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길리언 플린의 작품입니다.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란 뜻입니다.
읽는 내내 뇌나 마음 어딘가가 계속 후벼 파이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 읽고 난 후에는 먹먹해지거나, 긴 후유증을 겪어야 하고,
그녀의 작품과 궁합이 안 맞는 분들은 소화불량 같은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목이 ‘몸을 긋는 소녀’입니다.
말 그대로 이 작품의 주인공 카밀 프리커는 커터(cutter)입니다.
자신의 몸을 칼이나 가시 같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긋고 베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카밀은 단순히 긋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수많은 단어들을 칼끝으로 새겨 넣습니다.
그녀가 13살에 처음 자신의 음부 근처에 새긴 단어는 ‘사악한’이었고,
그 후로 ‘해로운’, ‘메스꺼운’, ‘분노’, ‘음경’ 등 다채로운 단어들이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29살에 이르러 ‘사라지다’를 끝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녀의 커터로서의 활동은 종료됩니다.
이야기의 주요 공간은 시카고에서 1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으며
고작 2,000 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미주리 주 최남단의 후미진 도시 윈드 갭입니다.
13살의 카밀이 동생 메리언을 잃었던 곳이고, 처음으로 자신의 몸에 난도질을 한 곳이며,
같은 해, 4명의 남자와 ‘한꺼번에’ 첫 경험을 치른 곳입니다.
카밀에 따르면 ‘너무도 숨 막히고 작은 마을, 싫어하는 사람과 매일 맞닥뜨리는 마을’입니다.
카밀 프리커는 ‘나를 찾아줘’에서 일기장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에이미,
‘다크 플레이스’에서 온 가족이 몰살된 가운데 혼자 살아남은 리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의 고향 윈드 갭은 ‘다크 플레이스’에 등장했던 캔자스의 후미진 마을을 연상시킵니다.
길리언 플린 스스로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면
이 일관된 ‘고통스러운’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철저히 고립시키며 외로움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탐구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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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의 만년 꼴찌 일간지 ‘데일리 포스트’의 여기자 카밀 프리커가 윈드 갭에 파견됩니다.
지난 해 여름, 9살 소녀 앤이 교살된 채 발견된 이후 1년 만에 또다시 10살 소녀가 실종되자
선정적인 대박 기사를 기대한 데스크가 마침 그곳이 고향인 카밀을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카밀에게 있어 윈드 갭은 고통스러운 기억만 남은 곳이었고,
그 고통의 주된 진앙지는 어머니 아도라를 비롯한 가족들이었습니다.
8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카밀은 사랑한 적도, 사랑받은 적도 없는 어머니 아도라의 냉기와
16년이 지나도록 고스란히 보존된 죽은 여동생 메리언의 방이 내뿜는 서글픔,
그리고 또다른 여동생 13살 앰마의 극단적인 행동들 – 영리하거나 광기 어리거나 – 속에
캔자스시티에서 파견된 리처드 윌리스 형사의 도움을 받아 취재에 나섭니다.
한편, 실종됐던 내털리 킨마저 사체로 발견되는데,
1년 전에 피살된 앤과 마찬가지로 내털리 역시 이빨이 모두 뽑힌 상태입니다.
외부인의 소행인지, 윈드 갭 사람의 소행인지, 또 범행 동기조차 모호할 따름입니다.
카밀의 취재는 벽에 부딪히고, 시카고로 전송되는 기사는 스스로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윈드 갭의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대부분의 주민이 생업으로 몸담고 있는 돼지농장의 주인이자 윈드 갭의 ‘여왕’인 아도라는
딸 카밀의 취재를 못마땅해 하거나 심지어 중지시키기도 합니다.
