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안녕하세요?

얼마 전 제가 사는 이곳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었지요. 아버지 계신 하늘너머 그곳에도 계절이 있나요? 있다면 이곳과 같은 겨울인가요? 저는 혹시라도 당신이 추우면 어쩌나 걱정을 합니다.

아버지, 그곳에서 지켜보고 계세요?

아버지가 없는 이곳에서 우리가족 모두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지를요.

아버지, 보셨지요?

2년전, 제 결혼식 날. 아버지 손 못 잡고, 신랑손 잡고 동시입장 하면서 제가 얼마나 터질것 같은 울음을 참았게요.결국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내시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눈물보가 터져버려 수습불가능이 였지만요.

아버지, 보셨지요?

똘망 똘망 하고 애교가 많은. 이제 막 20개월이 되어가는 제 딸이요.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배워갑니다.

아버지, 너무 일찍 저희들 곁을 떠나셨어요.

엄마된 어느날 밤.

저는 뼈저리게 당신이 그립고 불쌍해서. 베갯잇이 다 젖는줄도 모르고 울었습니다. 이렇게 예쁜데. 이렇게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예쁜데.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져 보고 또 보고픈게 자식인데. 우리 아버지, 그런 자식을 넷이나 남겨두고 어떻게 두눈을 감으셨을까....

아버지, 보셨지요?

아버지 사위요. 참 따뜻하고 자상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제신랑, 연애 하기전까지. 제 이상형과는 아주 정반대의 남자 였다지요.

첫 만남때. 너무 마른 빈약한 몸매, 아랍인풍의 외모에 유난히 큰코.

게다가 까만피부에 빳빳하게 자른 짧은 머리카락이 군인 같아서 아주 깜짝 놀랬었지요. 그런데 인연이 되려했는지. 웃을때면 선한 하회탈 주름이 잡히는 얼굴이 너무 착해보여서. 자꾸 또 만나게 되더라구요.

연애중, 콩깍지 씌어 이상형 외모는 포기했지만. 아이구!

이 남자, 저와 문화취향도 어찌나 많이 다르던지요. 저는 취향이 비슷해서 평생 나와 함께 즐기고 교감 할수있는 사람을 원했었지요.

그런데 이 남자는요. 독서와는 담쌓았고, 음악은 흥겨운 댄스다. 어디 그뿐이게요. 대부분의 여자들이 거부한다는, 일많은 시골이 고향인 장손이기까지 하답니다.

아버지, 그래도 제가 정말정말 이 남자를 사랑했나봐요.

결국 결혼까지 했으니 말이예요.

결혼해서 살아보니, 역시나 이남자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변함없이 청결을 거부하는성실함, 식사중 편식을 고수하는 대쪽같은 소신.

가끔 내가 심심할까봐, 10년차 주부와 결혼 한듯한 착각에 빠질만큼 정겨운 잔소리를 들려주는 자상함. 또 거기에 돈 나가는 일을 제일 싫어하는 짠돌이 남자랍니다.

인터넷 쇼핑을 하면서 몇백원 차이나는 가격에 두시간쯤 고민하다 두통을 호소할때도 있고요.

아기 반찬 해주려고 천칠백원 주고 유기농 콩나물 사왔더니, 다음부터 오백원짜리 봉지콩나물을 사오라며 어찌나 신신당부를 하던지요.

가끔 밥하기 싫어 그 좋아하는 짜장면을 시켜먹자고 유혹을 하면 고민하다 날밤새는 남자랍니다.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 사위가 돈을 써도 아까워하지 않는게 하나 있는데 뭔줄 아세요?

바로 제가 사는 책 이랍니다.

책주문 하면서 미안한 마음에 “책 값도 비싼데 다음에 살까?” 하고 괜스래 눈치 보는 시늉이라도 하면. “아냐. 사야지, 너 그책 보고 싶어서 골라 놓은거 아냐?” 하며 부추겨 줍니다.

