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
p.81
살아 있었으면...... 그들은 모두 무엇을 할까.
어쩌면 지금쯤 넥타이를 매고 회사 지하다방에서 후배를 만나거나,
저녁 동창회모임에 프라이드를 끌고 나타날 것이겠지만,
만일 살아 있었다면 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나는 그들과 오래 떨어져서
서로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고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가끔 그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들의 이십대가 고스란히 놓인 1980년대,
내가 죽고만 싶어, 죽고만 싶어, 하고 중얼거리며
죽지 못하고 빠져나온 19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고꾸라졌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달려나와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버려다는 생각, 그래서 어두운 곳만 보면
혹시 여기에 그들의 주검이 파랗게 누워 있는 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 인간에 대한 예의
p.129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난 정말 그럴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일상을 걸 수는 없었어.
자잘한 나날들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거는 일보다 더 힘들었어.
나의 미래...... 나의 젊은날...... 젊음을 건다는 건 미래를 거는 일이고
일상을 건다는 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 삶을 거는 거잖아.
목숨을 거는 일이 차라리 쉬웠을 거야.
하지만 나는 정말 목숨이라도 걸고 싶나?
p.136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1986년의 그 다방을 찾았다.
창경원을 지나 돌담이 끝난 곳에서 스무 발짝쯤 더 걸어가면
작은 골목에 있던 다방. 그 다방은 이제 노래방이 되어 있었고
보랏빛과 노란빛의 네온싸인이 간판 주위에서 천박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거기에 서 있었다.
그 다방이 노래방 간판으로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런 일들이야 흔해서 더이상 상처가 되지 못했다.
다만 나는 네온싸인 같은 종류가 아닌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빛은 폐결핵에 걸리고, 골프용구점의 점원이 되었다.
그 빛을 위해 뜨개질을 하던 여자는 아직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남자는 우유대리점을 차리고,
화려한 민주투사였던 노선배는 다만 저녁을 사줄 돈이 없어서
후배에게 굽은 등을 보이며 사라져가고......
우리들은 모여앉아 금박글씨가 선연한 명함을 건네며,
이제 영원히 박제된 맘모스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내 눈앞으로 얼음 속에 갇힌 치켜뜬 맘모스의 눈매가 떠올랐다.
한때는 따뜻했으나 이제는 얼어붙어버린 붉은 피가 보이고,
그러자 또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약삭빠르게 일찍 빠져나온 우리들만 이렇게 무사하군요.
나는 어두워져가는 초겨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들은 이제 겨우, 겨울의 입구에 서 있을 뿐이었다.
- 무엇을 할 것인가
p.153
서른이 넘으면서 그들은 언제나 만나면 피곤하다는 말을 했다.
치사하다는 말, 더럽다는 말,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
예쩐에는 물론 그들은 다른 말들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p.168
다섯번째 도전한 고시에서 마지막 3차시험을 치르고 나왔을 때
아내는 빗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바바리코트의 깃을 올린 얼굴이 몹시 추워 보였다.
"당신 정말 수고했어요. 난 이제 자랑스러워."
그때 그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마치 파출부가 몹시 어지렵혀진 집안을 치우고 문을 나설 때
주인집 여자에겟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모욕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그 기분을, 그 감격을 깨서는 안될 것 같은
엄숙함이 아내의 얼굴에 있었다.
- 무거운 가방
p.212
저 영민한 청년은 왜 이 값싼 소주에 제 몸을 버리는 늙은이가 되었는가,
순임 어머니는 왜 치매상태로라도 남편을 붙들어매놓지 않으면 안되는가,
순임이는 왜 공부를 잘하는가,
공부를 잘하는 순임이는 왜 대학에 갈 수 없는가,
순임이의 친구들의 왜 모두 신발공장으로 떠나버렸는가,
왜 이곳에선 소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왜 콩밭은 포도밭이 되었는가,
왜 그는 나를 그토록 자신 속에만 가두고 싶어했을까,
나는 왜 모든 걸 버리고 이곳까지 와야 했던가.
나의 괴로움은 내가 그 모든 것의 대답을 안다는 데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고,
또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한 절망을
아득하고 영원한 것으로 믿는다는 데 있었다.
- 절망을 건너는 법
p.304
그래, 나는 아버지를 외면해왔다. 쓰러진 아버지가 날 외면했으니까.
잡을 수 없는 과거에 매달리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자체를 외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잘리지 않은 탯줄처럼, 그 삶에서 이어져 있는 나 스스로의 삶조차도.
그것이 정말 무지가 아니라 외면이었다면......
고등학교 시절, 수업을 받고 있던 교실로 난데없이 꿩이 날아든 적이 있었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날아든 그 꿩은 아이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에 놀라,
작은 교실에서 이리저리 날개를 부딪치며 날았다.
그러고는 잠시 후, 쓰레기통에 머리를 처박고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제 눈 가리면 다른 사람들의 눈도 가려진다고 믿은 것이었다.
아이들이 책상을 치며 웃었다......
작은 내 안락함에 머리를 처박고 나도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던 것일까.
내 눈을 감으면 온 세상이 다 어둠에 잠긴다고 믿으면서.
-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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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동트는 새벽>으로 등단한 작가의 아마도 첫번째 소설집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공지영은 늘 그래왔지만
초기작답게 더욱 날이 서있고 투쟁적인 느낌
사랑하는 당신께 - 오 미련한 여자여 가련하구나
꿈 - 자전적 색깔이 강한 작품
인간에 대한 예의 - 운동권 이야기
누구의 삶이 옳고 그르다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낼 뿐
무엇을 할 것인가 - 리얼하다, 이래서 운동권이 싫다
무거운 가방 -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
싫다, 유부남들
절망을 건너는 법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비슷
잃어버린 보석 - 안구에 습기차는 시대사를 노래하다
손님 - 쌍놈의 사기꾼
하지만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비하면 이 정도 범죄는 애교
동트는 새벽 - 유명 작가의 등단작은 언제나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