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생생활문화원 <인문의 스펙을 타고 가라>

 

p.21

영화에 비유를 해보죠. 신인감독들이 많이 하는 얘기인데,

첫 영화로 데뷔하는 것이 워낙 어렵잖아요.

장편 상업영화에서 기획돼서 신인감독으로 데뷔하는 사람들은

1년에 몇 명이나 될까요? 한 20~30명 된다고 가정을 하면,

감독이 되고 싶어서 입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400~500명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감독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대략 1000만 원밖에 안 되는 비참한 스태프 생활을 합니다.

한마디로 꿈이 저당 잡힌 거죠. 그런데 이때 데뷔 기회가 옵니다.

하지만 감독이 되어 첫 영화를 만들게 되더라도

자기가 전권을 휘두를 수가 없거든요. 신인감독의 뭘 믿고

제작자가 남의 돈을 수십 억씩 끌어다가 맡기겠습니까.

그러면 끊임없이 타협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 신인감독이 이렇게 변명합니다.

"데뷔 자체가 어려우니까 이번에는 대중들의 취향에 맞추어서

거기에 전력투구를 하고 다음에 자기 기반이 쌓이면

그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영화를 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물론 저도 지킬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It's now or never"라는 말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도 안 된다는 것이죠.

첫 영화를 그렇게 찍으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는데

힘드니까 제작자의 요구도 100% 수용하고,

관객이 더 많이 든다고 끝을 해피엔딩으로 만들고,

초반에는 액션으로 시작해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그렇게 만들었다고 치면,

그 사람은 두 번째에도 자기 영화는 못 만들어요.

그냥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는 거죠.

그런 영화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정말로 있다면, 그것을 하지 않고

일단은 이것부터 해서 나중에 저것을 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영원히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거기에는 전제가 있어요. 뭔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거죠.

하고 싶은 것이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졸업은 했는데 딱히 내가 뭘 잘 하는지도 모르겠고,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직장은 가야겠고,

그런 사람들은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모두 꿈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꿈이 없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리고 또 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구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무엇을 이루고 싶은데,

일단 안정적으로 이것을 하고 나중에 그것을 하자고 이야기한다면

이 사람은 영원히 못한다는 거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p.32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스피노자의

"깊게 파려면 먼저 넓게 파야 한다"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이 말이 바로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깊게 파는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어요.

심지어 입사 이후에도 팔 수 있습니다.

처음에 넓게 파면 훨씬 깊게 팔 수 있는데 좁게만 보는 것이 문제죠.

그런 측면에서 전공 혹은 스펙에만 연연하지 말고

자기랑 관계없는 것이라도 넓게 팠으면 좋겠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으로 먹고 살잖아요.

근데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저한테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영화책이 아니에요.

과학교양서들이나 진화심리학, 철학이나 신화에 관한 책이

영화를 읽어내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합니다.

어떤 사람이 대학시절에 영화평론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면,

동서고금의 영화를 다 보려고 하고

영화에 대해서 자기 모든 시간을 쏟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몇 년 못 가서 한계에 부딪힌다는 거예요.

하지만 넓게 파다 보면 한계에 부딪혀도 우회를 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 돌아갈 수도 있는 거죠.

요즘 학생들은 너무 좁게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저는 좀 넓게 헐렁하게 살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기업에서도 점점 전공 분야의 전문성을 원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특히 학부에서는 다양하게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자기가 관심이 없어도 '법학개론'을 들어보고,

자기가 교회에 한 번도 안 가고, 절에 안 가도,

'종교와 문화' 같은 과목을 들어보고,

미술의 '미'자도 모르고 붓은 중학교 이후로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지만,

'현대 미술의 이해' 같은 과목도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다 그 당시에 들을 때는 헛짓하는 것 같고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이런 것들이 다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종교학을 공부한 영화전문기자 이동진

 

p.69

인문학도로서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그 자체를 고민하는 것,

그것도 상당히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고민을 하면서

'아,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어떻게 세상을 봐야 하느냐'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사실 법대나 경제학, 경영학은 진로의 목표 자체가

한 길로 정해져 있으니까 특별한 고민이 없어도 그 길로 그냥 가면 되죠.

