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나이에 뇌종양 4기를 선고받는다면?

그런 내 앞에 울긋불긋한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유쾌 발랄한 ‘악마’가 나타나

‘세상에서 뭐든 한 가지를 없애면 생명을 하루 연장해주겠다’고 제안해온다면?

그런데, 악마가 선택한 ‘없애야 할 그 무엇’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라면?

 

시한부 선고, 유쾌한 악마, 생명 연장의 거래, 소중한 것의 소멸 등

어찌 보면 한 그릇에 담을 수 없어 보이는 독특하거나 판타지에 가까운 소재들이지만

작가는 이런 쉽지 않은 조합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선보입니다.

마냥 우울하고 씁쓸한 시한부 환자의 클리셰나 상투적인 이야기로만 도배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희망을 주기 위해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을 동원하지도 않았지만,

이야기는 빛과 그늘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한 개인의 소소한 삶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생명 연장을 대가로 악마가 소멸시키겠다고 선언한 대상들은

주인공에겐 나름 상징적인 의미들을 지닌 것들이라 매번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편리함 대신 추억을 쌓아갈 시간을 앗아갔던 ‘전화’,

어릴 적부터 주인공의 삶을 지탱하고 형성시켜온 ‘영화’,

그리고 지나간 시간과 기억들을 상징하는 ‘시계’ 등...

 

소중한 것들이 소멸되는 것을 지켜보며 주인공은 고양이 ‘양배추’와 동거하게 된 사연,

자신의 마지막 시간까지 가족들을 위해 내준 어머니와의 온천 여행,

틀어질 대로 틀어져 지금은 절연이나 다름없이 지내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모노폴리처럼 단조로운 무대에서 가볍고 텅 빈 사랑만 나눴던 첫사랑 등을 떠올립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얻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깨달음과 새삼 느끼게 된 회한 속에서

하루하루 연장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어느 날 생각의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잃어야겠지.”라는 어머니의 말씀,

“삶은 아름답고 근사한 거야. 해파리한테도 사는 의미가 있어.”라는 찰리 채플린의 대사,

죽는 것이 두렵지만, 뭔가를 가로채며 살아가는 건 더 괴롭다는 스스로의 자각에 이어

결정적으로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고양이가 네 번째 소멸대상으로 지정되자

주인공은 타인보다 조금 짧게 주어진 수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동시에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반드시 마쳐야 할 한 가지 미션을 떠올립니다.

 

절박함과 애틋함이 메인 정서이긴 하지만,

B급 코미디나 만담을 연상시키는 유쾌한 악마의 캐릭터라든가

(악마의 소행 덕분에) 일시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고양이 ‘양배추’,

그리고 첫사랑, 오래된 친구 등 주인공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조연들 덕분에

이야기는 시한부 환자의 참회록 같은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인물들과의 소중한 시간들, 안타까운 순간들, 후회되는 상황들이 차분하게 묘사되면서

‘죽음’을 주제로 삼았지만, 결국엔 ‘삶’에 대한 따뜻하고 감동적인 느낌을 남겨줍니다.

 

‘유쾌한 악마와의 생명연장 거래’라든지 ‘말하는 고양이’ 등

일부 판타지 설정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그때’가 되어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들에 대해

강요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은 채 판타지적 재미를 동원해 세세하게 묘사한 작가의 필력은

비슷한 주제의 논픽션이나 실화보다 더 깊은 울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면 다소 어폐가 있는 표현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뜻한 햇살과 그 아래 펼쳐진 풍경이 아름답게 여겨지는 한가한 오후에 이 작품을 읽는다면

주인공의 마지막 일주일이 좀더 독자들의 마음 깊이 공명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뭔가 달콤 음흉한(?)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키는 23글자에 달하는 긴 제목,

게다가 다분히 의도가 엿보이는 핑크빛 손 글씨 폰트와 일러스트 때문에

왠지 이 책을 읽고 나면 빙긋 웃음이 나거나 유쾌한 기분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이리저리 뒤숭숭한 일들도 많고, 무겁거나 잔혹하거나 괴이한 책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아마도 머리 좀 식히라고 적당한 타이밍에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왔나 봅니다.^^

 

이야기는 심플합니다.

5년째 만화가를 지망하며 택배회사 콜센터 계약직으로 일하는 25살의 청춘 구에다 아야카가

새로 부임한 센터장이자 자칭 스파이인 46살의 기무라 이치로 덕분에

정신없이 보낸 약 한 달 동안의 좌충우돌 해프닝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 모음집 같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그 속에 녹아있는 유쾌하고 찡한 청춘의 성장담에 있습니다.