그러면 저는 읽고 싶은 욕심에 못이기는 척 주문을 합니다. 그러면서 괜히 또 미안해서 한다는 소리가 “당신도 책좀 읽어. 하여튼 책읽는 꼴을 못봤다니까.”라며 핀잔을 줍니다. 그런데 아버지, 저 사실은 알고 있답니다.

제 신랑인들 왜 보고 싶은 책이 없겠어요. 함께 서점이라도 가면 좋아하는 자동차 잡지나 취미가 맞는 책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결국 가격을 보고는 다시 제자리에 놓습니다.

그러면서 하는말이 자기는 책을 보면 졸음부터 온다나요. 그러던 어느날. 장거리에 있는 시부모님 댁에 내려 가던중. 졸음 운전을 하던 신랑이 괴로워 하길래 제가 읽었던 재미있던 글귀들을 이야기 해줬습니다. 그랬더니 신랑이 재밌다며 잠이 깬다고 하더라구요.

그후, 항상 지루했었던 우리 부부의 장거리 운전시간은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을 기다린듯 신나게 읽은 책의 내용을 신랑에게 얘기해준답니다.

그럼 신랑은 재밌게 듣고난후 공감되었던 부분을 제게 얘기 해주고, 그렇게 대화를 주고 받다 보면 서로를 더욱 깊이 알수 있게 된것같아 행복 합니다.

아버지,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신랑이 독서 하기를 즐기지 않는걸 알았을때는 좀 실망 했었지만.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누군가와 함께 공감 할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정말 행복한 독자인것 같아요. 책을 읽고나면 떠오르는 감정이나 감동을 전해줄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요.

이제는 제 신랑이 책과 담을 쌓은 사람이라도 행복하네요. 제가 책이야기 해주면 재밌다며 들어주니, 저는 평생 제 신랑에게 책 들려주는 아내가 되어 주려 합니다.

아버지, 어때요? 이만하면 저희부부, 천생연분 아닌가요?

제 신랑, 자기는 책을 안 읽어도 딸아이 책읽어 주기는 잘합니다. 아침의 바쁜 출근시간이든, 잠자리전 졸음이 쏟아져 하품이 나오든, 밥을 먹다가도 아이가 원하면 언제든지 책을 읽어주는 백점짜리 아빠랍니다.

아버지, 저는요. 딸아이와 다정하게 놀아주는 신랑을 보면 어린시절 끔직히 저희 사남매들을 챙기셨던 당신이 생각나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곤 합니다.

가족끼리 외식 한번 할수 없는 가난한 시골 살림.

무뚝뚝한 아버지는 자식들을 따뜻한 말로 보듬어 주지도, 다정하게 한번 놀아 주지도 못하는 평범한 시골의 가장 이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때때로 우리 사남매에게 보여주신 따스한 추억들은, 지금도 저에겐 예쁜 동화책의 한구절 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 꼭 지금의 겨울 어느날.

그때의 겨울은 왜그렇게 추웠는지. 자식들이 추울까봐 이른 새벽부터 군불을 넣은 아랫목은 발넣기도 겁날만큼 뜨거웠지만, 허술한 흙벽 어느틈으로 새들어온 황소바람은 시려웠습니다. 낡고 작은 유리창에 성애가 하얗고 오묘한 무늬를 만들어낸 겨울의 아침.

뜨끈한 아랫목을 차지한 저희 사남매가 그 달고 뜨신 아침?? 쨍하게 추운 아침공기를 와락 이끌고 아버지가 들어오셨지요.

어린 저희들은 일제히 “아빠.아이 추워 추워!빨리 문닫어요.” 짜증을 부렸었지요.

하지만 짜증도 잠시. 곧 아버지가 방바닥에 내려놓은 간식 냄새에 코가 번쩍, 눈이 번쩍 잠이 다 달아났지요.

아궁이불에 까맣고 누렇고 바삭바삭하게 구워낸 가래떡에서는 구수한 누룽지 탄내가 났었지요. 그 뜨거운걸 양손가락으로 쭉 늘이면 하얗게 늘어나는 말랑말랑한 속살.