그러나 우리는 가는 내내 주위를 돌아보면서 고민을 해야 합니다.

당장은 힘들 수 있지만 그것이 전체 인생에서 봤을 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고민은 인간에 대한 탐구, 또 특별히 남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탐구니까요.

아마 전 단과대학을을 통틀어서 인문대만큼

자기 스스로 개인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나의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그 뒤에 남은 나의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렇게 많이 고민을 하는 단과대학은 없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인문대가 상당히 좋다고 봐요.

고민은 최대한 많이 하는 게 좋습니다.

오히려 고민 없는 삶이라는 게 정말 이상한 것이겠죠.

다만 고민을 최대로 하되 즐겁게 해야겠죠. 즐겁게 고민을 하세요.

 

독문학을 전공한 드라파 PD 표민수

 

p.118

진로를 고민하는 인문대생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모든 직업에는 모두 명암이 있으며

절대적으로 좋은 직업은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시해야 자기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시험 삼아 자기에게 정말 좋아보이는 직업을 두고

장점 세 가지와 단점 세 가지를 꼽아보자.

단점이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장점이 크게 느껴지면

그것이 자기에게 좋은 직업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금융인

 

p.213

지금 인문대를 다니는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런 것을 권유하고 싶은데, 뭔가 한 가지에는 미쳐보라는 것이죠.

공부, 문학, 연애, 종교, 사회운동, 스포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한 가지에 인생을 걸고 미쳐서 열병을 앓아봐야 해요.

20대, 대학생, 그때 아니면 느끼지 못하는 감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느낌이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히 문학이 주는 감성에는 꼭 한번 빠져보면 좋겠네요.

20대 초반에 읽는 소설과 사회생활하면서 읽는 소설은

그 느낌이 너무 다르지만 20대에 느끼는 그 감성이 참 소중하거든요.

20대에는 순수와 이상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인생의 열병을 앓을 특권이 있어요.

부디 그 특권을 누리길 바랍니다.

 

국사학과를 나온 IT기업 대표 문용식

 

p.287

창의력이 주목받는 시대입니다.

마치 남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창의력인 것처럼 말해집니다.

차이의 창의력은 진정한 것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진정한 창의력은 깊은 성찰 속에서 나오는 깨달음과 같은 것이겠죠.

아마 이런 경험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너무나 어려웠던 책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 너무나 쉬웠던 적 말입니다.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일까요? 아닙니다.

시간 자체가 해결해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겪은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좀 더 올바른 방향에 시간을 투자해야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국사학과를 나온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김대호

 

p.319

모든 것을 두루두루 잘하는 사람보다 한 가지를 잘하는 사람,

한 가지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사람이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놓고

좀 더 창의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비슷한 것들을 두루두루 다 잘 하잖아요.

토익은 다들 팔백, 구백 넘어가고, 검색 자격증을 따고

이른바 스펙을 엄청나게 끌어올립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것을 두루두루 잘하는 능력이

실제 하는 일에서 필요한가, 활용을 하는가, 그건 좀 의심스럽거든요.

그런데도 입학해서 졸업하는 날까지 모두가 비슷한 것들을 잘하려고,

스펙을 관리하는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러워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대학시절은 꽃다운 나이잖아요. 인생의 황금기인데 20대 초반에,

한창 감수성이 예민해서 뭔가 세계에 대해서 질문하고

많은 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할 나이인데,

똑같은 공부만 하고 있으니까 안타깝죠.

 

p.324

단편이든 장편이든 대개는 기본적인 줄거리를 잡고 시작합니다.

캐릭터도 생각해둬야죠.

특히 단편 같은 경우는 응집된 힘 같은 게 필요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요.

자꾸 불필요한 것들이 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가 뭔지를,

그걸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 한 문장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돼요.

