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욱 <동정 없는 세상>

 

p.22

그렇다. 나는 하고 싶었다.

내 몸에 남성호르몬이 분비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니 그전에 섹스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부터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인지 알게 된 다음에는 더욱더 하고 싶었다.

지난 몇 년간의 내 개인사는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의 투쟁으로 점철되어왔다.

 

p.90

사람을 얼굴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녀석들은 모르고 있다.

내가 나온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중학교 삼 년 동안 여자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피곤했는지

녀석들은 모른다.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며 선물이 쏟아져들어왔다.

문제는 그 편지 속에 있는 나는 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왠지 고독해 보인다고? 우수가 깃들인 얼굴이라고?

마치 꿈꾸는 듯한 눈빛이라고? 뭔가 심오한 사색을 하는 듯한 표정이라고?

편지를 보낸 여자아이들은 내 얼굴 가지고 제멋대로 상상해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이미지를 만들어서 나를 그 속에 집어넣었다.

나는 고독하지도 않았고 우수에 물들어 있지도 않았으며

수업시간이면 졸음 가득한 눈빛을 종종 보이기는 했지만

뭔가 꿈꾸는 듯한 눈빛 따위는 가져본 적이 없었고

사색이라고는 시험을 보거나 성적표가 나오는 날에

사색이 되는 정도밖에 없는 평범한 아이였는데 말이다.

 

p.119

-여기 갈까?

서영이가 간판과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관 이름이 하필이면 금수장이 뭐니. 금수들만 가는 데 같아. 여긴 싫어.

벌써 한 시간째 여관 거리를 빙빙 돌고만 있었다.

다리가 아파왔고 조금씩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로 가? 바깥쪽에 있는 여관은 길가라서 싫다 하고

안쪽에 있는 여관은 건물이 볼품없어서 싫다고 하고

건물이 근사한 여관은 출입 통제가 있을 것 같아서 싫다고 하고

이젠 여관 이름이 별로여서 싫다니. 너, 사실은 생각 없는 거지?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괜히 나 데리고 장난치지 말고.

-너는 지금 내가 장난치는 걸로 보여?

서영이는 한마디 던지고는 몸을 돌려 바삐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따라가서 팔을 잡았다.

-야, 짜증내서 미안해. 조금 더 돌아보자.

애써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서영이를 달랬다.

여기까지 왔는데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가야 한다.

 

p.148

-네가 한 제일 큰 효도가 뭔지 알아?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난데없이 효도 타령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뭔데?

-네가 태어나서 이십 년 동안 내 옆에 있었다는 거야.

-그게 무슨 효도야. 군식구 하나 늘어버린 거잖아.

나 때문에 엄마는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냐.

숙경씨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를 가진 후에 내가 하고 싶었던 유일한 것은 너를 낳는 거였고,

네가 태어난 후에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너를 예쁘게 키우는 거였거든.

너를 대학생 만들고 싶어서 낳은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네가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너는 세상에 나와서 여태까지 별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주었으니

이미 네 할 도리는 다한 거야. 대학 따위가 뭐 대단한 거라고

거기 가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겠니. 나도 대학에 가지 않았는데,

네가 언제 대졸 엄마 아니라고 불평한 적 있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네가 대학생 아들 아니라고 뭐라 하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것을 해.

숙경씨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서 얘기하니

나는 왠지 감동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감동이라는 것은 왜 꼭 어색함을 동반하는지 모르겠다.

 

p.153

-뭐든지 하고 싶었던 그때에 해야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나면 왜 하고 싶었는지 잊어버리게 되거든.

나한테 미대는 그래. 이제 와서 가면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처럼 강렬하게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말이지.

뭔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때 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왜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잊어버리게 되거든.

자꾸 그러다보면 결국에는 하고 싶은 것이 없어져버려.

우물이라는 것은 퍼내면 퍼낼수록 새로운 물이 나오지만

퍼내지 않다보면 결국 물이 마르게 되잖니.

그런 것처럼 욕구라는 것도 채워주면 채워줄수록 새로운 욕구가 샘솟지만

포기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게 되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너도 쉽지야 않겠지만 하고 싶은 것을 자꾸 만들어서 해봐.

열심히 얘기하는 명호씨에게는 안된 얘기겠지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서영이와 섹스하는 것밖에 없다.

-섹스도 하고 싶을 때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하기 싫어져?

명호씨가 눈을 치켜뜨며 혀를 찼다.

-어이구, 이 녀석아. 너는 피가 되고 살이 될 만한 얘기들을

꼭 개밥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나보구나.

