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라는 긴 문장을 읽었을 때 무언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 질긴 인연이 떠올랐다. 그것은 따뜻하면서도 강한 일체감을 갖게 하는 느낌이었다. 파도가 존재해야 바다가 바다일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 한 존재를 계속 생각해 준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생모 지은과 그 주변 사람들의 삶이 얽혀 있는 진남에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카밀라의 이야기이면서 그녀의 생모 정지은의 이야기이다. 곧 카밀라가 정지은이고, 정지은이 카밀라이며, 그 둘 사이에는 바다가 있다.

 

 '동백꽃'이란 뜻의 카밀라는 입양된 후 자신의 이름이 아무렇게나 의미 없이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욕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 이후 남자친구 유이치를 통해 여섯 개의 상자 속에 담긴 어린 시절 물건에 얽힌 이야기들을 쓰면서 작가가 된다. 그리고 동백꽃이 피어 있는 어떤 곳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 생모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은 카밀라를 진남으로 오게 만든다. 때로는 작은 무언가가 한순간에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기도 한다. 우리는 그러한 순간들을 대부분 경험했을 것이다. 그 사진이 카밀라에게 준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니라 활짝 핀 탐스러운 동백꽃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였다는 자존감이었다. 그후 카밀라에게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 된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 혹은 사랑받았다는 것은 세상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게 한다. 그 사랑이 헤아릴 수 없는 고독과 아픔을 품고 있는 진실이라도 대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카밀라는 그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고, 열일곱 살에 자신을 낳고 진남 앞바다에서 자살한 엄마 정지은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생부가 정지은의 친오빠라는 잘못된 말을 믿고 떠나지만, 다시 1년 만에 진남으로 돌아온다. 생모가 지어주고 싶었던 희재라는 이름을 안고 말이다.

 

'모든 것은 두 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서로 고립된 점의 우연으로, 그다음에는 그 우연들을 연결한 선의 이야기로. 우리는 점의 인생을 살고 난 뒤에 그걸 선 의 인생으로 회상한다.'

                                                                                                                 P.202

 

 지은의 인생은 여러 개의 점을 이은 선들이 달라지면서 그 존재도 여러 번 달라졌다. 선생님과의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난 더러운 학생이 되고, 노조원들을 선동하여 가장의 목숨을 빼앗은 아버지의 딸이 되기도 하였으며, 남매끼리 정을 통해 아기를 낳은 패륜아로 전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은, 열일곱 살 어린 엄마는 자신의 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억지로 입양을 보내게 된 딸을 잊지 못하고, 깊은 바다속으로 사라진 지은은 그곳에서 사랑하는 딸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아파한다. 아무리 사이가 좋고, 잘 통하는 사이라 할 지라도 닿을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P.274

 

 지은은 이렇게 닿을 수 없는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아이가 날개가 되어 닿을 수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지은이에게는 아이가 희망이고 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먼나라로 빼앗겼을지라도, 깊고 차가운 바다속에서 차가운 시신이 되었을지라도 카밀라를 기다렸던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각자의 점으로 찍혀진 삶을 살고 있다. SNS가 아무리 발달하고 수많은 관계 등을 만들어 나간다 할지라도 진실된 선으로 이어진 삶이 아닌 자기의 심연속에서 외로워하고 진짜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다. 진정한 소통과 공감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래서 파도가 바다를 기억하듯이 자신을 생각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우리의 인생은 사람에 관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과 부딪치고 살아가면서 사람에 대한 앎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고 이해하는 것은 타인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아무리 인간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 근처까지 다가가 목소리를 낸다면 우리의 외로움은 조금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 옆에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진심으로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따뜻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카밀라가 활짝 핀 동백꽃처럼 아름다워지고 희재로 불려 질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김연수, 파도가바다의일이라면

 김점선씨는 1972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앙데팡당전에서 뽑힌 화가로 그 뒤 화려하게 화단에 등단했다. 제8회 파리 비엔날레 참가자를 뽑기 위한 앙데팡당 전의 주제는 극사실주의와 관념 예술이었다. 그녀 또한 관념 예술에 관한 작품을 출품했고  뽑히게 되었으나 곧 그 화려한 무대를 저버리고 아주 전통적인 그림들, 우리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형상이 있는 그림들을 그렸고, 그 속에 글도 썼다. 당시 한국화단은 흑색과 백색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김점선의 그림은 혹독한 비평과 함께 찬사를 들으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은 이젠 고인이 된 김점선씨가 2002년 오른쪽 팔의 통증으로 종이에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컴퓨터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것들을 모은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만났을 때 이제 이 땅에 없는 김점선씨의 그림과 글이 반가웠다. 김점선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녀의 그림에 소설가 최인호씨가 글을 쓴 '꽃밭'이란 책을 통해서였다.