모든 문장을 쓸 때 그 한 문장을 떠올리면서 쓰면

구심력이 생겨 꽉 짜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키워드나 아니면

그 글을 창작하게 만든 최초의 씨앗 같은 거 있잖아요, 창작의 씨앗,

그런 걸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책상맡에 붙여놓고 쓰죠.

 

영문학을 전공한 소설가 김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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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기자와 김경욱 작가만 믿고 샀다 낚였다

같은 인문대생으로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긴 했지만 읽는 동안

장난해? 너희는 서울대잖아 뭐가 되도 되겠지

하는 자격지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

그런 것쯤이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다면

내가 환장하는 것

세상에서 가장 찬란하고 영롱한 "꿈"이라는 단어

그것을 찾아나선 스무살 청춘

청춘이 아니어도 좋다

꿈을 가진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나 또한 지쳐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굉장한 파이팅을 얻었다~!!!

 

김경욱 <동화처럼>

 

p.133

계단을 내려가더니 남자는 치즈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 왔다.

치즈 케이크는 차가웠다. 냉동실에 잠깐 넣어 두었다고 했다.

차가워서 더 맛있었다. 행복에도 맛이 있다면 여름이 익어 가는 밤, 

강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먹는 차가운 치즈 케이크 같은 것이리라.

와인이 바닥날 즈음 남자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이제 어둠은 완연해져서 하늘과 지상에 무더기의 빛이 돋아났다.

지상과 하늘은 거울인 양 납작해져 서로를 비추었다.

납작해진 지상과 하늘 사이로 흐르는 모든 것이

여름날의 꿈처럼 다정했다.

 

p.178

결혼 후의 일요일은 더 이상 에전의 일요일이 아니었다.

빛나던 연애 시절의 광휘는 돌돌 말린 양말을 펼 때 풀썩거리는

먼지 속에서 창백해졌다. 정리 정돈이 철저한 남자였지만

신던 양말을 공처럼 말아서 아무 데나 던져 놓는 버릇이 있었다.

다리가 달린 가구 밑은 다 들여다보아야 했다.

심지어 책상 서랍에서 나온 적도 있었다.

공처럼 돌돌 말린 것은 양말이 아니라 흘러가 버린 호시절,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의 황금기 같았다.

잔소리도 소용없었다.

 

p.211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명제는 마음의 밑바닥까지 캄캄해졌다.

체취보다 더 그리운 게 목소리였다.

양말 좀 말아 놓지 말라고 핀잔하던 목소리,

코 고는 소리 때문에 잘 수가 없다고 푸념하던 목소리,

축구 중계 좀 작작 보라고 잔소리하던 목소리.

그리고 아바의 노래를 멋지게 부르던 목소리.

여자와 헤어진 후 명제는 아바의 노래를 기피했고 축구를 끊었으며

코를 고지 않았다. 그리고 양말을 얌전히 벗어 놓았다.

 

p.292

의사는 말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거라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자의 마음속 아이.

네 개의 다른 별에 살던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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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되게 어렵게 구한 책인데 생각보다 별로였다

동화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해피엔딩의 사랑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오산!!

완전 리얼한 막장 드라마를 동화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

하여간 언제나 첫사랑이 문제!!

그런 의미에서 난 참 다행이다 읭? ㅋㅋ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p.7

셋은 좋은 숫자이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 이 어리석은 은유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

둘이라는 숫자는 불안하다.

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첫 선택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거나

기껏 잘해봤자 덜 나쁜 것을 선택한 정도가 되어버린다.

셋 정도면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일이 잘 안 될 때를 대비할 수가 있다.

가능성이 셋이면 그 일의 무게도 셋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다.

진지한 환상에서도 벗어나게 되며, 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체중을 양다리에 나눠 싣고 아랫배로도 좀 덜어왔으므로

몸가짐이 가뿐하고 균형 잡기가 쉽다.

혹 넘어지더라도 덜 다칠 게 틀림없다.