어떤날은 눈처럼 흰 백설탕에 굴려먹고, 어떤날엔 어머니가 떡에 잘 묻으라고 스댕그릇에 덜어낸후 뜨거운 물위에서 녹여낸 물엿, 그 물엿그릇을 가운데 놓고서 내복차림의 저희들은 그 달근한 물엿이 없어질라 말도 않고 서로 떡을 찍어먹기에 바빴었지요.

가난하고 추운 시골의 겨울. 유난히 부엌에 들어가시는걸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께서는 늘 간식해 달라고 종알종알 거리는 자식들 먹이려고 항상 고구마며, 김치전이며, 콩을 넣고 찐 누런 막걸리빵을, 팥소를 넣은 달콤한 찐빵도 만들어 주셨지요.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학교가 끝나고 길고 험한 시골길을 걸어 집에 도착하면, 얼굴은 사루비아 꽃처럼 빠알갛게 익어 있었지요.

가방을 던지기 무섭게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설탕물에 수박이나 복숭아나 토마토를 썰어 잘박잘박하게 재워놓은 시원한 과일 화채. 맛있게 화채를 들이키는 저를 보며, 아버지께서는 늦게 오는 언니 오빠것도 남겨 두라며 맛있느냐 묻곤 하셨지요.

예, 아버지. 아버지가 해주신 간식은 언제나 맛이 있었어요.

아버지께서는 정말 요리 하시는걸 좋아하셨지요. 생일날이나 운동회나 졸업과 입학식날에는 특별한 별식도 손수 만들어 주셨지요.

처음 먹어보는 새콤달콤한 탕수육, 마요네즈를 잔뜩 넣어 버무린 사라다, 고기만두, 매워서 울며 먹었던 닭볶음탕, ...지금 생각해봐도 그시절의 그 시골에서. 아버지가 손수 자식들의 간식을 챙겨주는 일은 참 드문 일이였지요.

누구 한놈이 도시락을 두고 간날에는, 그놈 배고플까 안쓰러워, 니 아버지 바빠도 도시락 들고 학교에 가더라고.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지요.

수업중에 아버지가 덜컹 교실문을 열고 도시락을 가져오시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추억은 우리 사남매 모두가 다 가지고 있다지요.

아버지, 밤새워 얘기해도 모자란 그 따스한 추억들이, 이제는 당신이 우리들 생애에 남겨주신 소중한 선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버지께서 저희 4남매에게 잊을수 없는 소중한 선물을 하신날.

저는 지금도 그날을 선명하게 떠올릴수 있습니다.

그날은 제가  연애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된 날이라고 할까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요?

그게 다 아버지 때문에 아니겠어요.

제가 일곱살 되던해 여름의 어느날.

아버지께서는 저희 4남매에게 커다란 선물을 하셨지요.

그때 전 동생과 마루에 앉아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지요.

우리집 마당 안으로 낯선 아저씨 한분과 아버지께서 큰박스 하나씩을 어깨에 매고 들어오셨습니다.

곧 여러개의 박스 꾸러미들이 마루에 쌓이고,  궁금한 어머니께서 묻자 어머니께서는 없는 살림에 한마디 상의없이 책을 들이신 아버지를 원망하셨지요. 하지만 그 원망도 잠시.

어머니께서도 책들이 궁금하신지 서둘러 박스를 뜯어 신기하신듯 책들을 살펴 보셨습니다.

당시에도 책을 많이 사면 사은품이 있었던지 배달온 아저씨가 가져온 커 다란 삼단책장의 자리를 정하고, 그책들을 순서대로 나란히 꽂는일은 어머니가 먼저 나서셨습니다.

집에는 변변한 놀잇감이 없어서 땅바닥에 낙서를 하거나, 옆집 아이와 소꿉놀이를 하는게 전부인 일곱 살. 집에 내가 볼만한 책이라고는 단 한권도 없었던 일곱 살.

심심하면 언니 오빠의 책가방을 뒤져 읽지도 못하는 교과서를 들춰보던 일곱 살.

