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 못하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 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 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도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김훈 에세이 『자전거 여행』, '숲은 숨이고, 숨은 숲이다' 중에서)

박래부와 함께 쓴 그의 문학기행이며, 자전거로 산천을 누비며 쓴 여행기가 그토록 소중한 이유는 그가 밟은 땅이, 지친 바퀴가 고스란히 문장으로 화해 지난한 시공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산성 터, 버려진 들판, 죽어가는 갯벌, 산불로 스러져간 잿더미 숲, 하다못해 스쳐 지나는 러브호텔의 전경마저도 그의 소설적 사유물이 되어 다가오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독자가 어디 나뿐이겠는가. '숲'을 이야기하는 그의 올곧은 애정은 자전거 바퀴를 많이도 쉬게 하지 않았을까? 그가 편애하는 그 '숲'이 '강을 건너지 못한 인간들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천태만상을 다룬 『공무도하』다음으로 다가온 것은 결코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낯설지 않다고 해서 문장에 베어든 숲 향에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도.

대도시의 빈자의 행렬에 합류하게 되는 농촌을 등진 이들의 자리는, 더는 배를 부릴 수 없는 어촌의 군상들이 채우고, 그 비릿한 내와 함께 남겨지는 것은 그네들이 키우는 개이다. 김훈이 펼치는 이 순환의 역학관계 속에서 더는 물러설 길 없는 이가 담길 시공이 '숲'이 되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홀로 고독할 수 있는 무리 속의 개별성을 갖춘 나무들의 집합으로서의 '숲'의 입지와 역할을 여전히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인간사에 포개어, 개별적으로는 유려하기 그지없는 특유의 미문으로 상처와 고독의 핵심을 들춰내는 불온한 글의 숲은 괴괴하기 그지없다. 숲은 이미 겨울을 품은 지 오래-

지방 군청의 하급 공무원인 아버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일상적이고 조직적인 뇌물수수혐의로 수감된 채이고, 차분히 아버지와의 결별을 준비하며 신앙생활에 몰두한 어머니와의 단절마저 꾀하며 휴전선 부근의 수목원에서 세밀화가로서 계약직 공무원이 된 조연주는 세상에서 가장 압박적인 숲에서 사계를 보내게 된다. 비리의 정점인 윗선에 치이고 밑바닥 인생들을 직접 관리하며 악착같이 갈취했던 그 돈은 가족의 굴레를 유지해온 동력이었음을 부인할 길 없는 고로, 조연주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경멸과 황망함은 결코 편치 못한 단절의 일면이 된다. 진달래, 목련, 작약, 패랭이꽃, 옥수수, 서어나무, 겨울눈을 세밀화로 그려내어 영구보존해야하는 작업은 사진과는 다른 주관적 진실이 요구되는데, 그 오묘함은 단순한 이치를 곡해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부족함을 '세밀하게' 극대화한다.

순백의 작약을 들여다볼수록 번져 나오는 순수한 검은 빛깔을 재현해내는 것, 인간이 편의적으로 분류한 흰색의 무용함 따위와 씨름하며 그저 거기 피어있는 꽃들에 몰두하려는 그를 홀로 단절되게 놓아두지 않는 새벽이면 울리는 어머니의 강박적인 전화는 늘 불길하다. 출소한 아버지와 헤어지는 문제, 겹겹의 병마에 찌든 아버지의 예비 된 죽음, 불면, 넋두리, 또 넋두리. 가족은 단절될 수 없어서 고통스럽고, 고통스럽기에 외면하려는 욕망이 팽배해진다. 출소해서도, 사망에 이르러서도 비리공무원들과 경찰, 뇌물을 바치던 업주들의 커넥션이 만든 상조회의 보살핌과 배웅을 거부할 수 없는 낙인은 민통선 깊숙한 숲 속에 새의 먹이로 뿌려지는 순간까지 빛을 발한다. 말 그대로 씻어낼 수 없기 때문에 오욕인 것이며, 숲의 기운으로 덮고 풍화시킬 수 있을지도 여의치 않아 보일뿐. 오욕이란 처음부터 남는 자의 몫이기에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말이 더 한스러운 것이겠지만.

