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들어진 액션 스릴러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책읽기였습니다.

같은 스웨덴 작가인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와 비교한 홍보 카피를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 작품을 Best of Best로 꼽는지라 솔직한 느낌은 거기엔 못 미친다는 것이지만,

이야기의 스케일이나 등장하는 캐릭터, 쉴 새 없는 사건과 반전들은

가히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제작자들이 탐낼 만한 높은 완성도와 대중성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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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아들을 둔 평범한 주부 간호사 소피는

자신이 담당하던 환자인 스페인 갱단의 중간보스 엑토르 구스만에게 호감을 가진 덕분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경찰과 갱, 갱과 갱 사이의 전쟁에 휘말립니다.

구스만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피와 갱단의 관계 역시 깊어지고,

구닐라가 이끄는 경찰은 구스만의 범죄 증거를 잡기 위해 그의 연인이 된 소피를 이용합니다.

그 무렵 구스만 파는 마약 운송루트 확보를 놓고 독일의 한케 파와 대치중이었는데,

소피의 첫사랑이자 무기밀매상인 옌스가 그들의 전쟁에 말려들면서 소피와 재회하게 됩니다.

 

갱들의 전쟁은 한 치의 관용도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게 벌어지고,

구닐라를 비롯한 경찰의 수사는 미행, 도청, 살인 등 초법적인 행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소피는 ‘범죄자 구스만’과 ‘연인 구스만’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지만

경찰과 갱들이 얽힌 전쟁의 여파가 아들에게 미치자 선악의 경계를 넘어 분노에 휩싸입니다.

모든 관련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레스토랑에서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지고

소피는 옌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향한 위협은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은 극단으로 치닫고,

비밀이 폭로되고 배신이 난무하면서 희생자는 산처럼 쌓여갈 뿐입니다.

갱들은 갱들대로, 경찰은 경찰대로 내부의 적을 향한 살상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모두의 표적이 된 소피는 이미 평범한 간호사로서의 삶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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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등장인물 중 평범하거나 선하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소피와 그녀의 아들을 포함한 가족들뿐입니다.

구스만과 한케의 갱단은 말할 것도 없고 구닐라가 이끄는 경찰들까지도

탐욕스러운 것은 물론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점에서는 정확히 닮은꼴입니다.

심지어 소피의 첫사랑이자 그녀를 곁에서 지켜주는 옌스마저도

살인마까지는 아니더라도 불법적인 무기밀매상입니다.

이런 캐릭터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 보니 피와 살이 난무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권을 놓고 암살, 협박 등 다양한 폭력을 주고받는 갱들의 대결도 스릴 넘치지만,

개인적으로는 구닐라가 이끄는 경찰 팀의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녀의 팀은 스웨덴 국립범죄센터에서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은 특이한 조직인데,

재미있는 것은 팀원의 면면을 보면 어딘가 한군데 이상 나사가 풀린 듯한 인상들입니다.

경력이라곤 12년의 순경 활동이 전부인 불안증 환자 라르스 빙에,

현장 증거물인 돈 봉투를 슬쩍 했다가 비밀경찰에서 쫓겨난 안데르스,

반복된 과잉대응으로 신속대응팀에서 공항 경비로 좌천된 인종차별주의자 하세,

구닐라의 동생이자 모든 성인병을 끌어안고 있는 살덩어리 패스트푸드 중독자 에리크 등

전혀 국립범죄센터와 어울리지도,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팀원으로도 보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한 순간 사이코패스로 변신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해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시한폭탄 같은 인격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내부적인 균열과 갈등이 상존하게 되고,

기어이 우려했던 시한폭탄이 후반부에 이르러 연이어 터지면서

갱들의 이야기보다 더 긴장감 있고 스릴 넘치는 재미와 반전을 전해줍니다.

 

예전에 돈 윈슬로의 ‘개의 힘’을 읽다가 1권에서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 월드’에서 그 해 Top3로 꼽힐 정도였고,

‘악명 높은 연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모자라지 않을 만큼 폭력적이었으며,

스릴 넘치는 서사들로 가득했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빗발치는 총알과 난무하는 죽음만 있을 뿐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서평 중 일부를 인용하면,

 

멕시코를 무대로 한 장대한 마약전쟁은 보이는데,

그 안에서 희노애락을 겪는 개인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캐릭터라기보다는 인형 같다는 느낌? 서사에 묻혀버린 인물들이랄까?

 

‘악명 높은 연인’ 역시 ‘개의 힘’처럼 읽기보다 보는 것이 어울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작가 알렉산데르 쇠데르베리는 그 안에서 개인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평범한 주부이자 간호사인 소피 브링크만은 주인공으로서의 캐릭터의 힘은 약하지만

독자로부터 ‘그녀는 살아야 돼!’라는 강력한 동정과 공감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분량이나 역할에 있어 소피의 연인 옌스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라르스 빙에는

경찰임에도 경찰 같지 않은, 그리고 감정이나 행동의 진폭이 굉장한 캐릭터입니다.

