하게 얽히도록 배정했다.
얼마 전에는 함께 시즈오카까지 당일치기 출장을 갔다.
신칸센 안에서 도모니는 귤을 까서 하루히코에게 건네주었다.
하늘이라도 날 듯이 기뻤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그때부터 도모미는 줄창 책만 읽었다.
도모미는 누구에게나 꾸밈이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굴 좋아하는 걸까.
- 마돈나
p.87
화면에 비치는 숫자를 체크하고 특약점 판매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카레 루와 파스타 소스의 보충을 지시하고
타부서와 조정하는 등의 일을 한다.
크게 창조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직업이 그럴 것이다.
대기업이라 임금은 후한 편이다.
급료가 좋으니까 단조로운 일이라도 고생스럽지 않다.
p.92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댄서가 된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어?"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말릴 수만은 없잖아요."
"오호! 이해십ㅁ이 하해와 같으신 어머니시군."
요시오는 캔맥주를 다 마시고, 손으로 콱 쥐어 찌그려뜨렸다.
"비꼬지 말아요. 그럼, 당신이 슌스케를 불러 앉혀놓고 말하던가......"
"아버지는 마지막 보루. 외교도 그렇잖아.
처음부터 장관이 나서서 교섭에 임하나?
우선은 실무진이 나서서 사전 교섭이랑 물밑 작업도 하고,
장관은 결정 단계에서 사인만 하는 거야."
"잘난 척은." 치사토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슌스케한테 물어봐. 첫째, 그 직업에 어떤 장래성이 있는가.
둘깨, 어느 정도의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가.
셋째, 여자친구 부모에게 설명할 수 있는 직업인가.
내 짐작으로는 세 번째 질문에서 정신이 번쩍 들 테니까."
p.122
"슌스케가 당신한테 물어봐달래요."
"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월급쟁이가 된 게 정말 좋았느냐고."
"이런 녀석 같으니라고. 어디서 주워듣긴 해 가지고."
요시오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월급쟁이가 된 게 행복하다는 사람은 없어.
나는 지금의 회사에 들어와서 행복해.
수입도 평균 이상은 되고 남들에게 인정도 받고, 집도 지었어.
가족들이 충분히 먹고 쓰게 해주고. 그런 결과에 행복을 느끼고 있는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게 당연히 좋지."
"그럼, 당신이 직접 그렇게 말하세요."
p.132
모험하지 않는 인간은 모험하는 사람이 밉다.
자유를 선택하지 않은 인간은 자유가 밉다.
p.146
"대학은 보낼 거다. 반드시 보낼 거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어지간한 재능이 없는 한, 협조성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해.
아빠 말이야, 아사노는 좋아해. 인정한다."
"아사노가 누군데요?"
"그렇지만 말이야, 그 녀석도 특별한 재능이 없는 한,
다른 사람들과 맞춰 살아야만 해.
오늘은 좋아. 허락하겠어. 그래도 내일부터는 안 돼."
"도대체 뭘요? 무슨 소리예요?"
"너도 말이지, 언젠가 알 날이 올 거다."
"몰라요, 무슨 말인지."
"월급쟁이가 될 가능성이 더 많아. 그
렇게 되면 출세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해."
- 댄스
p.192
'회사 돈'에 얽힌 일화라면 얼마든지 있다.
컴퓨터 부문을 시작한 개발 담당은 3천만 엔이나 되는 뒷돈을 만들어,
부하 50명을 거느리고 라스베이거스에서 호화판으로 놀았다.
그 사실을 안 당시의 사장은 배를 잡고 웃었다고 한다.
유럽 공장을 만든 매니저는 접대비를 물 쓰듯 쓰고,
마침내는 파리 사교계에 이름을 날리게까지 되었다.
그 사람이 현재의 상무다.
돈은 쓰는 방법이 문제인 것이다. 이는 그 사람의 그릇 크기를 말해준다.
반대로 지금의 총무부는 뭔가.
작은 개인 상점과 결탁하여, 사소한 돈을 착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정까지도 쩨쩨하다.
나는 이 제쩨함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 총무는 마누라
p.234
결재가 빠르니까 부 전체의 일이 순조로웠다.
부서에 야근이 많은 것은 관리직 탓임을 절감했다.
그러나 재미라고는 없었다. 직장에 잡담이 없는 것이다.
"어이, 유미. 남자친구는 생겼나?"
옛날 버릇대로 가볍게 농을 걸었더니,
요코가 정색을 하고 시게노리를 보았다. 무언의 비난을 느꼈다.
이후, 전반적으로 여사원을 놀리거나 하는 일은 힘들어졌다.
더 이상 유미도 "요즘 허리 사이즈는 몇 인치나 되시나요?"
따위의 짓궂은 말은 하지 않았다. 세 번 지각하면
하루 동안 요릿집 종업원 유니폼을 입고 일하기로 한 벌칙 게임은
자연 소멸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프로야구 얘기가 극에 달해 근무시간 중에 종이를 둥글게 말아
미니야구를 하던 시절이 그리웠다.
한때는 영업부서에서도 짓궂은 행동과 분위기로 가장 이름난 과였다.
