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상세한 줄거리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서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입니다.

현학적인 것 같기도, 염세적인 것 같기도, 문학적인 것 같기도,

또는 마땅한 제목이 없어 궁금증을 유발하는 듯한 모호한 구절로 위장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목만큼이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뛰어난 천재이거나 딴 세상의 4차원적 존재임에 분명한 우타노 쇼고가

또 한 번 자신만의 재능을 ‘과시’한 작품이 ‘세상의 끝, 혹은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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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서 누군가의 아들, 딸이 유괴를 당하든 말든,

유괴당한 아이들이 심장과 머리에 총을 맞아 죽든 말든,

누군가 옆집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육두문자 낙서질을 하든 말든,

심지어 핵폭탄이 일본 열도에 또다시 떨어지든 말든,

내 가족, 내 집만 다치지 않는다면 알 바 아니라는 마흔 살의 남자 도가시 오사무.

 

스스로 이기주의자임을 자인하면서도 그것이 행복을 위한 올바른 삶의 태도라 믿던 그에게

어느 날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던 날벼락이 떨어집니다.

사춘기를 겪곤 있지만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는 6학년 아들 유스케가

최근 벌어진 네 건의 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들의 방에서 명백한 범행의 증거는 물론 아이들을 죽일 때 사용한 권총까지 발견합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인 상태에서 도가시는

아들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스케의 범행 사실은 확고해질 뿐입니다.

도가시는 유스케를 무죄로 만들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앞으로 벌어질 지옥 같은 상황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자신이 바라는 결말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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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노 쇼고다운 구성과 이야기 전개가 눈에 띄는 작품입니다.

대략 1/3쯤 지난 어느 지점에선가, “어? 뭐지?”라는 반문과 함께 위화감이 고개를 쳐듭니다.

앞서 읽은 이야기와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상황들이 전개되고,

시간적 배경은 제 멋대로 뒤틀려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잠시 후, 위화감의 정체가 우타노 쇼고의 교묘한(?) 서술에서 비롯됐음을,

또, 알고 보면 별 것 아닌데, 한순간 말려들고만 한심한 독자의 한계를 동시에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극단적인 상황이나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모든 수단 -

설령 그것이 터무니없거나 100% 불가능한 수단이더라도 – 을 상상하기 마련입니다.

한없이 이기적인 도가시 오사무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아들 유스케가 저지른 끔찍한 범행을 확인하곤 극과 극을 달리는 상상에 휩싸입니다.

 

우선, 유스케의 범행이 발각됨에 따라 자신의 가족이 파탄 나는 것은 물론

매스컴과 여론에게 뭇매를 맞다가 기어이 막내딸 나호가 보복 납치되는 악몽까지 떠오릅니다.

생각만 해도 지옥도가 따로 없는 지경입니다.

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범행을 자백하는 유스케,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유스케,

왜 바퀴벌레는 죽여도 되면서 사람은 죽여선 안 되냐고 되묻는 유스케가 차례로 떠오릅니다.

무엇이 유스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잠시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도가시 오사무는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을 생갹해냅니다.

모두 함께 죽거나, 아니면 유스케를 희생해서라도 자신과 아내, 딸은 살아남거나..

 

우타노 쇼고는 ‘참혹한 현실’과 ‘일그러진 도가시 오사무의 상상’이라는 두 이야기 덩어리를

교묘하게 또는 모호하게 경계 지음으로써 독자들에게 혼란과 호기심을 동시에 던집니다.

물론 특정한 기호를 통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친절히 알려주긴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 새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다시 모호해집니다.

현명한 독자라면 금세 그리고 똑부러지게 그 경계를 눈치 챘겠지만,

우타노 쇼고의 서술의 매력은 약간의 ‘아둔함’을 겸비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에,

스스로를 한심한 독자라고 여기긴 했어도

그 덕분에 이 작품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고 자위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도가시 오사무가 자신의 이기심을 극한치까지 끌어올려

유스케는 물론 아내와 딸까지 희생양 삼아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상상에 이르러서는

심플하긴 해도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 트릭까지 제공하고 있어

초반에 느꼈던 위화감과 약간의 불쾌함(?)을 깨끗이 잊을 수 있었습니다.

