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다락방에서 우연히 손에 든 낡은 책이 너무 재밌어 그 자리에서 그 책을 다 읽어 버렸다. 그 책이 '포의 단편집'이었다. 먼 훗날 누군가 내 서재에서 낡은 책을 손에 들고 단숨에 읽어버린다면 그 책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일 것이다.

"처음 상담을 시작한 것은 이 근처 아이들과의 말장난 때문이었어요. 나미야라는 우리 잡화점 이름을 짖궂게 '나야미, 나야미'하면서 놀리더라고요. 간판에 '상품 주문 가능. 상담해드립니다'라고 써 있는데, 아이들이 그럼 나야미(고민) 상담도 해주느냐고 자꾸 묻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시작된다.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나미야 유지에게 다른 이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것은 큰 기쁨이었고 보람이었다. 자신이 상담을 해 준 사람의 비극적 결말을 오해하고 상담을 그만 둔 뒤 투병생활이 다 해 갈 즈음 예지에 이끌려 미래에서 온 감사의 편지들을 받게 되고 나미야 잡화점의 33년만의 부활을 계획한다. 그 부활의 주연을 맡은 3명의 좀도둑의 삶까지도 배려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추리소설 작가다운 치밀한 구성이 돋보인다. 등장인물의 제각각의 삶이 환광원과 나미야 잡화점을 사이에 두고 자연스럽게 얽혀 있는 것이나 전지적인 작가 입장임에도 철저히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도록 했다든가 곳곳의 개연성을 위한 단서, 각각의 이야기의 배열 순서 등 작가의 천재성이 감지된다. 일례로 유지가 연애상담에 자신없어하는 이유를 연애 한 번 못하고 중매결혼한 것으로 생각하는 아들과 나중에 밝혀지는 유지와 환광원 관장과의 가슴 아픈 사랑 때문으로 느껴지게 하는 식의 처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아름다운 이유는 가슴 뭉클하게 하는 각각의 상담 내용이다.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누가 누구에게 감나라 배나라 할 수 있겠는가? 얼결에 상담을 하게 된 좀도둑 3명이나 밤새 그들의 고민에 같이 마음 아파하며 신중했던 나미야 유지나 모두 그들 각자의 스타일대로 그 선을 지킨다. 두고 두고 곱씹어 볼 만한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히는 소설, 그러면서도 삶의 심오한 기척 또한 놓치지 않는 작품'이라는 번역가의 평가 그대로다.

[나미야 유지의 상담]

P161

(백점짜리 꼬마에게)'선생님께 부탁해서 당신에 대한 시험을 치게 해달라고 하세요. 당신에 관한 문제니까 당신이 쓴 답이 반드시 정답입니다.'

P204

(그린 리버에게)중요한 것은 태어나는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반드시 부모가 다 있어야만 행복해진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견뎌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설령 남편이 있다고 해도 아이는 낳지 않는 게 좋다

P254

(폴 레논에게)폴 레논 님은 부모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신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마음입니까? 폴 레논 님의 질문은,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폴 레논 님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지요?

P259

야반도주는 결코 올바른 선택은 아니지만, 온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언젠가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아무리 현실이 답답하더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멋진 날이 되리라

P447

(백지를 보내주신 분께)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 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쇼타, 고헤이, 아쓰야의 상담]

P79

'사랑한다면 마지막까지 곁에 있어주는 게 옳다.' '기껏해야 스포츠.' '올림픽 따위, 단순히 규모가 큰 운동회.' '망설이는 것은 쓸데없는 짓. 지금 당장 그에게로 가세요.'

-그날부터 저는 망설임 없이 훈련에 뛰어들었습니다. 곁을 지키는 것만이 간병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그런 나날 속에 그 사람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말, '꿈을 이루게 해줘서 고마워'라는 그 말, 그리고 만족스러운 웃음으로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은 저에게 무엇보다 큰 상입니다.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저는 금메달보다 더 값진 것을 얻었어요.(달 토끼)-

P142

그 결정이 옳은 것인지 어떤지, 미안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당신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음악 외길을 걸어간 것은 절대로 쓸모없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노래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만들어낸 음악은 틀림없이 오래오래 남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나는 발자취를 남긴 거지? 실패한 싸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발자취는 남긴 거지?(생선가게 뮤지션)-

P364

당신에게 애인이 되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음식점 개업에 관여했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관여했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런 가게를 구경할 수 있다면 영업시간이 아닐 때에 가보고 거기서 일하는 스태프들의 말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가게를 열때 그 사람이 반드시 도와준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만일 돈만 잘 벌린다면 호스티스가 아니라 다른 일이라도 괜찮습니까? 당신은 그 지시에 전적으로 따를 수 있습니까? 단 그 지시에는 '호스티스 일을 그만둘 것', '이상한 남자의 애인이 되지 않을 것'등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자칫 잘못했으면 세상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졌을 테지요.…앞으로는 제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길 잃은 강아지)-

처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하얀 도화지를 꺼낸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그릴 수 없어서 하얀 도화지인 채로 들고 서 있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누구도 무엇을 그리라고 이야기해 줄 수 없고 이미 여러 장 잘못 그려서 버린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섣불리 점하나 찍기도 어려운 순간말이다. 그 때 기적처럼 내게도 "나미야 잡화점"이 있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잔인하고 직설적인 충고로 거짓없는 솔직한 나를 대면하게 해 주고 때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고 또는 세상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에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기적의 잡화점"말이다.

PS. 나의 기대평 "책소개를 읽으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브레멘의 음악대], [이해의 선물], [러브레터]등등이 떠올랐다. 왜인지는 책을 읽으면 알게 될 것 같다."에 답을 달자면-낡은 집에 모여 새로와진 세 친구의 모습에서[브레멘의 음악대]를, 나미야 유지의 따뜻한 모습에서 [이해의 선물]의 위그든씨의 따뜻한 배려를, 아마도 [러브레터]는 일본풍, 상담편지 등때문이었나보다.

매혹적인 밤, 홀로 책의 정원을 거닐다

야밤산책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