 

 김점선씨는 자신을 한 마리'말'로 표현했다. 전생에 자신이 말 위에서 죽었고, 말과 자신이 구별되지 얺았으며, 또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화가가 되었고, 말을 그린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나오는 화가가 그린 말그림들은 다정해 보이고, 평온해 보인다. 눈도 입도 웃고 있어서 정이 간다. 나는 문득 화가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그림으로 생생하게 표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자신의 마음과 욕심과 열정사이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동생들을 협박하고, 남편과 만나 결혼하여 치열하고 황당하게 살아갔던 모습들을 정말 담담하게 그리고 있어 놀라기도 할 것이다.

 

말이 되어 자유롭게 날아간 김점선씨의 그림과 글을 또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다.

김점선, 10cm예술

 프랑스인 남편과 파리에 살고 있는 저자 신이현씨가 쓴 이책은 알자스 지방의 겨울, 봄, 여름, 가을의 이야기를 음식과 함께 글로 담아냈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산골 마을 '알자스'를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온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새콤달콤, 고소하고 상큼한 맛들을 품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반가웠다.

 

 [여름]의 '세상에서 가장 새콤달콤하고 상큼한 까막까치밥 샘'편까지 읽고 등산을 갔었는데 하산길에 발목을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2주만에 퇴원을 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평범한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더 마음에 와닿았다.

 

 저자의 시부모인 루시와 레몽은 봄부터 초겨울까지 부지런히 텃밭을 가꾸며, 그곳에서 부지런히 먹을거리리와 채소, 과일, 생선 등을 넣은 요리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도 함께 담으면서 말이다. 싱싱하지만 싱거운 음식처럼 이 글도 담백하고 조용하게 천천히 읽혀지지만 담백하다. 음식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는게 흥미롭기도 했다.

 

 

	행복한 시간을 원하는 사람만이 과자를 굽는다.
페이지 : 32

 라는 글귀처럼 책을 읽다보면 고소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요리란 머리가 아니라 손이 기억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없이 칼질하고 양념을 섞고 반죽을 해 본 손이 이윽고 그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페이지 : 37

라는 문장처럼 세월과 삶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니가도 한다.

 

 책을 읽다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과 성격 등을 알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아무리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다고 해도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외로움과 그리움, 정을 나누는 마음만은 같다.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안고 있는 저자의 시부모는 아들과 며느리가 알자스 시골 고향 마을에서 정착하기를 바라나 그들은 선듯 응하지 못한다.

 

	나는 알자스를 점점 더 좋아하기 시작했지만 이곳에 뿌리박고 살아갈 자신은 서지 않는다. 생크림을 듬뿍 넣고 익힌 송아지 고기를 점심으로 먹은 뒤 햇빛 따스한 숲에서 말 달리기 하는 인생은 이상적인 삶이지만 그러기에 내 영혼은 너무 불안하다. 이런 안정적인 삶은 왠지 낯설고 편치가 않다. 그래서 아직은 루시와 레몽이 원하는 답을 해 줄 수가 없다.
페이지 : 324

 노년의 삶은 안정적이라 편안하지만 젊은이들의 삶은 불안하다. 그렇다해도 노년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알자스에서의 휴가는 즐거우나 삶의 터전으로 삼기에는 아직 주춤거리는 게 당연하다.

 

 책을 읽으면서 알자스의 풍경과 음식,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과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언젠가 나도 그곳에 서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친 도시의 영혼에게 위로와 쉼을 주는 그곳에 말이다.

신이현, 알자스-프랑스어느작은시골마을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