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의 늪에 빠져 흐느적대던 안락탐정 닷쿠와 다카치가

안락탐정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요한 탐문(?)과 뛰어난 추리를 통해

현장탐정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담은 ‘닷쿠&다카치’ 시리즈 3편입니다.

앞선 두 작품 ‘그녀가 죽은 밤’과 ‘맥주별장의 모험’도 무척 독특한 작품이었지만,

‘어린 양들의 성야’는 닷쿠와 다카치가 본격적인 현장탐정 캐릭터로서 변신했다는 점 외에도

꼬일대로 꼬인 구성과 사방에 묻힌 지뢰들, 그리고 반복되는 반전들 때문에

심플해 보이는 발단과는 전혀 다른,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전개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덕분에,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적 구성과 롤러코스터 식의 전개를 완벽하게 믹스하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특출한 재능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 돼줬습니다.

 

● ● ●

 

헨미 유스케, 일명 보안 선배는 닷쿠와 다카치에게 내용물을 알 수 없는 포장선물을 건네며

이 선물의 주인을 찾아 전달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것은 닷쿠와 다카치, 그리고 보안 선배가 처음 만났던 1년 전의 크리스마스 이브날,

닷쿠 일행 코앞에서 추락사한 가나에가 소지하고 있던 포장선물인데,

사고 당시 엉겁결에 보안 선배의 짐과 뒤섞인 바람에 그동안 보관해왔던 것입니다.

 

가나에의 유족, 가나에가 죽기 전 참석했던 파티의 주최자, 가나에의 약혼자와 전 남친 등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닷쿠와 다카치는 당시 자살로 결론 났던 가나에의 죽음에

뭔가 숨겨진 사연이 있음을 눈치 챕니다. 특히 다카치는 가나에의 아버지를 만난 후로

갑자기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그녀의 죽음의 동기를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닷쿠와 다카치는 가나에가 추락한 건물의 관리인을 통해 5년 전, 가나에와 똑같은 방식으로,

즉 포장선물을 지닌 채 인생의 절정기에 추락사한 소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특히 다카치는 관리인의 진술 속에서 가나에와 소년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공통점은 다카치의 과거와도 맥이 닿아있는 비극적인 사연이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 ● ●

 

나름 정리한다고 했지만, 위에 요약한 줄거리는 실제 내용의 1/3도 채 못 담고 있습니다.

가나에와 소년(규사쿠)의 죽음 외에 또다른 추락사고가 벌어지게 되고,

닷쿠 일행 외의 중요한 조연들이 벌이는 미스터리 사건도 막판에 급물살을 타며 전개됩니다.

닷쿠와 다카치의 탐문은 물론 가나에와 규사쿠의 숨겨진 사연도 사방으로 가지 치듯 확산돼서

도저히 줄거리 정리에 포함시킬 수 없었던 내용들입니다.

 

가나에와 규사쿠, 그리고 다카치의 ‘공통점’에 대해 줄거리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자 설정이기 때문에 더 자세한 설명은 피하도록 하겠습니다만,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이나 일부 서평에서는 너무 쉽게 노출되고 있어서

가능하면 사전 정보 없이 이 작품과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어린 양들의 성야’에서 두드러진 점을 몇 가지 꼽아보면,

이전 작품들에 비해 ‘맥주’의 위상이 미미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말석으로 쫓겨난 점과,

안락탐정에서 현장탐정으로 변신하면서 이야기가 사뭇 무거워졌다는 점,

그리고 대학 초년생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본격적인 캐릭터 플레이를 선보인 점 등입니다.

 

맥주의 늪에 빠져 엉뚱한 상상과 가설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갔던 전작들과 달리

술은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춰 필요한 경우에만 등장하는 소품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만큼 사건에 임하는 닷쿠와 다카치의 자세가 진지해졌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번 작품에서는 다카치가 거의 최전방에 나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는데,

그 덕분에 지금껏 몰랐던 다카치의 아픈 과거의 일부가 노출됐고,

막판에 밝혀진 여러 사건들의 진상과 함께 이야기를 묵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한편으론 반가웠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미스터리의 틀을 갖춤으로써 앞으로의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준 점은 반가웠지만,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최대 매력 중 하나인 청춘과 성장, 엉뚱함과 의외성이 사라지고

갑자기 철이 확 든 ‘어른들’처럼 보였던 점은 읽는 내내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거의 원탑 주인공처럼 맹활약한 다카치는 닷쿠와 보안 선배는 물론

독자들조차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로 몇 수를 내다보는 추리를 여러 차례 선보이는데,

직감이나 본능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앞질러나간 나머지

‘수십 년 경력의 명탐점’처럼 보인 점은 제게는 옥의 티처럼 느껴졌습니다.