20살도 아니고, 30살도 아닌 어중간한 25살의 나이,

프로 만화가도 아니고, 콜센터의 정식 직원도 아닌 불안정한 사회적 위치,

더구나 자신이 꿈꾸는 순정만화에 대한 주위의 편견을 이겨낼 자신이 없는 소심함 등

구에다 아야카가 살아가고 있는 25살의 청춘은 모든 것이 어정쩡하기만 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삶에 느닷없이 끼어든 기무라 이치로로 인해

아야카는 롤러코스터 같은 한 달의 시간을 보내게 되고,

자신의 인생에서 오랫동안 기억엔 남을만한 성장의 시간을 얻게 됩니다.

20살 연상의 남자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학창시절 이후 잊고 있던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악동’ 노릇도 해보게 되고,

모처럼 자신감 있는 기분으로 만화를 그려 ‘방문 투고’까지 할 용기를 얻습니다.

 

물론 모든 일이 자신의 뜻대로만 굴러가주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기무라의 존재감은

아야카에게 기분 좋은 삶의 가이드가 돼주었고,

언젠가 한번쯤 우연히라도 그와 재회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기무라 이치로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만나고 싶은 판타지 속의 존재입니다.

딱딱하게 표현하면 ‘삶의 멘토’ 같은 인물이고,

비유하자면 연애와는 무관한 ‘백마 탄 왕자나 숲속의 공주’ 같은 인물입니다.

별것 아닌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가 하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유발시켜 ‘그래도 열심히!’라고 한번쯤 마음먹게 만들어 줍니다.

 

후줄근한 양복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백발, 매사에 허허실실로 일관하는 느긋함,

또, 고등어와 배추를 함께 넣은 ‘의문의 전골’을 요리하는 중년의 남자로 포장돼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어쩌면 내 주위에도 저런 사람이 있을지도...’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생활감 넘치는 캐릭터입니다.

동시에 ‘어딘가 진실을 감추고 있는 신비한 구석’까지 갖추고 있어

그가 벌일 스파이 역할이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작가는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킬 깔끔하고 기분 좋은 엔딩을 마련해놓고 있습니다.

 

두 주인공 외에도,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게 고객의 클레임을 응대하는 오카모토,

외모만 보면 화류계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한없이 착하고 순정파인 히로미,

콜센터를 회자하는 모든 소문의 진원지이자 공포의 독신녀인 다치바나 여사 등

함께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처럼

오피스 드라마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롭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격언이지만

기무라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던 25살의 아야카에게 남긴

인상적인 한마디를 인용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사람의 인생이란 하룻밤만 공연되는 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딱 한 번뿐이니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아깝잖아?

게다가 전력을 다하는데 있어서는 본인이 즐거워야 하고, 그게 제일 중요해.

 

 

사족으로...

보너스로 제공된 엽편소설 ‘내가 사랑한 스파이’는 작가 도쿠나가 케이의 작품이지만

마치 본편의 주인공 구에다 아야카가 기무라 이치로와의 추억을 발판삼아 쓴

순정 스파이 만화 스토리처럼 읽힌 덕분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견해일 수 있지만 ‘노조키메’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와 ‘도조 겐야 시리즈’의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조금 더 친절하게 부연설명하자면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 다만 호러에 많이 가까운 작품”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50여 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두 가지 괴담이 실려 있고,

그 괴담들을 수집하게 된 소설가인 나 ‘미쓰다 신조’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통해

두 가지 이야기의 연관성과 미스터리 풀기에 나섭니다.

 

● ● ●

 

앞의 괴담 ‘엿보는 저택의 괴이’는 토쿠라 시게루가 1980년대 중반 S산지의 임대 별장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겪은 무서운 체험담입니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남녀 4명의 학생들은 관리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숲에 들어갔다가 로쿠부 고개 너머에 있는 인적 끊긴 폐촌을 발견합니다.

불길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폐촌에 다가간 일행은 그곳에서 기이한 풍경과 마주하게 됩니다.

더구나 자신들을 엿보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 느껴지자 일행은 급히 마을을 떠나오지만,

그 뒤로 이들에게는 원인불명의 죽음, 환각, 환청 등이 닥쳐옵니다.

 

뒤의 괴담 ‘종말 저택의 흉사’는 나 ‘미쓰다 신조’가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재야 민속 연구자 아이자와 소이치의 미공개 저작물로,

1930년대 중반 그가 스쿠자 산지의 토모라이 촌에서 겪은 괴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민속학에 대한 관심을 공유한 덕분에 아이자와와 절친이 된 사야오토시 소이치는

자신의 고향 토모라이 촌과 저주받은 사야오토시 가문에 대해 아이자와에게 털어놓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엿보는 괴물 노조키메의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된 아이자와는

사야오토시 소이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토모라이 촌을 방문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직접 노조키메의 시선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사야오토시 가문에 들이닥친 대참사를 목격하게 됩니다.