사진에는 담길 수 없고, 인간적인 해석이 담겨야만 비로소 불완전하게 '세밀'해지는 조연주의 작업은 숲의 사계의 생장과 더불어 무르익어가는 동안, 완벽한 생태적 순환의 숲과 대비적으로, 그가 버려두고 온 가족의 연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실패한 인간관계의 파편들이 무수하게도 감지된다.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을 지나치게 닮은 자폐아들을 홀로 키우는 상사 안요한 부자를 볼 때마다 인연의 광폭한 힘을 확인하는 조연주는 어쩔 수 없는 그 아버지의 딸임을 상기할 수밖에 없다. 새벽의 불길한 전화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넋두리 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시아버지의 늙은 말, '좆내논'의 불길한 기억은 아버지의 비루한 영락의 선고처럼, 숲의 생장만큼이나 확고하게 정해진 순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기 두 달 전에 격한 발정을 일으켜 온 마을이 보는 앞에서 생식기를 드러낸 채 발광을 해 '좆내논'이라고 불렸던 할아버지와 꼭 닮은 비루먹은 말이, 아버지를 태우고 갔다는 어머니의 흉흉한 꿈은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들어맞는다. 조연주가 몇 개의 계절 동안 좇은 수수하고, 화려한 저마다의 꽃은 개화의 농익은 순간 이미 절정의 시기를 지나버린 것처럼, 세상에 나온 모든 것들은 영락하고, 제 뜻을 온전히 전하지 못한 채 스러진다. 꽃이며, 나무 개개를 겨우 그려낼 만하다고 느끼는 순간, 숲은 한 귀퉁이만 떼어내 자각해버린 한계성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고 마는 것처럼, 인간의 유한성은 끈적이게 달라붙은 욕망의 잔재들을 동반한 채 그 협소한 몸부림으로 상처를 덧입는다.

"패랭이꽃 이파리는 가느다란 한 쌍이 마주 달린다. 그 이파리는 단순하고 또 명료하다. 그것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이 세상에서 부지하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만으로 가지런하다. 그 꽃은 가냘프거나 옹색하지 않다. 꽃에 대한 어떠한 언어도 헛되다는 것을 나는 수목원에 와서 알게 되었다. 꽃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때의 패랭이꽃은 세밀화로 그려내려면 그 '쟁쟁쟁;한 기운을 화폭에 옮겨와야 할 터인데 '쟁쟁쟁;이 물리적 구조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쟁쟁쟁;은 그 구조 너머에 떠도는 것이어서 화폭에는 좀처럼 내려앉지 않았다."(p.164)

숲의 질서 안에 존재하는 생명에 언어를 들이대고, 순간의 박제를 꾀하기 위해 화폭에 담는 것은 무용하다. 그러나 유한의 시간을 덧없이 사는 우리네는 그것이 문장이든, 그림이든, 구슬픈 노래든 자취를 남기고 무한의 시간 속에 자리 잡기를 갈망한다. 완벽한 순환법칙의 구현의 총체인 '숲'과 조연주가 머물렀고, 안요한이 남은 숲은 포개어지는 개념이 아니겠지만, 인간의 자취와 인연의 강대함은 숲이 간직한 질서만큼이나 견고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안요한의 아들 신우가 제 어머니와도 아버지의 반신을 제하고 꼭 닮은 것처럼 '좆내논'과 추레한 생을 더불어 살았던 할아버지의 내력은 아버지의 가는 길을 함께한다. 가족과의 단절을 꾀하며 강박적인 수목원에 틀어박힌 조연주가 한국전쟁 당시의 전사자들의 뒤엉킨 유골발굴현장을 세밀화로 남기는 작업을 하며 이끌린 정념들은 그를 다시 세상사로 돌려보내는 감각을 일깨운다.

겨울 숲의 겨울눈은 이미 꽃을 준비하며 극한의 시간 속에서 생명을 길러낸다. 나무 안에는 젊음과 나이 듦이 공존하기 때문에 강성하게 자라나는 것이 가능하다. 알 수 없는 향방으로 흘러가는 인생의 굴레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에는 부모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영원과 무관한 시간을 여전히 '비루하고 던적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인간 개개의 영락에는 상처뿐만 아니라 자생의 여지가 분명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추레한 나의 언어는 그 모든 것을 겉돌며 흩어질 뿐이라 해도. '쟁쟁쟁'.

