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미나>
p.21
창밖으로 도시의 저녁이 밝아온다.
핏빛 노을이 순식간에 거실로 내려앉는다.
높게 걸린 한다발의 구름과, 부드럽게 쌓인 색깔들, 빌딩들,
그늘진 초록 나무의 시간, 어두운 그림자가 긴 손을 뻗는 시간이다.
p.25
학창생활은 일부 영리한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계급을 유지시킬,
혹은 좀더 향상시킬 기회를 제공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인식되며,
나머지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대학교는 여기보다는 낫겠지 하며
인내하는 과정에 불과하며, 그 둘 사이에 끼어 길을 잃고
쓸데없는 것을 망상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는 학생은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된다. 그들이 자살에 이르는 것은
그들의 삶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삶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어
자기가 죽고 싶다고 착각을 하거나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오해를 하기 때문이다.
p.52
유복한 화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대개 그의 결백함을 증언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혜택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랑할 줄 모른다,자신의 삶을 뽐내며 전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겸손하다.
이런 식의 평가는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지 알지 못하여
티없이 천진한 가난한 아이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의 무지가 가지 자신에 대한 죄악일 뿐이라면
유복한 아이의 무지는 타인에 대한 죄악이라는 점에서
둘은 명백히 다르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순진성으로
재미삼아 지렁이를 밟아 으깨는 것이며 명백한 죄악이다.
그러나 그들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을 죄악에 남겨둔다,
아니 그것을 장려한다, 그것을 칭송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따라서 충분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아니, 그것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아직 지나치게 부족한 거이라고 주장한다.
부모는 가해자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죄를 물려주려고 한다.
그들은 세계가 가해자와 피해자,
단지 두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다른 것은 없다. 빼앗긴 가해자의 삶은 피해자의 삶일 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경쟁은 공정했으므로 결과는 투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패배를 겸손히 인정하고 나의 죄악을 위해
너의 실패한 삶을 내어주기를. 이렇게 경쟁의 공정성은
강탈의 공정함을 주장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시(시)의 일부 지역에서 폐쇄적인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한줌의 중산층의 삶, 이기적이고 무지하며 책임감이 결여된 미성숙한 삶이
이런 식으로 유지되어나가는 동안
그 삶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반복되고 있으며
그것의 죄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두가 입을 다무는 사이
시의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자의 삶이
가해자들의 모든 책임감과 죄악을 등에 지고
서서히 바닥으로 침몰하고 있으며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책임지지 않은 채로 세계는 오늘도 조금씩 전진한다.
도대체 어디로, 무엇을 향하여?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늪과 같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이 모든 무지와 죄악을 바탕으로
미나의 모든 덕목은 쌓아올려졌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그녀에게 죄를 추궁하고 무지를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는 상황은 P시에서 완전히 소멸되어버렸으며
박물관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p.101
나는 사람이 싫다. 멍청하니까. 멍청한 애들이 싫다.
왜 사람들은 죽고 싶어하지? 멍청해서 그렇다.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실용적이고 효율적이다. 나는 합리주의자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그래서 화가 난다.
비생산적이고 비실용적이다. 화가 난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농촌으로 보내서 농사나 짓게 해야 한다.
어떻게 열 문제를 풀었는데 네 개를 맞힐 수가 있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애들의 엄마 아빠가 어떤 사람들인지 안 봐도 알 수가 있다.
불쌍하다. 그래서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비효율적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 못하는 애들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그애들은 백화점에 진열되는 인생이 되고 싶어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갖고 부자랑 결혼하는 거.
하지만 걔들은 그럴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문제집을 푸는 건 비효율적인 거다.
자기 철학이 없다.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다.
너 같은 인가는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 아주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고 싶다.
그러고 나서 웃어야지. 그런 애들이 선생이 되면 또
자기 같은 애들을 예뻐하고 나 같은 훌륭한 사람을 질투한다.
학생주임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는 내가 자기보다 잘났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유이다. 사람이 단순해서 그렇다.
나한테 공부만 잘해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하는데
어쨌거나 대학은 성격순이 아니다. 성적순이다.
게다가 훌륭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부적응자에 정신병자에 성격장애였다.
나는 적당한 인간이 될 생각이 없다.
나는 적당히 똑똑하고 잘난 인간이 될 생각이 없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람이 될 거다.
죽일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생각해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위대하다는 것은 사람을 죽일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일 권리를 갖지 못하면 위대해질 수 없다.