 

다만, 어딘가 계몽적인 냄새까지 살짝 풍기는 ‘열린 결말’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일부러 찾아본 여러 서평들 가운데 결말에 대한 호불호를 언급한 경우가 꽤 많았는데,

대체로 ‘무책임하다’는 의견과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의견으로 갈렸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입장 모두 일정부분 동감할 수 있었지만,

‘판도라의 상자’라는 신화까지 인용해가면서 뜬금없이 희망에 대해 논한 부분이나,

마치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도가시 오사무를 묘사한 점,

또, 현학적이거나 계몽적이거나, 심지어 두루뭉술해 보이기까지 하는 마무리를 앞세워

선명한 결론을 회피한 것처럼 보인 점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도가시 오사무의 ‘변치 않는 이기심’에 대한 풍자나 비난도 아니고,

그의 ‘고뇌에 찬 결정’ - 결정의 내용 자체도 잘 모르겠지만 - 에 대한 찬사도 아닌,

어정쩡한 양비론처럼 보이기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마무리는 좀 아쉬웠지만,

전반적으로는 우타노 쇼고의 필력을 맛볼 수 있는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읽고 ‘이게 뭐야?’라고 반문할 독자들도 분명 있겠지만,

또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작품마다 편차가 좀 있는 작가임은 분명하지만,

더구나 그의 대표작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혹평했던 입장이지만,

정형의 틀을 깬 독특함과 혼란스러움 속에 숨어있는 색다른 재미를 원한다면

가끔 간식처럼 우타노 쇼고를 꺼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면 얼마든지 주식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요.^^

‘아오이 가든’으로부터 시작한 ‘편혜영 읽기’에 이어

비슷한 이유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한강의 작품을 출간순서대로 읽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한강 읽기’입니다.

한강의 첫 작품집 ‘여수의 사랑’은 1995년에 초판이 나왔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라면 작가가 조금씩 문장을 수정했다는 점(개정판 작가 후기 참조)과,

초판에는 있던 단편 ‘저녁 빛’이 빠져서 6편의 작품만 수록됐다는 점입니다.

 

비슷한 이유로 한강과 편혜영이라는 두 작가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불편한 이야기에 대한 끌림’입니다.

이문열의 진지함과 묵직함, 신경숙-은희경의 애틋하거나 비틀어진 사랑,

김영하의 발칙함과 도발, 윤대녕의 아스라한 서정성에 차례로 이끌렸던 기호가

왜 느닷없이 불편함 쪽으로 기울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변덕 외에는 딱히 댈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여수의 사랑’은 제목만으로도 눈길이 끌렸던 작품입니다.

일 때문에 짧은 출장으로 한번, 한때 빠졌던 바다낚시 때문에 두어 번 정도 가본 게 전부지만

여수는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판이 출간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야 직접 만난 ‘여수의 사랑’은

기대했던 대로(?) 무척이나 불편하고, 아프고, 뒤끝이 아린 작품이었습니다.

수록된 나머지 다섯 작품 역시 비슷한 정서와 모양새를 지녔고,

그래서인지 연달아 읽기가 부담스러워서 1주일에 한 편씩만 소화하기로 했습니다.

‘편혜영 읽기’의 첫 작품이었던 ‘아오이 가든’ 때와 똑같은 방식의 책읽기가 된 셈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와 살은 젊지만, 정신은 늙고 병들고 찌들어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년의 끔찍한 일들이 그들을 망가뜨렸지만

나이를 먹은 후 평범하게 살면서 겪게 된 치 떨리는 일들이 원인일 때도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아프거나 타인을 아프게 하거나,

어딘가에서(누군가로부터) 도망치거나 어딘가로 무작정 향하거나,

그러다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아니면 포기해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여섯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설정 중 하나는 가족의 상실입니다.

부모에 의해 기차에 버려진 자흔, 아버지와 여동생의 자살을 겪은 정선 (여수의 사랑),

아버지는 농약으로, 동생은 또래에게 맞아 죽었던 기억을 가진 인규 (질주),

과속 차량에게 임신 5개월의 아내를 잃고 자신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명환 (어둠의 사육제),

자신의 몫까지 우유 배달을 하다가 사고로 식물인간인 된 쌍둥이 동생을 둔 동걸 (야간열차),

부모의 폭력과 냉담함에 가출하면서 백치 여동생과 헤어져야 했던 정환과

아내와 아들이 가출하고 딸마저 심장병으로 떠난 뒤 저택에 홀로 남은 황씨 (진달래 능선),

사람 좋은 딴따라로 살다가 술에 취해 죽은 아버지를 둔 동식과 동영 형제 (붉은 닻) 등

하나같이 주인공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출발점을 가족의 상실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정신의 피폐함이 넘쳐흘러 기어이 몸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정선은 고질병인 위경련과 안두통 외에 치명적인 결벽증을 앓고 있고 (여수의 사랑),