 

p.161

명호씨가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해둔 덕분에

괜히 쓸데없이 골치아픈 책들을 읽다가 집어던지는 시행착오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었다. 시행착오라면 이런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옆에 꽂혀 있던 책은 <아들과 연인>이었는데

<채털리 부인의 사랑>보다 훨씬 두꺼웠다.

그렇다면 야한 대목이 얼마나 더 많이 나올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아들과 연인>을 끝까지 읽은 후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세상에, 그 두꺼운 책에 야한 대목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다니.

그리하여 나는 <북회귀선>은 읽었지만 <남회귀선>은 읽지 않았다.

사실 <남회귀선>이 야하지 않을까봐 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북회귀선>을 읽어보니 야한 부분이 제법 있기는 했으나

그런 대목이 나올 때까지 읽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야한 부분에서도 별로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하게 야하면 주저없이 읽을 테고

확실하게 어려우면 아예 손도 대지 않을 텐데

이도저도 아니면 나 같은 독자를 기만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소설을 그런 식으로 헷갈리게 써서야 되겠는가.

책이야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는 것인데

기왕 시간을 때울 바에는 심오한 책보다는 재미있는 책이 더 좋다.

그리고 재미라고 한다면 뭐니뭐니 해도

야한 것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겠는가.

 

p.181

이십대에 접어든 만큼 섹스에 관해서도 조금 어른스러워지기로 했다.

더이상 발정난 숫강아지처럼 서영이에게 깽깽거리지 말아야겠다.

나는 이제 철없는 십대가 아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없는 것처럼

하기 싫다고 모두 마다할 수는 없다.

스물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스물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듯

언젠가는 서른이 되고 또 금방 마흔이 될 것이다.

그때쯤이면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이야 그렇게 될 리는 없을 것 같지만

어쩌면 명호씨의 말대로 글을 쓸지도 모르고

어쩌면 숙경씨의 말대로 헤어디자이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하건 간에 어차피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근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근사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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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보다 더 웃긴 소설

그냥 한번 펼쳐보았을 뿐인데 단숨에 읽어버렸다

하루도 필요없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내용은 고3 남학생 준호가

친구 경식이에 이어 영석이까지 동정을 떼자

여자친구 서영과 '한번 하자'고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졸라대는 이야기인데

완전 중독성있다 ㅋㅋ

어찌나 집요하게 구는지 한번 할 줄 알았다 ㅋㅋㅋ

 

남자 형제도 없고 워낙 보수적으로 자라온 탓에

10대 남자들의 머릿 속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뿐더러

원체 꽉 막혀 있어서 들었어도 이해 못할 일 투성이였을 테지만

이 책을 통해 신선한 경험을 했다 @.,@

어쩐지 바보같고 변태같지만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이다 ^^

암만! 사창가에서 동정을 떼는 것보다야 여자 친구 조르는 게 한참은 낫지

나중에 우리 아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면

책상 위에 살짝 올려두고 싶은 책이다

 

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p.28

어려서 그런 계산까지 한 것은 아니건만도

뒷간에 갈 때는 동무들하고 떼로 몰려서 갔다.

소꿉장난을 하다가 한 아이가 술래잡기를 할래? 하면 우르르 따라 하듯이

누군가가 뒷간에 가자 하면 똥이 안 마려워도 다들 따라가서

일제히 동그란 엉덩이를 까고 앉아 힘을 주곤 했다.

계집애들도 치마 밑에 엉덩이를 쉽게 깔 수 있는 풍차바지를 입을 때였다.

대낮에도 뒷간 속은 어둑시근해서 계집애들의 흰 궁둥이가

뒷간 지붕의 덜 여문 박을 으스름 달밤에 보는 것처럼 보얗고도 몽롱했다.

 

p.89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잇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 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p.108

너희들이 온종일 답답한 골목에서 공기나 고무줄을 하다가

기껏 어른을 졸라 일 전씩 까먹는 동안 나는

모든 것이 살아 숨쉬고 너울대는 들판에서 강아지처럼 뛰어놀 것이다.

내일이면 고개를 넘고 들을 지나고 개울을 건널 것이다.

풀과 들꽃과 두엄 냄새가 어울린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초여름 첫새벽에 달개비가 깔린

푸른 길의 이슬을 맨발로 밟을 때처럼 순수한 희열을 느꼈다.

그건 향수라기보다는 짐승 같은 굶주림이었고,

서울 아이에 대한 최초의 우월감이었다.

서울 아이를 불쌍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기분 좋은 일이었다.