캔자스시티의 형사 리처드와 일부 주민들이 죽은 내털리의 오빠를 용의자로 지목한 가운데,
카밀은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사건의 진상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끔찍한 일이어서 제정신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문제는, 카밀이 발견한 것은 윈드 갭에서 벌어진 비극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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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녀들을 참혹하게 죽인 뒤 이빨을 모두 뽑아간 범인을 쫓는 이야기를 전면에 세웠지만,
길리언 플린이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여자들,
그리고 3대에 걸친 모녀간의 애증이 불러온 비극’입니다.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등 뒤 한복판을 제외하고 온몸을 칼끝으로 난도질한 카밀,
섹스와 마약을 즐기며 “나도 살해당하고 싶어. 그럼 모두가 날 사랑할 테니까.”라는 앰마,
그리고 자신이 낳은 딸 카밀에게 “난 너를 사랑해본 적 없어”라고 말하는 아도라 등
3대의 자해와 애증은 극단적인 양상을 띤 채 거침없이 전개됩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설정 가운데 하나가 뮌하우젠 증후군이라는 것인데,
이는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자신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또 MBP(대리인에 의한 뮌하우젠 증후군, Munchausen by Proxy)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거꾸로 자신의 애정과 헌신을 강조하기 위해 타인을 아프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3대에 걸친 모녀의 애증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거나, 상대방을 아프게 하면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자아내는 깊고 질긴 뿌리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미스터리와 모녀 3대의 비극의 조합이 매끄러운 황금비율로 이뤄진 것만은 아닙니다.
‘몸을 긋는 소녀’는 ‘나를 찾아줘’나 ‘다크 플레이스’보다 앞선 길리언 플린의 데뷔작입니다.
CWA 스틸 대거상과 뉴 블러드 대거상을 동시 수상하는 등 화려한 이력을 지녔지만,
앞서 읽은 작품들에 비해 조금은 거칠고 관념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행동과 그것의 동기’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상심리가 낳은 ‘비정상적인 행동’이란 무차별 연쇄살인, 쾌락을 느끼는 폭력,
장기 적출과 시간(屍姦) 등 불가능한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무궁무진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상황’, 즉, 카밀이 자신의 몸을 긋게 된 동기와 그 행동양식,
앰마가 폭력적인 괴물과 고분고분한 딸(또는 동생)이라는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
아도라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유전처럼 물려받은 냉기 어린 엄격함과 비뚤어진 애정 등은
오히려 소시오패스의 심리보다 더 공감하기 어려운 행동과 동기들입니다.
또한 조연들 중에서도 각각 9살과 10살에 잔인하게 살해된 앤과 내털리는
살아있을 때 이웃집의 새를 찔러 죽이거나 동급생의 눈을 가위로 찌른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앰마가 이끄는 금발 패거리 3인방은 내털리의 장례식장에서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거리에 설치된 그녀의 추모비를 훼손하거나 추모 물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둑질합니다.
거칠다고 느껴진 이유는 이런 부분에 대한 묘사들이 집요할 정도로 깊고 끈질기게,
또, 과격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이라고 느껴진 이유는 ‘내 이웃에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라는 사실감을 느끼기엔
캐릭터들의 감정이나 행동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멀리 나갔거나
때론 추상적이라고 느낄 만큼 그 형체가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읽은 ‘나를 찾아줘’와 ‘다크 플레이스’와 마찬가지로 ‘몸을 긋는 소녀’ 역시
적잖은 무게감과 감당하기 쉽지 않은 후유증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카밀과 그녀의 가족들이 겪은 비극이 그저 픽션에서만 존재하기를 바랄 정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은 꽤 크고 무겁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길리언 플린의 매력은 이런 지점에서 폭발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며, 독자들은 고통스러운 책읽기가 될 것을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그녀의 작품을 읽기 위해 뛰어들 것이 분명합니다.
새삼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한 줄짜리 프롤로그가 생각납니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지만, 다 읽고 난 후 다시 한 번 그 한 줄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서늘하거나 한없이 애틋할 따름이었습니다.
“예쁜 여자아이는 잘만 행동하면 어떤 곤경도 피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