동걸은 수시로 기차바퀴 소리가 들리는 이명에 시달리고 (야간열차),

정환은 가짜 약임에 분명한 위장약을 몇 봉씩 한꺼번에 복용하기도 하며 (진달래 능선),

동식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폭음과 폭연을 일삼다가 간 경변에 걸립니다. (붉은 닻)

 

그런가 하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또는 그동안 피해왔던 ‘어떤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구체적인,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인물들도 있는데,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고향 여수를 향해 밤기차를 탄 정선 (여수의 사랑),

식물인간이던 동생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야간열차를 타고 동해로 떠나는 동걸 (야간열차),

이를 악 문 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고 끝없이 달리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인규 (질주),

지금까지의 삶과는 반대로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게 살기로 결심한 영진 (어둠의 사육제),

그리고 자살을 통해 모든 것에게 종지부를 찍는 명환 (어둠의 사육제)이 그들입니다.

 

여섯 작품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입니다.

가장 극적인 상황들은 모두 밤에 벌어지는데,

밤기차 (여수의 사랑, 야간열차), 밤의 달리기 (질주), 밤의 투신자살 (어둠의 사육제),

밤의 나무 태우기 (진달래 능선), 그리고 밤의 외출 (붉은 닻)이 그것입니다.

밤과 새벽의 어둠은 인물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더욱 고립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포장합니다.

그래서인지 여섯 작품의 비주얼은 대체로 흑백 영화나 변색된 컬러에 가깝습니다.

밤기차의 전등, 밤거리의 가로등, 밤의 아파트 불빛, 밤에 불타는 나뭇가지,

그리고 오롯이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어둠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요소들로,

등장인물에 동화되고 이입된 독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서글픈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점심을 먹기 위해 거리로 나서 인파 속에 휩쓸렸을 때

문득 ‘이들 중에도 정선이나 자흔, 동걸, 인규 같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한두 가지 정도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기 마련이겠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힘든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기억들을 봉인한 채 무의식 속에 처박아 뒀을 수도 있습니다.

여섯 작품을 읽은 독자 가운데 주인공들의 삶을 지켜보며 치유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새삼 봉인해놓았던 오래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 다시 한 번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수의 사랑’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책읽기를 피해갈 수 없는 작품집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한번쯤 자신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게끔 해주는,

또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을 한발 더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가치가 충분한 작품집이기도 합니다.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10% 이상을 수로가 차지하고 있는 물의 도시 야나쿠라에 기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들이 얼마 후에 거짓말처럼 다시 돌아오는데,

그들은 사라진 기간 중의 기억이 전혀 없으며, 깊은 잠을 잔 듯한 느낌뿐이라고 진술합니다.

전직 교수 교이치로는 수로가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믿으며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문기자인 다카야스는 당사자와 가족들을 인터뷰하는 등 사건취재에 열을 올리지만,

주로 노년층인 당사자들은 별일 없이 돌아왔으니 소동 같은 건 원치 않는다고 답할 뿐입니다.

 

교이치로의 딸이자 교토에서 요정을 운영하는 아이코와

약간은 괴짜의 냄새가 나는 교이치로의 제자이자 음악 프로듀서 쓰카자키 다몬이 합세하면서

야나쿠라의 연쇄실종사건의 진실을 캐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됩니다.

다몬은 당사자들의 인터뷰 테이프에 녹음된 기이한 소리를 캐치해내고,

다카야스는 전임자의 일지에서 연쇄실종사건이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발생했음을 알게 됩니다.

교이치로는 야나쿠라의 역사에 해박한 인물을 통해 수로와 그에 얽힌 괴담을 듣게 됩니다.

 

이들은 야나쿠라 수로에 ‘그것’이 존재하고,

실종됐던 사람들은 ‘그것’에게 납치당한 채 무언가를 ‘도둑맞은’ 후 되돌아왔으며,

따라서 돌아온 사람들은 실종되기 전과는 어딘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던 중, 운명의 밤이 찾아오고 전승 괴담에 근거하여 방비책을 마련한 주인공들 외에

야나쿠라의 모든 사람이 감쪽같이 실종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 ● ●

 

온다 리쿠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첫 페이지를 넘기지만,

매번 얼마 못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느 시점에선가 나도 모르게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는 경계선을 넘어서게 된다는 점,

또 마치 꿈인 줄 알면서 그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듯한 자각을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녀의 몽환적인 묘사들에 홀려 어느 새 딴 세상으로 점프해버린 느낌이랄까요?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에 친숙해지거나 실제 그곳에 가있는 듯한 느낌은