나는 늘 부재였다. 나는 이 집의 한복판에 있는 여성적인 온기가 아니라 제로이고 영이며, 그것을 향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진공이고, 복도에서 소용돌이치는 싸늘한 바람처럼 숨을 죽인 희끄무레한 혼란이었다. 무시당해 복수심에 불타는.(p.8)

마그다의 죄라면 남아공의 네덜란드계 백인지주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일 테다. 끝내 아들을 낳아주지 못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마그다는 하인들 틈바구니 속에서 '부재'이자 '제로'인 채로 자라나 일평생 결핍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비대한 욕망에 시달리는 노처녀가 된다. 그래서 아버지가 풍만하고 교활한 새어머니를 데려왔을 때 음습한 어둠 속에서 도끼를 휘두르게 되는데-

그는 집에 새 부인을 데려오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그의 딸이고, 만약 나쁜 말들을 거둬들인다면 착한 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실패에 대해, 평생 실직적인 어둠에 갇혀 있어 구애의 방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 실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나는 그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뛴다. 하지만 나는 조용히 움직인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다.(p.35)

새 부인을 데려온 적이 없는 아버지와 여전히 유명무실한 존재감의 마그다가 공존하는 시공을 마주하면서, 이 이야기가 온전히 마그다 혼자서 구축해나가는 고립의 역사라는 것이 밝혀진다. 새 부인 대신 아버지가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은 하인 헨드릭의 새 색시 안나이다. 애욕에 찬 날들을 위해 농장의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아버지의 행동의 끝에는 아버지의 흑인 정부를 위해 수발을 드는 처지로 전락해버릴 마그다가 덩그러니 남는다. 도끼 대신 무거운 사냥총을 아버지의 침실 창문으로 쏘아버린 것은 과연 일어난 일인가, 다시 마그다가 창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광기의 역사인 것인가.

우리 중에 누가 짐승일까? 나의 이야기는 이야기다. 그것은 나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질문을 해야 하는 순간을 연기할 뿐이다. 덤불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내가 으르렁 거리는 소리일까? 공간이 나로부터 확장되어 지구의 네 구석 모두로 퍼져나가는 나라의 심장부에는 나를 막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미친 듯이 날뛰고 무절제한 내가 두려운 걸까?(p.97)

아버지를 부재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나니, 농장에서의 권력구도는 순식간에 전복되어버린다. 체불한 임금대신 마그다의 몸을 강탈하는 헨드릭에게 오히려 친근한 유대감을 애걸하기 시작하는 양상에까지 이르면, 일평생 잊힌 존재였던 여자가 어떻게 또다시 잊히고 철저하게 고립되어 가는지를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하인인 채로 마지못해 권력의 우위의 점하게 되다가 주인살해오명이 두려워 헨드릭과 안나가 도주하고나자 마그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공허한 나날들뿐이다. 세상의 가장 외진 곳에서 스스로의 역사를 자아내는 일 말고는 남은 것이 없는 여자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온통 모순에 차고, 자학의 광기로 넘실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내게는 얘기할 수 있는 형제나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하다. 역사와 문화가 필요하다. 희망과 포부가 필요하다. 행복해지기 전에 도덕의식과 목적론이 필요하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나는 나 혼자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다시 혼자다. 역사적 현재 속에서 혼자다.(p.229)

존 쿳시의 두 번째 소설인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으려는 순간부터 심신을 옥죄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또 어떤 문장들로 광막함을 자아낼 것인지, 자진해서 개미지옥으로 몸을 던지는 것 마냥 철저하게 몰아붙이는 날 선 문맥은 신경증의 향연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의아할 지경이다. 남아공 식민지배의 역사 속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의 형상을 그네들이 정착해 만든 '아프리칸서스'로 전하는 데 인색했던 목가적 전통의 기존문단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덜' 식민지적인 언어인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해왔던 쿳시가 모국어인 아프리칸서스를 결합해서 탄생시킨 이 소설은 식민지의 온상인 시골농장의 야만적인 본모습을 극렬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결국은 철저하게 자신이 구축한 역사 '나라의 심장부'말고는 가질 수 없던 마그다의 참상을 독백으로 전하면서 세상 어느 곳보다 외지고 고독한 변방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이다.(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