아버지, 그날은 어린 제게 있어 정말 엄청난 사건의 날이였습니다.

무료했던 일상에. 갑자기 빤지르한 주홍색의 옷을 단체로 맞춰입은, 반짝반짝 하기까지 하며 표지에는 아름다운 삽화가 황홀한 예쁜 새 책들!

아니, 저는 그전에도 헌책 한권 가져본적이 없으니 그 책들은 저의 첫 책들이라고 해야겠지요.

그 책들은 무려 100권이나 되는 세계명작동화 전집과 100권의 위인전, 그리고 다듬이돌만큼 두툼한 한권의 백과사전 이였지요. 아버지는 저희 사남매를 위해서 아주 제대로, 요즘말로 제대로 질러 주셨지요.

그렇게 많은 책과 처음 마주한 제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어머니 눈치만 빤히 쳐다 보니 어머니께서는 언니와 오빠가 오면 같이 보라고 하셨지요.

학교에서 온 언니와 오빠가 신이나서 책들을 마구 꺼내어 보기 시작하고, 저도 그제서야 책들을 구경 했었지요.

처음 만나는 그 책들은 글씨가 더 많고 흑백의 삽화가 많았지만. 종종 한페이지씩 예쁜 컬러 삽화가 실려 있었습니다. 제게 동화책을 처음 읽어준 사람은 언니였습니다.

언니는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를 읽어 주었지요. 책속에 그려진 금발의 아름다운 신데렐라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호박마차앞에 서있던 그림. 어여쁜 모습의 백설공주가 숲속 오두막집에서 일곱난장이들과 함께있는 그림.

글을 모르는 저는 예쁘고 고운 그림들만 골라서  보고 또 보았더랬지요.

그리고 초등학생이 되어 글을 배운후, 책들은 한권 한권씩 저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유난히도 좋아해서 읽고 또 읽었었던 소공녀와 소공자, 플란다스의 개와 괴도 루팡, 로빈슨 크루소와 알라딘의 요술램프는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책속에 그려졌던 삽화가 기억이 날 정도입니다.

아버지, 변변치 않은 자랑거리 하나 없는 시골 소녀에게, 그 책들은 책 이상의 그 무엇 이였습니다.

친구들이 집에오면 얼마나 으스대며 잘난척을 했게요. 무언지 모를 뿌듯함에 어깨가 으쓱 해지는것. 자존감 이였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사주신 책이다아, 우리 부모님은 우리를 엄청 많이 사랑 하신다아, 나는 사랑 받는 아이. 아, 행복해.

아버지께서 선물하신 그 책들은, 사랑, 그 자체였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들이신 책들을 저희 사남매가 도란도란 읽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시며 칭찬을 해주셨지요.

그래서 아버지의 칭찬을 기대하며 자주 독서포즈를 연출하다보니, 어느새 정말로 독서의 즐거움에 빠져 버렸지요.

그리하여 급기야는 집에 있는 책들도 성에 차질 않아서. 동네방네 책이 있는 집으로 마실을 다니며, 책도 얻어 읽고, 끼니때면 밥도 얻어 먹고 다니다,  어머니께 꾸지람도 많이 들었었지요.

방학이 되어 친척집에 가게되어도 사촌들과 놀지는 않고, 그집 책장에 꽂힌 책들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겨, 마음에 드는 책은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몇 번씩을 들춰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몇날 몇일을 상사병 앓듯이 두고온 그책이 그리워 죽을 지경 이였지요.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였습니다.

궁색한 시골학교 도서관의 책들로 근근히 연명하다가, 새책을 사냥하면 굶주린 맹수처럼 달려들어 먹어치우던 때였습니다.

아랫마을에 작은 아버지댁이 새집을 짓고 이사를 오셨지요. 작은집에서는 집들이차 우리 가족들을 식사에 초대 하셨지요.

집구경을 하느라 이방저방 순례를 하던 중이였습니다.

사촌들의 공부방에서. 번쩍하며 오색찬란한 무지개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게 아니겠어요.