황당하고 엉뚱한 가설에서 출발하여 차츰 진상에 다가가던

풋풋한 아마추어의 모습들이 그리워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면에서만 보자면 (모두 6편의 시리즈 중 이제 3편이 국내에 출간됐을 뿐이지만)

첫 작품인 ‘그녀가 죽은 밤’이 제겐 닷쿠&다카치 시리즈의 최고로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두 가지만 덧붙이자면...

우선, 저는 부산영화제에 내려와서 영화를 기다리며 띄엄띄엄 읽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지만,

이 작품은 한 호흡에 읽어야 100% 제 맛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심지어 다 끝났다고 생각된 마지막 페이지에서까지 터지는

니시자와 야스히코 식 반전의 묘미는 ‘한 번에 읽기’만이 유일한 맛보기 방법입니다.

또 한 가지는, 출판사에 드리는 말씀으로, 후반부에 등장하는 규사쿠의 어머니 ‘와미’가

여러 차례 ‘미와’로 오역되곤 했는데, 이 점은 다음 인쇄 때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에도 (요즘의 평균보다는 훨씬 적지만) 몇 군데 오타도 함께 수정되기를 바랍니다.

‘20세기를 뒤흔든 모델 살인사건과 언론의 히스테리’라는 부제처럼

이 작품은 1930년대 뉴욕 빅맨플레이스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사건,

그 중에서도 미치광이 예술가(또는 조각가)가 범인인 3중 살인사건에 대한 상세한 기록,

그리고 선정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미국의 타블로이드 판 신문들이

사건의 전 과정을 어떻게 ‘히스테릭하게’ 다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살인사건들은 크게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피살자들이 (성폭행 여부와 관계없이) 알몸으로 발견된 여성들이라는 점과.

불과 몇 년 사이에 부와 빈곤이 공존하는 뉴욕의 빅맨플레이스에서 벌어졌다는 점입니다.

타블로이드들은 경쟁적으로 성(性)과 관련된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피살자들의 생전의 문란하거나, 음란하거나, 퇴폐적인 사생활 찾기에 혈안이 됩니다.

적절한 사진과 에피소드를 구할 수만 있다면 거액도 마다하지 않을뿐더러,

정 없으면 애매한 표현들을 동원하여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모범생처럼 진지했던 그녀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기사에서

섹시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집 안에 배달원이나 일꾼들이 있을 때도

네글리제를 입고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빨간 머리 여자가 되었다.” (p 57)

 

사건의 명칭을 어떻게 선정적으로 지어야 독자들의 시선을 끌까,

범인에게 어떤 자극적인 별명을 지어줘야 한 부라도 더 팔까, 고민하는가 하면

연이어 살인이 벌어진 특정 장소에 대해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 급급할 따름입니다.

 

‘살해당한 모델의 미스터리’

‘부활절 대학살’

‘모델과 엄마, 섹스광에게 살해되다’

‘술 취한 남자, 여성을 썰어 죽이다’

‘망치 폭탄 맞은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

 

더 이상 써먹을 내용이 없으면 그때부턴 아예 ‘소설’을 쓰거나

심지어 점성술사의 진술을 인용하여 ‘범인의 외모와 현재 위치’까지 과감히 추정합니다.

어제 내보낸 보도 혹은 소설이 오류로 드러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좀더 치명적이고, 좀더 선정적인 새 먹이 찾기에 나설 뿐입니다.

 

“끔찍한 범인과 무방비 상태의 희생자, 희생자는 되도록 여자면 좋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라인과 대중들이 가진 비밀스럽고도 위험한 욕망에 호소하는

자극적인 행위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p 20)

 

이런 경향은 1930년대 뉴욕의 특징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터넷 덕분에 오늘날의 매체들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태도는 더 강화됐습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나치게 독한 보도들을 너무 자주 접한 나머지

웬만큼 센 자극이 아니면 독자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무덤덤해진 정도랄까요?

 

타블로이드로 대표되는 히스테릭한 언론 이야기와 함께

작가는 하드보일드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미국 범죄사에서 3위로 꼽은

‘미치광이 예술가 살인사건’을 방대한 자료에 기초하여 상세히 정리해놓았습니다.

사건 발생부터 재판 종결까지, 또 수감된 이후 범인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보도된 기사 내용은 물론, 수사일지, 관련자 인터뷰 등을 참조하여

거의 백서에 가까운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실제 범죄사건을 다루는 논픽션 작가답게

범인의 모든 것 – 유년기부터의 성장과정,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성돼온 과정,

여성에 대한 시각, 실체를 알 수 없는 정신적 장애 등 –을 집요할 정도로 조사하여

마치 끔찍한 살인마의 일대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얼마 전 기록문학이라는 같은 장르에 속하는 ‘비독 소사이어티’라는 작품을 읽었습니다.

