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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한 사람 때문에 가슴이 터져버릴 정도로 온몸에 떨려오는 그 벅참을...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설레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떨림이 언제 그칠지에 대한 초조함을 함께 느껴야 했다.

이렇듯 나이가 들어 갈수록 나에게 있어 떨림이란 감정은 다른 감정들처럼 무뎌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떨림이 찾아와도 벌컥 겁부터 나는 겁쟁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나는 지금 뜨거운 가슴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요즘 부쩍 시집을 가까이 접하고 있던 참에 <떨림>을 알게 되었다. 우리시대의 대표시인이랄 수 있는 24명의 시인이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이 찬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내 마음을 왠지 촉촉이 적셔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무채색의 내 마음을 책표지에 그려진 살구빛 마음으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나의 첫 키스>라는 제목을 단 정호승 시인의 사랑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24명 시인들의 사랑이야기가 잔잔히 그려지고 있다. 사랑에 대한 시인들의 피상적인 생각의 단편들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겪어냈던 다양한 사랑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마치 유명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시인들의 생생한 마음이 담긴 사랑이야기. 하지만 그 어떤 이야기에도 온전한 떨림만의 기억은 없었다. 오히려 잠시의 떨림 후에 찾아오는 복잡하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읽는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떠한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나만 떨림이란 감정에 불안해하는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저절로 내뱉어진 안도의 한숨. 하지만 그 한숨에는 극복해야할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사랑의 다른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함. 사랑을 겪어낸 시인들에게는 있었지만 나에게는 없는 그 성숙함이 나의 사랑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인들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랑은 천차만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 제각각의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열쇠는 결국 사랑을 하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린 건 아닐까.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나에게 찾아든 시. 문정희 시인의 <물개의 집에서>란 시를 몇 번을 곱씹어 읽으며 다시 내개 찾아올 사랑을 상상해 보았다. 문정희 시인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나는 그동안 실패한 나의 사랑들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늘 서툴기만한 내 사랑이 미우면서도 끝내 그런 사랑을 버리지 못하던 나를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사랑에는 어떤 예방주사도 소용이 없는 것이긴 했다. 그때마다 최초였으며, 그때마다 아프고 괴로웠으며, 출발이었으며, 생의 전부를 휩쓸어도 시원치 않은 무서운 활화산이었다. 사랑은 언제나 유치하게 서툴게 시작되었다. (p. 93)

사랑에는 출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영원한 출발이 있을 뿐이었다. 매일 매일 새로이 태어나서 새로이 출발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를 들여다보아서는 절대로 안되는 거울이었다. 서로에게 대해서는 두 눈을 꼭 감을수록 좋았다. 그리고는 다만 같은 방향을 쳐다보아야만 했다. (p. 97~98)

문태준 시인의 사랑이야기는 내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주었다. 문시인처럼 첫사랑과 결혼할 수 있는 축복을 나는 이미 잃어버렸으나 그가 말하는 그런 사랑을 생애 한 번은 꼭 해봐야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생겼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랑. 기다림 속에서 서로를 온전히 녹아낼 수 있는 사랑. 그래 이런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강한 바람이 나를 흔들었다.

나의 사랑은 천천히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사랑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좀 엉뚱하게도 예를 들면, 우리는 꽃의 개화를 볼 때 기다림에 대해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 니체의 말 가운데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오랜 침묵이 있어야 빛나는 사랑의 언어도 탄생한다. (p. 37)

사랑은 옆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주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은 여울과도 같은 것이다. 사랑은 흐르되 내 안에 사랑이 흐르는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응답이다. (p. 39)

삶이나 사랑은 강과 같아서 다만 유유히 흐르는 것이다. 초봄의 새순이 무성해져 녹음을 만들고 그늘을 드리우는 것처럼. 그것이 사랑하는 시간의 변화이다. (p. 40)

서석화 시인의 사랑이야기에서는 그녀의 고해성사 같은 사랑을 통해 나의 얄팍한 사랑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사랑을 간절히 원하지만 정작 나는 받기만을 원하지 주려고는 하지 않는 이기적은 사람은 아니었는지.. 이렇게 시작된 사랑에 실망한 채 비명을 지르며 상대를 괴롭힌 건 아닌지..

바늘 같은 감정은 하루에도 수천 번씩 나를 찌르고 그 속에서 악악대며 내 아픔만 누구에게 호소하지 않았는지, 그러면서 나를 쉬게 해줄 그 어떤 포근함과 너그러움만 자꾸자꾸 달라고 조르진 않았는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절대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도가 결국은 내 얇은 허영은 아니었는지. (p. 138)

황인숙 시인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사랑의 또다른 이름인 이별에 대해 되새김질을 해보게 되었다. <이별의 기술>이란 책의 내용을 빌어 써내려간 시인의 이별에 대한 이야기들은 나에게 이별도 어쩌면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른다는 일깨움을 주었다.

“결혼•이별•이혼은 사랑의 무담보성을 인정하는 행위들이다. 우리는 왜 사랑이 끝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가 저절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이별은 비극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적인 한 단면이란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p. 187)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과연 그럼 사랑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에 이른다. 섹스? 이별? 결혼? 글쎄다. 변변찮은 사랑만을 해본 나로서는 사랑의 종착역이 어디인지를 얘기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도중하차 하는 것으로 내 사랑을 정의내린지 이미 오래이니...

하지만 그래도 또다시 사랑을 꿈꾸는 걸 보면 어쩌면 사랑의 마지막 모습은 애초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시간을 타고 변화해 가는 새로운 모습만이 있을 뿐. 그 시시각각 변화하는 새로운 사랑의 모습에 놀라 뒷걸음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눈물도 흘리고 때로는 슬퍼하기도 하면서 사랑의 다양한 모습에 적응해 가고 있는 건지도...

물개의 집에서

- 문정희 -

사랑에 대해서라면

너무 깊이 생각해버린 것 같다

사랑은 그저 만나는 것이었다

지금 만나지 못하면

돌아오는 가을쯤 만나고

그때도 못 만나면 3년 후

그것도 안된다면 죽은 후 어디

강어귀 물개의 집에서라도 만나고

사랑에 대해서라면

너무 주려고만 했던 것 같다

준 것보다 받은 것이 언제나 더 부끄러워

결국 혼자 타오르다 혼자 스러졌었다.

사랑은 그저 만나는 것이었다.

만나서 뜨겁게 깊어지고 환하게 넓어져서

그 깊음과 넓음으로

세상도 한번 크게 껴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