실제로도 내게는 언제나 세번째 선택이란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애인이 셋 정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p.24

나는 동생의 첫사랑을 애인으로 삼은 데 대해

죄의식을 자청하지는 않는다.

그애의 첫돌 때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두 가지 선물을 샀다.

애리에게 준 것은 금팔찌였다. 착한 언니가 되어달라는 뜻으로

내 몫으로는 오십 권짜리 문학 전집이 주어졌다.

애리는 때때로 팔을 한번 흔들어 부모를 즐겁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는동안 나는 아주 많은 시간 혼자 책을 읽어야만 했다.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점점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란 걸 깨치게 되었다.

마치 서로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심상하게 얽혀 짜여져 있지만,

이 삶 속에서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p.41

나는 이 퀴퀴한 낯선 방에서 무방비하게 알몸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다. 오늘밤과 같은 용도에서 볼 때

호텔과 여관의 차이는 단 한 가지, 청소 상태이다.

똑같이 정당하지 못한 섹스가 지나간 곳인데도,

호텔은 누군가가 스쳐갔던 흔적을 깨끗이 청소하고

짐짓 새것처럼 만들어놓는 데 비해 여관은 그렇지 못하다.

이 장소에서 이루어졌던 타인들의 섹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장소가 지저분하다는 것은 섹스 자체를 지저분하게 여기도록

강요하는 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되기 위해 이 장소에 도착한 자신까지도 말이다.

 

p.91

비가 억세게 퍼붓고 있다.

눈앞이 부옆다. 나는 잠시 계단 난간에 기대 서 있다.

주차장까지 닿기도 전에 흠뻑 젖어버릴 장대비이다.

그 아이를 감기에 걸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져서인지 길에 지나는 사람도 없다.

나는 그대로 빗줄기만 본다

비는 땅에게는 생명이고 소녀에게는 그리움이나 약속이고

우산 장수와 나막신 장수의 어머니에게는 인생의 모순된 단면이며

조종사에게는 결항이고 떠나려는 사람에게는 미련,

젖은 빨랫대에게는 노동의 전조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차단기이다.

나는 현석의 뒷모습조차 보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비뿐이다.

 

p.125

윤선의 두번째 외박은 조금 더 쉬웠다.

세번째는 죄책감도 별로 들지 않았다. 거짓말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던 사랑의 확인 작업에도 익숙해져갔다.

이제는 술집에서 그의 팔이나 다리를 쳐다보고 있으려면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일도 있었다.

금기를 깨는 일에 두번째, 세번째라는 말은 없다.

'맨 처음'과 '그 다음부터'가 있을 뿐이다.

외도의 경험이 딱 한 번 있다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다.

한 번도 없거나 많거나이다. 두번째부터는 다 똑같다.

순결이란 그런 것이다.

조금씩 더렵혀지는 게 아니라 단 한 번에 찢겨나간다.

 

p.128

사랑에 있어, 사려깊은 불안이나 비탄보다

철없이 행복을 먼저 취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윤선의 능력이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에 사랑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 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p.164

결혼한 남자를 만났던 경험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결혼한 남자들이 여자를 만나는 것은 일상이 권태롭거나

나이 들어가는 일이 쓸쓸하거나 혹은

자신이 인생을 너무 좁게 사는 것이 아닌가 돌이켜볼 만큼

호기심이 남아 있는 경우일 것이다.

나의 상대는 그 셋 모두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아내라는 익숙한 환경에 편안해하면서도

새로운 것의 흥분을 원하는 것 자체가

어차피 제한적이고 상투적인 감정이었다.

그러므로 오래 갈 일은 못 되었다.

나는 그와 지극히 한시적인 연정을 나누었다.

그를 만나는 동안 가장 불편했던 것은

가족과 가정 안에서의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내가 고른 스킨 로션의 향이 배어 있는 그의 얼굴,

아내가 빨래를 한 그의 양말, 아내가 만든 음식으로 채워진 그의 위장,

전날 밤 아내가 받아 걸었을 양복 저고리.....