그러니까 조금 힘든 문제이다. 도대체 누구부터 죽여야 할지 모르겠다.
백살까지 산다고 했을 때 그때까지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일 수가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이 나라에도 이렇게 죽일 사람이 많은데
그러면 인도나 중국에는?
계속해서 더 멍청한 애들이 태어나고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바퀴벌레들같이 태어나고 또, 또, 또.
나는 세상에서 벌레가 제일 무섭다.
어제 방에 이상한 벌레가 들어왔을 때
벌레가 천장을 느릿느릿 기어다니다가
느릿느릿 기어서 창문을 뛰어넘어 날아갔다. 그냥 그게 끝이었다.
나는 토했다. 토하면서 수학에 대해 생각했다.
독서실 사물함에 숨겨놓은 술이랑 담배를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아침에 삼켰던 고구마 덩어리가 통째로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더이상 토할 게 없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수학문제집을 풀다가
다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거였다.
지난달에 아빠가 스피커를 새로 사줬다.
소리가 너무 좋아서 가만히 앉아서 들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춤춘다. 김미나가 좋아하는 유투가 나온다.
나는 유투가 싫다. 하지만 듣는다.
우리 아빠는 이상하다.
내가 지난번에 일등 했을 때는 쉬운 문제를 틀렸다면서 비웃었다.
이번에는 사등 했는데 스피커를 사줬다.
p.108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레드와 블루로 얼룩덜룩한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수정이 손을 뻗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긋자 푸른빛이 수직으로 이동한다.
구름은 마른 장작처럼 바삭하게 말라 있다.
노을의 시간, 하루의 죽은, 하늘이 죽어가며 피를 흘리는 시간이다.
황혼의 시간에는 매순간 빛의 양과 질과 색이 변하고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흔든다.
마음은 균형을 잃어 빈틈을 드러낸다. 그 시간 외로운 사람은 울고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에게 늦은 전화를 걸어 사랑을 속삭인다.
p.193
이해하지 않을 것. 그리고 침묵할 것.
그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다. 그렇게 단조롭고 평화롭다.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생각은 그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쳐지나가고
바람과 모래에 섞여 날아가버린다. 그런 식으로 하루가 간다.
시간은 쉽게 흘러가고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간단하게 말해 그는 아무런 생각도 없고
아무런 의견도 없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 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면 그느 그렇지 않다고,
나는 그것보다는 좀더 복잡한 인간이다,
나도 지능이라는 것이 있다, 하루종일 생각한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더 비열하며 좀더 난해하며 좀더 더러운,
섬세한 인간이라고 항의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그는 다른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그가 말이 없는 이유는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과묵함은 단순한 뇌를 상징한다.
예의바름은 건조한 마음을 상징한다.
그는 할말이 없으면 할말을 생각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을 다문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할말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지만
나중에는 말을 하지 않으니까 점점 더 할말이 없어지는 상황으로 발전한다.
그는 점점 더 아무런 생각도 의견도 없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그의 매력이다.
여름에도 잘 타지 않는 흰 피부와, 티셔츠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적당하게 마른 좋은 골격의 신체는 사람들에게,
특히 여학생들에게 매력과 신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는 수다스러웠고
장난스러운데다가 어느정도 위험스럽기까지 했으며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는 스트레이트하게 접근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의바름에 가려 성급해 보이지 않으며,
그의 과묵함 때문에 어느정도 진지한 선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접근에는 가치판단이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으며
바로 그런 점이 민호를 현대적으로 돋보이게 하며
수정과 민호가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이유이다.
p.222
고개를 들면 구름이 도시의 더러운 빛을 받아
오렌지와 퍼플로 빛나는 것이 보인다. 수정은 그것을 바라본다.
그것은 타락한 어른들의 아름다움을 반사한다.
하늘과 땅에서 어른들의 타락이 동시에 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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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데 한참 걸렸다
읽어야 하는데 하는데 하면서
손이 가지 않기 때문
읽으면서도 어쩐지 소화불량
여고생이 친구를 살해하는 이야기
무섭고 불편하다
살해한 수정도 이상하지만 미나도 이상하고 민호도 이상하다
모두가 이상하고, 학교가 이상하고, 사회 시스템이 이상하고,
우리나라가 이상하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보다 그냥 이상한 애들이 이상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한 애들 따위 이해하고 싶지 않아!!
시대 의식이 드러나는 점은 내가 본받아야 할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