옌스는 소피의 연인이라는 막중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큰 기억을 남기지 못 했는데,

적당한 폭력성을 지닌 무기밀매상이면서도 다정다감한 훈남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어

이어지는 2,3부에서는 소피를 돕는 적잖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 외에 다수의 조연들 역시 살아있는 캐릭터의 느낌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북유럽 스릴러를 대표하는 ‘밀레니엄 시리즈’가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스케일과 액션이 사실감 있는 캐릭터들과 잘 조화됐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해결되는가, 도 중요하겠지만,

등장인물들이 독자들로부터 공감과 이입을 얻어낼 수 없다면

보고나면 금세 잊히는 평범한 오락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악명 높은 연인’은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겸비한 수작이었고,

또한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첫 편으로서 괜찮은 출발을 한 느낌입니다.

앞서 주인공으로서 소피의 캐릭터의 힘이 약하다고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여자 소피 브링크만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폭력과 악의 연결고리 속으로 발을 담그는 과정’이라는 시리즈 첫 편으로서의 임무는

무난하게 완수한 것으로 보입니다.

 

후반부에 남겨진 ‘예고’대로라면 엑토르 구스만으로부터 ‘대리권’을 부여받은 소피가

새로운 전쟁에 임하는 과정에서 수동적이거나 끌려 다니는 캐릭터가 아니라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또 어떤 형태로든 실제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를 것으로 보입니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리스베트처럼 그 자체가 살상무기인 캐릭터까지 진화하진 않겠지만,

레네 코베르뵐과 아그네테 프리스가 만들어낸 같은 주부 간호사 캐릭터인 니나 보르에 비해

확실히 ‘과격한’ 캐릭터가 될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소피 브링크만의 두 번째 이야기와 그녀의 변신을 기대해봅니다.

오리하라 이치가 펼쳐놓은 트릭의 향연을 마음껏 맛볼 수 있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낡고 퇴락한 4층짜리 연립주택에 그랜드맨션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놓은 것부터

오리하라 이치의 ‘삐딱한 비틀기’의 전조가 몽실몽실 느껴집니다.

모두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랜드맨션에 거주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각각의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아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거주하는 공간만큼이나 등장인물 역시 전혀 ‘그랜드’하지 않은 캐릭터들로 이뤄져 있는데,

이런저런 사연으로 홀로 사는 독거노인, 아내에게 이혼 선고를 들은 중년의 실직자,

맨션에서 쫓겨나기 직전의 미스터리 마니아, 성질 괴팍한 관리인, 불법 거주자, 사기꾼 등

사회적 약자 또는 음습하거나 의심스러운 인물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함께 산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얼굴이나 이름조차 모른 채 지내고,

겉으로는 웃으며 인사를 나눠도 뒤돌아서는 흉보고, 의심하고, 증오하며 살아갑니다.

또한 층간 소음, 불법 침입, 절도, 살인, 전화사기, 스토킹 등 온갖 종류의 범죄가 난무하며,

오래된 4층짜리 연립주택을 한시도 바람 잘 날 없게 만듭니다.

 

오리하라 이치는 7편의 작품을 통해 시간에 관한 트릭(선의의 제삼자),

공간에 관한 트릭(304호 여자), 또 시공간을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트릭(마음의 여로, 리셋) 등

다양한 서술트릭의 만찬을 선보입니다.

그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로서, 그리고 트릭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전의(?)로 가득찬 독자로서

한 줄 한 줄 대수롭게 넘겨선 안 되며, 특히 별 것 아닌 것처럼 툭툭 던져지는 단서를

헛되이 지나쳐선 안 된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결국엔 번번이 그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후반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보면서 오리하라 이치의 서술트릭에 ‘대처’하기 위한

너무도 쉽고 평이한 상식을 또다시 간과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각 단편에서 누누이 서술되는 글을 특별히 잘 기억해두길 바란다.

작가가 반복하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와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잠깐만 주의를 게을리 하면

작가가 곳곳에 놓은 덫에 걸려 허우적대다 자신의 무릎을 치는 수밖에 없다.”

 

매번 마지막 장에 이르러 ‘아, 그거였구나’라고 뒷북을 치는 것이 서술트릭을 읽는 재미지만,

나름 한두 편 정도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작가를 앞서가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설정한 트릭을 전부 알아맞히면서 작품을 읽는다면 그 또한 재미없는 일이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선의의 제삼자’, ‘마음의 여로’, ‘리셋’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공간을 마음껏 주무르며 사방에 흩어진 트릭들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고,

단순히 트릭에 그치지 않고 잔잔하거나 애틋한 여운을 남긴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단편들로 구성된 탓도 있지만, 오리하라 이치의 트릭에 빠져든 채 허우적대다 보면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를 정도로 가독성이 높고 단편으로서의 미덕이 잘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일부 인물들을 계속 활용한다면 ‘그랜드맨션 2관’이라는 후속작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은데

제 바람대로 돼줄 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2005년에서 2009년 사이에 발표된 단편들이 실린 미쓰다 신조의 첫 호러 단편집입니다.