영구 미제 사건을 다루는 특별한 엘리트 집단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그 작품이 픽션의 느낌을 주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좀더 강조했다면,

이 작품은 기록문학이라는 장르에 충실한, 말 그대로 논픽션의 미덕을 살린 작품입니다.

좀 딱딱하기도 하고 기록문학에 낯선 독자들에게는 ‘재미’ 면에서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범죄 논픽션’만의 매력을 맛보고 싶다면 괜찮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진시황 시절, 끔찍한 외모와 꼽추라는 장애를 딛고 천재적인 화공으로 인정받던 창애는

불로초의 비밀과 관련된 죄로 참형을 받게 됩니다.

창애는 죽기 전날, 불로초의 비밀이 담긴 6개의 인형을 만들어

자신의 수제자 6명에게 나눠주며 그 비밀을 아들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관군에게 쫓기던 제자들은 10년 후를 기약하며 한중일 3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이들은 각각 덜미, 괴뢰희, 반라쿠라 불리는 3국의 인형극의 시초가 됩니다.

 

이후 2,000년 간 10년마다 모여 창애를 기리는 행사를 가져온 3국 인형극의 회합은

100년 전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중단됐고, 인형들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하지만 2014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창애의 인형 중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불로, 불사에 대한 인간의 욕망들이 2,000년 만에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고,

창애의 여섯 인형을 차지하기 위해 3국의 세력들이 대충돌을 일으킵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큐레이터 정가온은 꼭두쇠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창애의 인형을 놓고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말려듭니다.

배다른 여동생 설아의 신비한 능력 덕분에 조금씩 인형의 진실에 다가서지만

베일이 벗겨질수록 역사 속에서 창애의 인형으로 인해 벌어졌던 엄청난 사실들 뿐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의 비밀과 한중일 3국의 탐욕스러운 집단들의 정체까지 파악하게 되면서

정가온은 목숨까지 담보로 잡혀야 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2,000년 만에 한자리에 다시 모인 6개의 인형을 통해

창애가 숨겨놓은 불로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 ● ●

 

헛되고 부질없는 불로, 불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픽션 속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는 극적인 소재입니다.

특히 부와 권력 등 가진 것은 많지만, 나이가 많거나 불치병에 걸린 사악한 자들일수록

영원불멸의 삶을 욕망하는 악마적인 캐릭터로 등장하곤 했는데,

‘불로의 인형’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멀리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창애가 남긴 불로의 비밀을 독차지하기 위한 탐욕스러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간의 갈등과 전쟁이 이야기의 뼈대를 이룹니다.

 

‘인디애나 존스의 성배 찾기’를 연상시키는 액션어드벤처로서의 재미 뿐 아니라

불로, 불사 신화의 원조인 진시황과 서복의 이야기는 물론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항우와 유방의 대결,

그리고 갑신정변 당시 조선과 청, 일본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창애의 인형과 결부시킨 작가의 상상력도 뛰어났고,

인형 속에 감춰진 비밀,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 마지막의 반전도 촘촘하게 짜여있어

두툼한 분량임에도 금세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주인공 정가온은 출중한 능력으로 창애의 인형을 찾아내고 비밀을 푸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능력을 지닌 슈퍼맨’으로만 포장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꼭두쇠였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채 홀어머니와 힘겹게 살아온 트라우마,

평생 증오했던 아버지의 진실을 뒤늦게 알아낸 후에 겪게 되는 회한,

그리고 자폐 기질을 지닌 배다른 여동생 설아에 대한 연민과 사랑 등

거대한 싸움터에 내몰린 상처투성이 주인공으로서의 미덕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신비한 캐릭터로 묘사된 설아는 정가온과의 이룰 수 없는 로맨스는 물론

누구보다 인형의 비밀에 가까이 있는 듯한 설정 덕분에

읽는 내내 어디쯤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의 본류에 합류하게 될지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입니다.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정가온과 설아의 로맨스가 자연스럽고 애틋하기 보다는

조금은 작가가 억지로 ‘붙여주려고 애쓴’ 티가 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목숨이 걸린 위기일발의 상황은 그들에게 평범한 로맨스를 허용하지 않았고,

정작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는 탓이었지만,

작가의 거듭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맨스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 했고,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면의 감흥이 풍성한 묘사만큼 공감되지는 않았습니다.

 

장용민 작가의 전작 ‘궁극의 아이’때도 그랬지만, 방대한 서사와 수많은 캐릭터들을

빈틈없이 알차게 직조해내는 필력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특히 ‘불로의 인형’은 곳곳에서 작가의 엄청난 자료조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팩트와 픽션의 기막힌 조합은 아마도 그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입니다.

장용민 작가가 차기작에서도 또다시 이만한 규모의 서사를 준비한다면

독자 입장에선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그의 작품이 주는 만족도에 비한다면

그 정도 기다림은 충분히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