정말이예요. 제눈에는 정말 그렇게 보였었지요. 그도 그럴것이, 세상에나! 그당시에는 쪼매 산다는 집 아덜들이나 본다는, 시골 촌부락에서는 귀경조차 힘든 그것.

제가 그토록 간절히도 찾아 헤매였던 그것. 바로 새책들 이였습니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으셨던 작은 어머니께서, 새집 입주에 발맞춰 새책들을 들이신 겁니다.

그 책들은 탐구생활 만큼 크고 빳빳한 하드커버에 전 페이지 올컬러를 자랑하는. 황홀한 꿈의 동화책! 바로 그것 이였습니다.

세계각국의 전래동화 전집과 이솝우화, 그리고 우리나라 전래동화 전집. 저는 단박에 그책들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두말 할것도 없이 다음날부터 저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작은집으로 향했습니다.

작은집으로 달려가는 길은. 연애하는 이가 연인을 만나러 가는것 처럼 가슴이 다 두근 거렸습니다.

그렇게 한두권의 책을 만난후, 집으로 가는길은 혼자였습니다. 책과 연애 하느라 함께 다니는 친구들을 먼저 보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고긴 길은 하나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방금전 읽었던 동화속 내용을 맛나게 되새김질 하다보면, 어느새 주인공들이 나와 함께 집까지 걸어가 주었으니까요.

얼마나 그  새책들이 보고 싶었으면, 겨우 열 한살 짜리 작은 꼬마가, 혼자서 집에 가야 하는 그 긴 시골길도 겁내지 않았을까요.

딱 그때의 나처럼....딱 그만큼만 다시,  열렬히,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편견도 없이, 책과 다시 사랑에 빠질수 있는 날이 올까요? 

아버지, 지금 돌이켜 추억해보면요.....예, 맞아요. 저는 그때 책과 사랑에 빠졌었군요.

나는 책이 책이 될수 있었지요. 책은 내가 될수 있었지요.

우리는 서로 헤어지는게 싫어 꼭 붙어 있었지요.

열한살, 그때. 분명 전 연애를 하고 있었네요.

언젠가, 결혼한 언니에게 물어 보았지요.

“언니, 우리 어릴때 아버지가 사주신 그책들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그때 우리집 가난 했었는데. 그 시골에서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사주셨는지 몰라.”

아버지, 딸아이 동화책을 들이면서 당신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가난하지만, 당신의 자식들이, 마음까지 가난해 지지는 않기를.

아름다운 책읽고, 아름다운 꿈 꾸며, 꼭 그렇게만 자라주기를.... 

아버지, 그때의 아버지가 선물한 책이 불씨가 되어, 저희 사남매, 바쁘고 힘든 일상속에서도 책 한권씩은 사 읽는 여유를 갖고 살아갑니다.

아버지, 저는요. 아이 낳으러 갈때도 좋아하는 소설책과 만화책을 싸갖고 갔었답니다.

모유수유 하기가 힘들고 지루해서, 수유하는중에 책을 읽으면 아기가 물끄러미 올려다 보며 “엄마 뭐해요? 이게 뭐예요?”라고 묻는듯 했지요.

그랬던 아가가 지금은 제가 읽는 소설책은 무조건 뺏아다 자기가 읽는 시늉을 합니다.

아버지, 요즘 제가 가장 많이 읽는책이 어떤책인줄 아세요?

바로 딸아이에게 읽어 주는 동화책이랍니다. 아이가 원하면 열 번이고 스무번이고 읽어줍니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 혼자서 책을 읽을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때는 나란히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엄마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램이 있다면.

제 딸아이가, 열한살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책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그래서 평생 책과 함께 행복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보고 계시지요?  아까부터 딸아이가 놀아 달라고 조르고 있네요.

이제 몇일후면 성탄절입니다. 딸아이가 좋아 할만한 동화책 한권 선물 해야겠어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오늘은 이말로 인사 할께요.

사랑해요. 고마워요. 아빠! 메리 크리스마스!

-당신의 셋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