 

p.311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 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뻔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꽂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대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략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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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박완서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

전시 중의 일기라는 점에선 <안네의 일기>랑 닮은 것도 같은데

박완서 작가는 전쟁 중이 아닌 한참 후에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하여" 그 시절을 복원시켰다는 점이 다르다

40-50년 전의 일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말하는 투를 보면

기억력은 물론 분명 머리도 엄청 좋을 거란 생각이다

 

한편으론 자서전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자신을 비롯한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렇게나 솔직하게 까발려도 되는 건지 괜한 걱정이 다 든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과 엄마의 지적 허영심, 교만함, 이기심 등을

여봐란듯이 드러내놓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쓸 때 자꾸만 이거 이거 내 친구랑 비슷한 거 같은데

걔가 보면 어쩌지? 욕하는 거 같잖아 하면서

어쩐지 나를 닮은 주인공은 은근히 미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ㅋㅋ

책이 나오면 친구를 잃는 걸까? 김칫국부터 마시는데

막상 작가의 친구나 가족은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봐도 못 본 척하면서??

양귀자 <원미동 사람들>

 

p.11

어떤 일요일의 무료함이 만들어낸 윗벽의 줄자.

정밀한 센티미터를 아로새겨서 스카치테이프로 벽에 붙여놓은 것이었다.

은혜의 키를 재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일 미터 이상 자라기까지 이 방에 살게 되리란 기대는 없었기 때문에

일 미터하고 육 센티쯤 그려나가다가 그만두고 벽에 붙였었다.

처음에 이 이 아이는 오 분에 한 번씩 키를 재겠다고

눈금 앞에서 발을 모두었다.

심각한 표정과 차렷 자세로 떠받쳐진 가느다란 어깨를 떠올려본다.

아이의 키는 좀체로 자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세월의 눈금이나 줄자의 눈금이나, 바라다볼 때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시간은 분명 가는 것인데.

그는 다시 한번 촘촘한 간격의 눈금을 본다.

아이의 가느다란 어깨가 눈금 위에 포개진다.

떼어내면 흠집만 남을 뿐인 그것은 썰렁한 벽에 홀로 남게 된 것이었다.

 

p.26

그 넓은 서울특별시의 어디에도 붙박여 있지 못한

자신의 삶을 되씹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전세 계약 기간이 6개월이었던 때부터

어머니와 둘이서 전세방을 떠돌기 시작했었다.

대학 졸업반이 되자 어머니는 지방의 누님네에서 올라와

그의 자취방에 합세했다. 결혼을 하면서 방을 불가불 두 개가 필요했고

이때까지 두 개의 방과 마루를 얻기 위해

악전고투하며 살아왔다는 느낌이었다.

방이 그들을 내쫓는 때도 있고 그들이 방을 버리고 떠난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방이 그들을 내몰았다.

그렇게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며 얻은 결론은 한 가지,

집이 없으면 희망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희망이란, 특히 서울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이란

집과 같은 뜻이었다.

이제 그 희망을 갖기 위해 서울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뭔가 기이하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넓고 넓은 서울에서 그는 여태껏 집을 갖지 못하고 살았다.

희망 없이 살았다는 말과도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제 집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것은 서울이 아니고 부천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집과 희망은 동의어인가.

 

- 멀고 아름다운 동네

 

p.42

그가 '전통문화연구회'라는 알쏭달쏭한 이름의 단체가 내놓은

신문광고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실직 이후 그는 거의 모든 신문의 구인광고란을

매일매일 샅샅이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약간의 가능성만 보여도 광고를 오려내어 수첩 안에 소중히 간직하였다.

처음에는 광고마다의 알록달록한 문구들을 그대로 믿고

이력서까지 챙겨 일일이 찾아가보기도 했었다. 결과는 뻔했다.

중견 관리직을 선발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세일즈맨이었다.

어떤 회사건 모두 처음은 같았다.

오리엔테이션이라 하여 지원자들에게 하루나 이틀쯤의 교육을 시킨다.

교육을 시키면서도 절대 세일즈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세일즈의 과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신입사원의 연수 단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력서 접수 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외판사원은 아니라고

철석같이 주장했던 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서너 번의 교육 과정까지 거친 그는 마침내

신문광고의 구인란을 식별하는 모종의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그것은 간단했다. 관리 사원 모집, 월수 삼십만 원 이상 보장,

직접 내사 요망 따위의 문구가 붙으면 틀림없었다.