그의 입에서는 아내와 함께 쓰는 치약의 냄새가 났다.

언젠가는 아내와 같은 이불에서 빠져나온 그의 머리카락 속에

오리깃털 하나가 묻어 있었다.

그에게서 나는 아내가 슈퍼에 가서 치약을 고르거나

그의 양말을 세탁기에 넣는 모습,

베란다에 나가 그들이 함께 덮었던 이불을 터는 모습 등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짧은 손톱을 보면

아내가 서랍 안에서 찾아다가 건네주었을 손톱깎이가 생각났고

그가 신문기사를 화제로 삼으면

아내가 현관에서 신문을 찾아다가 그에게 건네주는 모습이 떠올랐다.

전화가 왔었다고 하면 아내가 먼저 전화를 받아서

'잠깐 기다리세요' 한 다음 그에게 송화기를 넘겨주는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다. 휴일이 되어 유원지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그 속에서 그의 가족을 찾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적도 있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저 남자를 기다리느라고

연신 시계를 쳐다보고 있을 여자를 의식하여

덩달아 시계를 흘깃거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p.173

그를 유혹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에서는

나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필요했다.

즉 내가 남자에게 개방적인 여자라는 것과

아무에게나 개방적이지는 않다는 것.

나는 여러 남자친구 얘기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아

내가 부담 없는 상대임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진정 이해받을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의

근원적 고독을 드러냄으로써 허점을 보이고 곁을 내놓는 한편

간간이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은 도덕적 규범에 대해 탄식하기도 했다.

현석이 자세를 바꿔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를 유혹하는 두번째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당신은 내게 특별한 존재예요' 하는 암시이다.

지적인 남자는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당연하고 옳은 말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말만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반드시 칭찬을 하되 상투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논리에 어긋나도 상관없다. 남과 달라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살아오는 동안 그가 너무나 많이 들었을 용모에 대한 호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오직 지성에 대한 감탄만을 늘어놓은 것은

내가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이었다.

물려받은 아름다운 용모는 기정 사실이라 치고,

제 스스로 도달한 지성에 대해 더 많은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은

지적인 남자의 당연한 허영심이었다.

여러 가지 인문적 교양을 동원하여 그의 고상한 화제에 성심껏 응하면서도

나는 속으로는 언제쯤 취해버린 척하며

그로부터 남자로서의 행동을 유발할 수 있을까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를 유혹하는 세번째 단계는

'내가 저 여자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하는 자기 암시이다.

그 암시를 스스로도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려면 손을 잡는다거나

포옹한다거나 하는 가시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p.221

독신이란 자기 자신의 행동이나 노동을 일일이 의식하며 사는 일이다.

시든 꽃은 내가 버리지 않는 한 언제까지 곷병 속에서 썩어가고,

머그잔 바닥의 커피 찌꺼기도 내가 컵을 씻기 전에는

계속해서 그대로 말라붙어간다.

깨진 컵의 유리 조각도 나 아니면 처음 위치에 한없이 엎드려 있다.

신문 역시 내 손으로 들여다놓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현관에 버려져

쓸모없는 폐지가 되어간다. 어떤 순간 그런 것에 염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목록이라도 만들듯

일일이 의식하게 만드는 공간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동반할 존재라는 것이

귀찮고 벅차게 느껴져 화분 하나조차 두기가 싫어지는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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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아주 힘들게 구한 책

한국 소설 읽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ㅠ8ㅠ

환경이 좋지 않으니 작품 하나하나가 더욱 간절하다

읽으면서는 몰랐는데 이 책은 내가 한때 최고로 꼽았던 소설

은희경 <새의 선물>의 후속편

주인공 강진희의 사랑에 대한 냉소와 개똥철학 말투는 하나도 안 변했다

은희경은 거의 모든 글을 잘 쓰지만

특히 사랑과 섹스에 대한 서술을 읽을 때면 정말이지 흥분된다

아 나도 이렇게 섹시하게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