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에서 맞는 저녁, 아무 희망도 우수도 없는 잿빛의 긴 시간을 장님이 된 철학자로서 견디어냈다. 어떤 긍정적인 가능성, 이를테면 그것이 현학적인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또는 좀더 입체적으로 나아가 개방된 나선형의 방향구조에 따라 상호침투성을 보이며 즉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가능성의 지평을 발전시켜나가든, 그 어떤 방법론적 회의와 구체적인 이미지의 연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부정적인 세계관을 지탱하는 버팀목의 광적인 부정성을 체감하면서, 이런 염세주의적인 과정으로서의 생이 말미암고, 이와 똑같은 결과가 귀결될 수밖에 없는, 그런즉슨 부정성의 원환을 도는 입원환자의 주야장천, 그리고 그 비애의 부러진 이빨.
꿈에서 개천 맞은편의 인도를 걸었다. 강가는 오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하수였고, 강물의 흐름은 내가 걷는 방향과 꼭같이 앞으로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이 강을 비추는 안개의 모호한 흰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스모그 현상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전경이 시각적으로 명석하게 보이는 것이다.
조용한 흐름에 몸을 맡기며 시원한 내음의 방향(芳香)을 한가득 안으면, 어떤 형상적인 실재의 모형이 의식 속에 제시되면서 그것은 내 관념 저변을 살며시 미끄러진다.
벤치에 앉았다. 초연하게 가라앉은 슬픔이 그 자리에 있었다. 시적인 산문가에게는 때때로 비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문득 강하게 폐부를 치고 올라오고, 이윽고 심한 우울증이 엄습한다. 예술가든 철학자든 뜬금없이 발생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상과 같이 가차 없이 육박하는 추상은, 건강한 추상과는 다르게 그 생각의 깊이가 더 멀리 다다르고 더 반추적인 일종의 회상예술이며 그러므로 신경쇠약환자의 그것이다. 이는 비애 같은 정념과 함께 동반되어 우리를 어떤 공통된 시류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완전히 탈진해 벤치에 그냥 누워버렸다. 이 장면은 내가 스무 살 많이 아팠을 때의 기억이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마치 이 즉자적이어서 그 어떤 반성도 의식도 없는 사물인 벤치와 동류로 이행한 지 칠년이 지난 것이었다. 내 젊음은 병으로 인해, 아니 나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내게 열아홉의 끝자락부터 스물두 살 초까지는 기억하기조차 힘든 투병생활의 긴 편면이었다. 비록 거기에는 어떤 위대한 예술적 재능이 있었겠지만. 그러나 아는가? 나는 정신병원에 갇힌 환자다.
심지어 나는 담배 한 대 피우지 못하고 면회를 통한 드립커피이외에는 어떤 커피 한 잔도 생각할 수 없다. 난 때때로 어머니께서 방문해서 지난번 내가 개인카페에서 1kg에 깎아서35000원에 산 원두로 탄 커피를 음미했다. 커피로 말미암는 불안은 글쓰기의 원형으로 우리를 이끈다. 어머니는 기존 지식의 체계라는 호수에 어떤 새로운 지식이 떨어져서 물결 지었는지 조금 경도되어있었다. 그녀를 사로잡는 지식은 주로 돈이 되는 것 즉 경제의 이념적인 것과 의학의 비전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폭설이 내렸고, 하물며 빛나는 인식론적 중핵의 비전의 현현을 선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선험적 현상학’이라는 인식론에는 작용인들로 거슬러 올라감, 이른바 소급의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첫 번째 요인은 아니나 다를까, 육중한 공허,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무였다. 데카르트를 읽으니 이런 견지에 올바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규칙적으로 나오는 급식, 이거야말로 지상의 양식이다. 성모가톨릭병원의 정신병동은 동분서주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면회 온 자들과 면회를 당하는 환자를 보면서 이곳의 자유로운 면회시스템이 마치 내과와 같은 일반적인 병동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병원재정에 잉여가치를 남기려고 간호사와 보호사 수를 줄이고, 오래된 공공 물건들을 바꾸지 않는 이 가톨릭재단의 악취미. 가톨릭과 개신교 즉 기독교는 어느 방면에서 언제 봐도 돈에 굶주린 티가 나기분이 나빠지는 종교다. 그리고 나와 이 병원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양주에 이사 가서 거기서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곳이 대학병원이고 의사 겸 학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어머니께서도, 그리고 나도 한참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이런 방만한 운영과 소비자(환자)의 돈을 갈취하는 이런 태도는 실망과 슬픔만을 가져올 따름이다.
오로지 철학함, 엄밀하게 현상학함,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데카르트와 만나기. 나는 어릴 적에 역운과 영민한 머리가 충돌해 철학적 자질의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단순히 사유만이 중요할 뿐이 아니라 학문 전체를 망라하는 것, 언어의 귀재가 되는 것, 실천적인 장을 마련하는 것, 이러한 이상과 규범들이 내게 모종의 원리처럼 작용하여 나 자신을 구성하는 이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를테면 난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부정적인 인간상이 아니라 상황그자체가 부정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판단과 판단된 사태의 일치이다. 따라서 나는 이 상황으로부터, 그리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다만 이 흰 벽들이 나의 정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을 뿐….
L부교수는 Y레지던트 배후에서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한시적으로 내 주치의인 Y레지던트는 나의 진술을 토대로 상황(사태)들의 조각을 맞추어 나간다. 나는 그와 함께 상담하는 사십 오 분이 후련하기만 할뿐이다. 그것은 무더운 여름의 시원한 바람과 같은 것이다. 좌우지간 약의 방향은 신약 ‘심발타’의 순일한 방향으로 약정되었다. 나는 그 약이 중심적으로 쓰임으로써 다른 약들과 함께 나를 좋은 기분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약은 삼환계 항우울제(현재 임상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세로토닌-노르아드레날린 재흡수 차단제 : 그러니까 세로토닌 재흡수 비율에 비해 노르아드레날릭 성상이 강해서 치료효과는 진정 이중적 효과를 보인다.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간에 나는 약물이 좋다. 비록 내가 문예가이고 학인이자 구도자이지만.
방치라는 개념은 입원생활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정신과 환자들은, 그들은, 그들의 인권은 다른 과와 유비해서 최고도로 그들의 권리라든지 자유의지라든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는 인권의식이라든지 그런 유들이 결여되어 있다. 나 역시 그런 제도에 여러 방 맞은 희생자이다. 하지만 그런 점들을 상관하지 않는다. 종국 제자리를 찾았고 나는 단지 지금 이 지점에서도 나를 사는 것, 말하자면 이는 어렵지만 일반론적으로 본질을 사는 것, 이상적인 것(이념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도상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실재적인 것과 교호하며 나라는 대상적 실재를 매개로 삼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좀더 좋아져서 퇴원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나저제나 학문과 문예는, 그러니까 모든 것은 나를 위해 기다릴 것이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