그의 ‘작가 시리즈’보다는 ‘도조 겐야 시리즈’에 더 열광했던 터라 기대감이 무척 컸는데,

결과부터 말하면, 기대 대비 만족감은 조금 떨어졌고, 별도 4개에서 그치고 말았습니다.

수록작 중 여러 편이 딱 떨어지는 미스터리 식 엔딩이 아니라

말 그대로 괴담에 어울리는 오픈된 결말로 마무리됐다는 점,

그래서 마지막 줄을 읽고 나서도 ‘아, 끝났군’이라는 깔끔한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좀 찜찜한 구석이 남곤 했다는 점도 이런저런 아쉬움을 남긴 큰 이유였습니다.

물론 이런 아쉬움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호러물을 대하는 개인적인 태도와 취향의 탓 때문이었습니다.

 

표제작 ‘붉은 눈’을 비롯 8편이 실려 있고,

부록처럼 4편의 엽편 호러가 중간중간 삽입된 구성입니다.

호감도 순으로 뽑으면 ‘붉은 눈’, ‘죽음이 으뜸이다’, ‘맞거울의 지옥’입니다.

‘붉은 눈’과 ‘죽음이 으뜸이다’는 각각 첫 수록작, 마지막 수록작인데

같은 등장인물 – 두 눈의 홍채 색깔이 다른 여학생 – 을 등장시켜 연작 같은 재미를 줬고,

‘죽음이 으뜸이다’와 ‘맞거울의 지옥’은 이야기 자체도 호러의 장점을 잘 살린데다

비교적 선명하고 깔끔한 미스터리 식 엔딩 덕분에 개운하게 읽힌 느낌이었습니다.

 

일본의 괴담들 가운데 상당수가 ‘학교’, ‘폐가’, ‘저택’ 등

집이나 건축물 자체를 공포심과 괴이감을 자아내는 공간으로 사용하는데,

‘붉은 눈’에 수록된 작품들 역시 대부분 독특한 공간을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한쪽으로 기운 채 다 쓰러져가는 폐가 (붉은 눈),

5년 전의 화재의 잔재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저택 (괴기 사진 작가),

벼랑 끝에 선 채 마치 거리를 내려다보듯 서있는 서양식 저택 (내려다보는 집),

늪 앞에 출입구가 있어 늪을 밟아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물 (한밤중의 전화) 등

실제로 그 앞에 홀로 불빛도 없이 서있게 된다면

순식간에 온 몸을 얼어붙게 만들 만한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이

미쓰다 신조 특유의 ‘축축하고 음습한’ 묘사로 인해 더욱 소름 돋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도 꿈이나 거울, 착시를 통해 목격하는 끔찍하거나 기이한 환상,

애너그램을 이용한 수수께끼 같은 캐릭터 꾸미기,

곧 죽을 자의 신상을 꿰뚫어보는 초능력 등 다채로운 아이템 덕분에

8편의 수록작 모두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정말 무서운 괴담을 기대한 독자들, 특히 ‘작자미상’이나 ‘도조 겐야 시리즈’를 읽으면서

괜히 움찔했던 경험을 다시 한 번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찌 보면 읽는 즉시 무섭다, 괴이하다, 라는 느낌을 준다기보다는

자려고 이불 속에 누웠을 때, 슬며시 기억 속에 떠올라 괜히 화장실 가기가 꺼려지는 듯한,

일종의 은밀한 후유증을 자아내는 괴담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이런 종류의 괴담이 더 파괴력이 깊을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만...^^

 

올 여름 들어 유독 호러물이나 공포물, 괴담류를 많이 접하게 됐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인적인 취향 상 미스터리와 결합된 호러물을 좋아하다 보니,

‘수집된 괴담 들려주기’ 식의 이야기는 저와는 코드가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배경을 이용하든, 도시 괴담류의 현대적 배경을 이용하든

미쓰다 신조의 ‘글빨’은 어떤 식으로든 독자를 흡입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부록으로 실린 평론가의 해설 가운데 “무시무시한 최상의 작품집”이라든지

“역대 공포소설집 중에서도 최상위”라는 표현은 조금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지금껏 출간된 그리고 앞으로 출간될 미쓰다 신조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통행증”이란 표현은

이 단편집의 미덕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적절한 문구라고 생각됩니다.

그를 좋아하는 독자 또는 미쓰다 신조를 처음 시작하려는 독자라면

한번쯤 (너무 큰 기대는 접어두고) 읽어보기를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