거기다가 절대 내근 보장, 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면

그건 확실히 세일즈맨 모집이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신문 광고의 구인란에 속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는 절대 외판사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곳저곳에 내밀어놓은 이력서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

그 무렵만 해도 아주 못 견딜 형편은 아니었다.

외판원이 되지 않겠다는 마음은 그의 마지막 고집이었다.

이상한 종류의 건강식품들, 심지어는 새로 특허를 얻은 발명품이라 해서

신발 깔개까지를 팔러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구든 제 소양에 맞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다.

효율적인 물품 기획, 제때제때 어김엇이 이루어지는

장부의 월별 결산과 새달의 예산기안, 그 일을 제외한 다른 일이

그에게 어울릴 수 있다고는 한 번도 믿지 않은 그였다.

 

p.55

더 이상은 거리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낭패감은 의외로 깊었다.

여태껏 부추겨왔던 용기가 삽시간에 녹아 스러져버리는 것 같았다.

정류소 앞을 지나다 그는 무작정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정말이지 첫마디는 아주 잘 나온 말이었어.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눈을 감았다.

누군가 진득하게 그의 말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누군가 그를 위해 몇 분간이라도 가만히만 있어준다면.

흔들거리는 버스 안에서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껏 준비해온 대사가 목구멍 저 안쪽에서부터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 불씨

 

p.82

다음 날 아침, 신새벽부터 밭에 나갔던 강노인은

그만 입을 쩍 벌리고 선 채 말을 잃었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었다.

이제 손가락만 한 고추 모종이 깔려 있는 밭에

여기저기 연탄재들이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겨울 빈 밭에 내다버리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목숨이 붙어 자라고 있는 밭에 연탄재를 내던진 것은

명백히 짐승의 처사였다. 반상회 끝의 독기 어린

동네 사람들이 저지른 것임은 대번에 알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이런 짓거리까지 해댈 줄이야

짐작도 못 했던 강노인이었다.

수십 덩어리의 연탄재 폭격을 당해 짓뭉개진 모종이

한 고랑만 해도 숱했다. 세상에 막된 인종들......

강노인은 주먹코를 씰룩이며 밭으로 달려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연탄재를 길가에 내던졌다.

서울것들이나 되니 살아 있는 밭에 해코지할 생각을 갖지,

땅을 아는 자라면 저 시퍼런 하늘이 무서워서라도

감히 이따위 행패를 생각이나 하겠는가.

흰 연탄재 가루를 뒤집어쓰고 쓰러져 있는

죄 없는 풀잎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어서

강노인은 잔뜩 허둥대고 있었다.

 

- 마지막 땅

 

p.87

남들은 나를 일곱 살짜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그저 그만한 계집아이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지만,

나는 결코 그저 그만한 어린아이는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게 건방지다면

하다못해 집안 돌아가는 사정이나 동네 사람들의 속마음 정도는

두루 알아맞힐 수 있는 눈치만큼은 환하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사실을 말하자면 내 나이는 여덟 살이거나 아홉 살,

둘 중의 하나이다. 낳아놓으니까 어찌나 부실한지 살아날 것 같지 않아

차일피일 출생신고를 미루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하는데

그나마 일곱 살짜리로 호적에 올려놓은 것만도 다행인 셈이었다.

살아나기를 원하지 않았을 엄마 마음쯤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아버지는 좀 덜하지만 엄마는 나만 보면 늘상 으르렁거렸다.

꿈도 꾸지 않았던 자식이었지만 행여 해서 낳아봤더니

원수 같은 또 딸이더라는 원성은

요사이도 노상 두고 하는 입버릇이니까 서운할 것도 없었다.

 

- 원미동 시인

 

p.179

그녀는 혼자 살게 되면서 무수히 많은 성적 암시를 받아야 했는데

그런 암시들이 거리에서, 시장에서, 친숙한 이웃에게서

거의 공개적으로 주어지는 것을 볼 때면

남편 부재의 뚜렷한 현실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윤희는 이미 능숙한 제스처를 익히고 있었다.

윤희의 경우는 보장된 자유와 경제적 독립 때문에

공격은 훨씬 동등한 위치에서 행해졌다.

이혼 후의 윤희는 거의 여걸처럼 굴었다. 그래야 먹고살 수 있다고 했다.

더러워. 너무 더러워. 더럽다는 말은 이제 윤희의 입버릇이 되고 말았다.