줄줄이 이어지는 회식으로 긴자 클럽의 영수증은
부장이 금액도 보지 않고 도장을 찍었다.
3만 엔 이상은 부장 결재였는데 앞으로는 그런 일은 어려워질 것 같았다.
p.263
요코 부부의 화제는 풍부했다.
오페라뿐만 아니라, 영화와 문학에도 정통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잘 모르는 것 같으면 텔레비전 소재도 꺼냈다.
싫어할 수 없는 인텔리였다.
너무 완벽해서 시게노리는 오히려 불편했다.
무균실에 들어온 바퀴벌레의 심정이 아마도 이런 거겠지.
- 보스
p.303
불평을 늘어놓는 것은 부티크와 잡화점이다.
잡화점 주인이 장부를 들이밀어 진땀이 난 적도 있다.
"뭐요, 당신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한 거잖아.
잘나가는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몰려들 거라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다 없어진 거 아냐?
이쪽은 산속에서 장사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지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임대료를 상당히 싸게 내려주었다.
음식점만 남는 것은 미나토파크가 쇼핑몰임을 자처하고 있는 이상,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점과 꽃집에는 떠나지 말아달라며 사정하고 있다.
유행하는 세계적인 브랜드가 들어와준다면
임대료는 안 받아도 좋을 지경이다.
p.312
오효이 씨는 날씨가 좋은 날은 매일 파티오에서 독서를 했다.
오전 10시부터 12시경까지, 또 오후 1시가 지난 시점부터 3시까지다.
사람들로 혼잡한 점심시간에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텅 비어 있는 장소를 좋아하는 것이겠지.
테이블도 정해져 있었다.
운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등나무 시렁 아래다. 특등석이라 해도 좋았다.
오효이 씨로서는 아무에게도 가르쳐주고 싶지 않은
명당 중의 명당일 것이다.
복장은 언제나 새하얀 폴로셔츠나 단추를 채우지 않은 셔츠에 면바지,
맨발에 로퍼를 신고 있었다. 적당히 세련된 분위기가 좋았다.
나이 든 사람은 칙칙한 옷만 입거나,
젊게 보이고 싶어 화려한 원색만 고집하거나 둘 중 하나다.
결국, 깔끔하게 보이는 것이 제일 상책이다.
선글라스도 어울렸다. 유럽의 리조트로 해외출장을 갔을 때,
선글라스를 쓴 연장자들의 모습이 많아 놀란 적이 있다.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p.324
"그건 그렇고 아버지가 토마토 재배를 시작하셨어.
작은 비닐하우스까지 만들고." 누나가 화제를 바꾸었다.
"뭐야, 완전히 농부가 되신 거 아냐?"
"뭔가에 집중하고 싶으신 거 아니겠지.
멍하게 있으면 엄마만 생각날 테고 말이야.""
"그런 것 같아?"
"그렇다니까. 너한테는 말 안 했지만, 작년 언젠가는 옆집 사람한테
'쓸쓸하시죠'란 말만 듣고도 펑펑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었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누나는 동생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던 게 틀림없다.
"전화해드려."
"응." 애매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가 울었다? 장례식 때는 의연한 모습이었는데.
있는 힘을 다해 참았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일까.
자책감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용기를 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애당초 아버지 입장에서도 딸과 아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다를 터이다.
내가 아버지니까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는 강한 존재이고 싶다.
시계를 보았다. 밤 9시 반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이미 9시 좀 지나서는 잠자리에 드신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나이 든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전화는 다음에 하기로 했다.
- 파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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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단편 5작품이 들어있고 모두 재밌다
'오쿠다 히데오' 하면 '재미'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듯이
그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 맘대로 순서를 나열하자면
마돈나>>보스>댄스>>파티오>총무는 마누라 순이다
마돈나 : 40-50대 아저씨들이(직장 상사) 젊은 여직원을 보고
짝사랑하는 심리 묘사가 일품인데 정말?? 이런 거면
너무 싫고 징그럽다고 생각되지만
소설 속에선 나름 귀엽게 그려지고 있다
보스 : 새로 온 여자 상사에 대한 또래 남자 직원의 질투심
남자는 아니지만 알 것 같다 ㅋㅋ
댄스 : 이 아저씨는 내가 아는 분을 닮았다
예전 모 프로그램의 차장님의 아들이 비보이였는데
아들 얘기 할 때마다 한숨 쉬고 화 내던 모습이 겹쳐져
더 공감가고 웃겼다
나는 오쿠다 히데오의 단편이 좋다
바로 내 얘기 같고, 옆집 사람 사는 얘기 같고
문체도 쉽고 통통 튀고, 무엇보다 웃겨서 좋다
훗날 만화처럼 깔깔대며 웃을 수 있고
시트콤처럼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
(그런데 한국은 가볍기만한 작품으로는 등단하기 어려운 시스템이라
의미와 깊이를 넣어야 한다)
등단 후엔 꼭! 억지로 쥐어짠 감동 없이
그냥 딱 깔끔하게 웃기기만 하는 소설을 꼭 써보고 싶다
'한국의 오쿠다 히데오'를 꿈꾸며 오늘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