어느 작가의 작품이든 인상 깊게 읽다 보면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온다 리쿠의 경우에는 그 몰입도가 좀 심할 정도로 나타나곤 하는데,

‘몽위’에서는 대규모 패닉현상과 실종이 벌어진 나라(奈良) 한복판에 던져진 느낌이었고,

‘Q&A’에서는 대참사가 벌어진 대형마트 주변에서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된듯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달의 뒷면’은 독자로 하여금 거대하고 거미줄 같이 늘어선 수로 속에 자리 잡은

신비한 물의 도시 야나쿠라에 오래 전부터 살아온 것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오래 전 전라남도 신안군의 섬 증도에 갔다가 광활한 갯벌과 그 사이로 난 수로를 보고

경이로움과 공포심이라는 대비되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달의 뒷면’에서도 ‘수로를 흐르는 검은 물’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 봤던 증도의 수로와 탁한 물빛은 사진으로 남겨야지, 하는 생각보다

저 탁한 물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기에 발을 담그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묘한 느낌을 먼저 건네주었습니다.

그 기억 때문인지 야나쿠라에 대한 묘사를 읽을 때마다 증도의 갯벌과 수로가 떠올라

더더욱 인상 깊게, 또 그곳에 실제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달의 뒷면’의 경우 다른 작품에 비해 상징이나 비유가 더 복잡하고 다채롭게 등장한 덕에

쉽고 빠른 책읽기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입니다.

물론 문장은 쉽고, 표현은 적확해서 금세 책장이 넘어가긴 하지만,

몇 페이지씩 후루룩 읽어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찬찬히 되읽은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수로와 거기에 접해있는 주택들, 그리고 꽃과 나무 등 주변 풍광에 관한 묘사는 물론

소품처럼 등장하는 책, 영화, 게임, 음식 등 어느 하나도 의미 없이 차용된 것이 없을 정도로

온다 리쿠는 사방에 독자들의 촉각을 곤두세울 장치들을 설정해놓았습니다.

 

인물들의 언행 역시 마찬가지여서 야나쿠라의 연쇄실종을 조사하는 네 명의 주인공들이

각자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거나 현재 상황을 고민하며 1인칭 시점에서 서술하는 문장들은

후반부에 이르러 그들의 선택과 행동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품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공포심으로 연쇄실종사건을 대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명백한 사건으로, 누군가는 괴담에 기반을 둔 존재론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다만, ‘다수 대 소수’, ‘개별적인 존재 대 하나의 의식 하에 묶이는 존재’의 대비 등

철학적인 뉘앙스까지 풍기는 온다 리쿠의 주제 의식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들입니다.

단순히 야나쿠라의 수로에 얽힌 괴담을 소개한 내용이라든가

유명한 일본의 괴물인 갓파를 소재로 한 기이한 이야기 정도라면 깊게 고민할 일이 없겠지만,

온다 리쿠는 수로에 존재하는 ‘그것’이 사람들을 ‘도둑질’ 한 후

기억 뿐 아니라 육체와 정체성까지 완전히 ‘물갈이’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의식 하에 묶이는 존재’로 탈바꿈 하는 이야기를 통해

괴담 이상의 존재론적 테마를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이 지점이 온다 리쿠만의 색깔을 빛나게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극단적인 낯섦과 혼란스러움의 원인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온다 리쿠라는 작가 자체에 대한 호불호는 물론

그녀의 팬이면서도 작품에 따라 호불호를 따지게 되는 특이한 현상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달의 뒷면’은 온다 리쿠의 대표적인 키워드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달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실제로는 앞면일 뿐이며, 그렇기에 그 뒷면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모르는 채 살아간다. 뒷면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테마는

‘몽위’나 ‘Q&A’외에도 온다 리쿠의 적잖은 작품에서 언급되는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입니다.

 

온다 리쿠의 작품을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잣대로 읽는 것은

그녀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세계관과 매력을 이해하기엔 적절치 않은 방법입니다.

특히 호러와 판타지를 넘어 SF적인 요소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달의 뒷면’ 같은 경우는

억지로 이해하려기보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달의 뒷면을 느긋하게 유람하겠다, 라는

가벼운 마음가짐의 책읽기가 더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온다 리쿠도 은근슬쩍 독자들에게 이런 태도를 원했던 것으로 보였는데,

착각일 수도 있고, 다분히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지만,

작품 속에서 실종됐던 한 여인의 대답을 통해 온다 리쿠의 그런 의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 설명 안 해도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