 

● ● ●

 

노조키메 혹은 엿보는 시선 외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없지만

구성 상 뒤의 괴담 ‘종말 저택의 흉사’는 앞의 괴담 ‘엿보는 저택의 괴이’ 프리퀄 격입니다.

1930년대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찼던 토모라이 촌은 쇠락을 거듭한 끝에 폐촌이 됐고,

1980년대에 이르러 우연히 그곳을 찾은 토쿠라 시게루 일행은

여전히 남아있는 노조키메 혹은 엿보는 시선의 저주를 받아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별장지 아르바이트생들이 마주쳤던 괴이한 현상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이

50여 년 전의 기록인 ‘종말 저택의 흉사’를 통해 하나씩 풀리는 구성인 셈인데,

덕분에 뒤로 갈수록 호러물로서의 매력은 물론 독자가 느끼는 공포심도 급상승하게 됩니다.

 

명백한 픽션이지만 토무라 시게루의 ‘경험담’과 아이자와 소이치의 ‘기록’이라는 설정 때문에

작품을 읽는 내내 마치 실화나 논픽션을 읽는 듯한 오싹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더구나 작품 속 화자인 나 ‘미쓰다 신조’는 프롤로그를 통해 독자에게

“혹시 이 책을 읽는 중에 평소에는 느끼지 않을 시선을 빈번하게 느끼게 (된다면),

거기서 이 책을 덮기를 권합니다. 단순한 기분 탓이겠지만, 만일을 위해서입니다.”라는

진심어린(?) 경고를 해주는데, 이제 막 본편의 첫 페이지를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서늘하고 섬뜩한 느낌을 주기엔 더없이 좋은 장치입니다.

어쩌면 그 경고처럼 실제로 이 작품을 읽은 뒤 등 뒤나 천정, 열린 문 사이에서

‘자신을 엿보는 시선’을 느끼게 된 독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앞서 “미쓰다 신조의 ‘작가 시리즈’와 ‘도조 겐야 시리즈’의 하이브리드”,

또는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 다만 호러에 많이 가까운 작품”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조 겐야 시리즈가 불가해한 현상이 원인이 된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스터리의 궤를 따라 논리적인 해결을 이끌어냄으로써

호러와 미스터리의 깔끔한 융합을 선보이고 있는 반면,

‘노조키메’는 딱 떨어지는 선명한 결론이나 진범 찾기와는 전혀 거리가 먼,

즉, 설명되지 않는 것은 억지로 설명할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다는 식의

진정한 의미의 호러에 더 가까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지막 챕터에서 나 ‘미쓰다 신조’는 어떻게든 두 이야기 속의 단서들을 통해

불가해한 현상에 대해 나름 진실을 찾고 논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지만,

그 스스로도 “이 모든 건 공상.” 또는 “확인할 방법은 없다.”며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어쩌면 ‘노조키메’는 호러와 미스터리의 융합에 대한

미쓰다 신조 나름의 철학과 가치관을 대변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본문 속 아이자와 소이치의 입을 통해서도 몇 번씩 그런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노조키메 자체가 부조리한 존재인데도,

나는 그것이 초래하는 기괴한 현상을 논리적으로 다루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번역자 현정수 님의 해설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대략 요약해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것이 호러이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것을 단서를 찾아 논리적으로 풀어내야 하는 것이 미스터리인데,

밸런스 좋게 두 가지를 융합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초현실적인 존재’와 ‘논리’라는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을

어색하지 않게 엮어낸 것은 작가 미쓰다 신조의 능력이다.

 

미쓰다 신조의 ‘작자 미상’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호러를 제대로 맛보고 싶다면 모를까,

늦은 밤 조용한 방에서 혼자 읽기에는 조금은 ‘불편한’ 작품입니다.

환한 대낮에 읽으면서도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게 되고,

방문이든 서랍이든 약간만 열려있으면 괜히 찜찜해서 일부러 꼭꼭 닫았으며,

쉬거나 화장실을 가기 위해 책을 덮어둘 때도 의식적으로 표지에 눈길을 주지 않게 됩니다.

(표지에 그려진 노조키메를 빤히 보고 있으면 정말 기분이 으슬으슬해집니다.^^)

 

스스로 ‘바보 같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리 된 것은

미쓰다 신조가 프롤로그에서 던진 경고가 효과를 발휘한 탓일 수도 있고,

‘결국 범인은 현실 속에 있다’는 미스터리 식 엔딩이 아니라

‘그것은 결국 불가해한 현상이었다’는 정통 호러의 엔딩이 남긴 후유증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찜찜함만 남을 수도 있지만,

그 찜찜함이야말로 미쓰다 신조가 ‘노조키메’를 통해 겨냥했던 목표라는 점에서

제대로 작가의 의도에 걸려든 것이라고 위안삼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