간혹 새벽에 일어나 도시를 뒤덮은 안개의

회색 실뭉치들을 보게 될 때마다, 그녀 또한 저 안개야말로

간밤에 내뿜어진 모든 욕망의 헉헉거리는 입김들의 잔해라는

생각을 머금게 되었다.도시의 수많은 밀실과 밀실에서

혹은 어둠으로 가려진 거리의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만들어올린 음모의 입김이 새 아침을 맞아

태양이 나타나면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빼는 모습으로 여겨졌다.

 

p.210

아내는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점차 그에게 맞서고 있는 느낌이었다.

긴 머리칼을 매만지던 연애 시절의 추억쯤은 잊었는지,

그렇게도 긴 멀리로 기르라고 성화를 대었건만

짧게 잘라서 오그라붙여놓은 퍼머도 마뜩지 않았다.

미적 조화는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처발랐다는 것만 시위하는

제멋대로의 화장 솜씨를 보노라면

서른네 살의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모호한 나이의 아내가

무엇을 꿈꾸는 여자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이미 예전에 그가 알아왔던 아내가 아니었다.

 

p.231

그는 간판을 올려다보았아. 행보사진관.

행복의 '복'자에서 기역 받침이 날아가버리고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받침을 찾아 제자리에 붙여놓지 않으면

영영 달아나버릴 행복이기나 한 것처럼 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행보사진관. 밫임이 있던 자리에는 본드 자국만 얼룩덜룩 남아 있다.

어디로 가버렸지.

그는 떨어져나간 아크릴 조각을 찾아보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뒹굴어다니는 쓰레기들을 일일이 들쳐보기도 했다.

센 바람에 그깟 받침 하나는 이미 십 리 밖으로 날아갔을 것이었다.

받침 조각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행보사진관. 글자들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여자가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간에,

날아가버린 기역 받침을 다시는 찾을 수 없으리라.

그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기운 없이 사진관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은 억세게도 불어댔다.

 

- 찻집 여자

 

p.241

그러면 고흥댁은 정말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김포에서 적어도 삼십 원은 싸게 샀다고 자부한 판인데

잠깐 사이에 형제에서는 오십 원이나 싸게 팔고 있다니

어느 쪽으로 가야 이익일는지 계산하기가 썩 어렵잖은가 말이다.

그러잖아도 지난번에 형제슈퍼에서 산 비누를 물리고

그 즉시로 김포슈퍼에서 싼값으로 비누를 샀다고 해서

동네 여자들 구설수에 올라 있는 고흥댁이었다.

한마디로 너무 노골적이라는 비난이었는데

그깟 몇십 원 때문에 당장 산 물건을 되물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거였다.

이쪽저쪽을 다니더라도 좀 눈치껏 하지 않고

너무 표 나게 굴었던 까닭이었다.

고흥댁도 말귀를 알아들었다.

싸게 주는 쪽으로 가는 것이야 말리지 않지만 요령껏,

어느 쪽이 더 싼지 눈치를 살핀 후에 행동에 옮기라는 말일 것이었다.

말귀는 알아들었다 해도 번번이 한 수 뒤처지는 것이

고흥댁은 여간 억울하지 않았다.

 

- 일용할 양식

 

p.289

박은자. 그러나 나는 그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만큼이나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전화 속의 목소리가 찐빵집 어쩌고 했을 때 이미 나는

잡채가닥과 돼지비계가 뒤섞여 있는 만두속 냄새까지 맡아버린 뒤였다.

하지만 나는 만두 냄새가 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세월이 그간 내게 가르쳐준 대로 한껏 반가움을 숨기고,

될 수 있으면 통통 튀지 않는 음성으로

그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음을 알렸을 뿐이었다.

그렇게 했음에도 반기는 내 마음이 전화선을 타고 날아가서

그녀의 마음에 꽂힌 모양이었다. 쉰 목소리의 높이가 몇 계단 뛰어오르고,

그러자니 자연 갈라지는 목소리의 가닥가닥마다에서

파열음이 튀어나오면서 폭포수처럼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한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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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순위가 좀 밀렸지만 한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작가

다른 건 다 읽었는데 <원미동 사람들>만 못 봤었기에

이번 기회에(어떤 기회인지는 비밀 ㅋㅋ) 냉큼 사버렸다

 

작가의 책 중 <희망>이란 소설도 있듯이

양귀자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가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

그런데 슬프다

척박한 현실과 인생의 고단함, 삶의 허무 속에서 말하는

아주 작은 희망이기에 작가의 말마따나

우린 그저 씁쓰레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진 않았지만 뮤지컬 <빨래>도 아마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중산층이 되기 위해 매일매일을 애쓰고 수고하는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나 이제 다 읽었으니 그녀의 새 책이 하루 빨리 나오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