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이 겨울에 접어들었다. 첫눈이 내린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겨울은 아니었다. 미풍이 불어 차가운 온도를 여실히 전해온다. 깨알 같은 공기가 핵의 폭발처럼 둥근 원형이 점차 넓어지는 형태로, 거침없이 순식간에 양주의 방방곡곡에 퍼져간다. 이런 대기를 음미하기 위해 코를 벌렁거리며 가만히 냄새를 맡아보면, 당연하게도 이 냉엄한 공기입자의 가운데서 관조할 도리밖에 없다. 그만큼 가을과 겨울 사이의 정감사린 쌀쌀한 날씨였다.
내가 사는 곳 뒤편은 완연한 시골풍광이다. 그곳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변두리의 대기이다. 나는 사뭇 타성에 젖어 그곳에 발을 드리운다. 무너져가는 폐가들, 까진 나무들, 눈 시리게 추운 날씨, 버려진 개, 도처에 있는 음습한 황무지들, 인적 없는 마을 도로. 반대로 새로 지어진 세련되면서 규칙적으로 지어진 이층 개인주택의 무리, 마을의 훈이 새겨진 큼직한 비석, 선명하게 내리쬐는 햇살, 집지키는 개들의 무리, 풍겨오는 삼겹살 굽는 냄새와 어느덧 보이는 마을 사람들, 붐비는 차들. 이러한 이중적 측면들을 가진 시골마을이 마치 병풍처럼, 내가 사는 아파트를 뒤편에서 위시하여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 미발전의 이곳은 늙었다는 느낌을 준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이십대를 다 보내게 된 것은 숙명론에 의거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된다.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봄이나 가을에도 제법 쌀쌀하며, 아침마다 중국에서 건너왔는지 찝찝한 기분을 주는 안개가 연막처럼 시야를 가린다. 어느 모로 보나 여러 해가 지나도 이곳에 정이 들지 않았다. 거기에는 오직 나쁜 기억들이 잔재하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처음 여기에 당도했을 때 너무나도 광막하고 넓은 대지가 냉정하리만치 무심한 느낌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빌어먹을, 요즘 세상이 극도로 탁월한 문예가이든, 극한의 앎을 구한 철학자이든 이를 세상에 공표해서 명예와 부의 감투를 쓸 필요는 굳이 없다. 심지어 나는 웬만하면 이 양주변경과 꼭 같이 분명히 어떤 장대한 역사가 있지만 이를 감추고 평범한 자태를 그리는 마을처럼 단지 한 명의 병약한 작가로 남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글쟁이라든지 구도자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심상이며 깨달음과 기교를 흰 여백에 담아내고 싶기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언어로써 역사와 대결하고픈 뿌리 깊은 생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한낱 지적 허영이라고 매도당한다든지, 작가를 희망하여 이를 말했다가 주변에서 철없는 놈이라고 뒷공론을 당하는 행태를 나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진지하게 독신자 생활까지 각오하고, 집안어른의 못난 놈이라는 쓴 소리와 개인적인 가난의 리스크까지 짊어지며, 오로지 자신의 대의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음마를 떼는 것을, 즉 역사 없는 한국학계와 문단에서 감히 모난 정이 되고자하는 바를 한국사회가 괄시하고 비웃으니, 미상불 이 나라의 역사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있었던 적이 없었으며, 일본의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철학자 한 명 배출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도 언젠가는 ‘천하제일 펜’이 나와야 할 것이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학문과 문예에 대한 넉살좋은 사회의 관심일 것이다.
후설은 ‘판단’과 ‘정초’를 일별했다. 여기에는 판단의 미분화가 관여한다. 판단은 ‘간접적 판단’과 ‘직접적 판단’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믿음이라는 후자를 전제하지 않고는 판단의 조건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직접적 판단(믿음)은 정초를 통해 규정된다. 나아가 판단을 반복시켜 생생히 복원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이른바 ‘인식’이다. 그리고 이 ‘정초’와 ‘인식’에 명증성이 부합된다는 것은 이것들이 의식으로 이행한다는 것이고, 이는 ‘사태 자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후설은 간과한 것이 있다. 만일 ‘사태 자체’가 부정적이고 암울함과 고통에 가득 찬 것이라면, 그 지옥이 진리에 가깝다손 치더라도 이는 이미 인간적인 이념을 결여한 비인간적 현상세계이다. 그것은 부정적인 현실의 아수라이고, 사유재산이라는 전체적인 권력을 향한 연대와 연대의 투쟁(물론 연대는 언제나 한시적이고 변화무쌍하다)이며 개체와 개체간의 빈부고하가 널 부러져 있는 세상이라는 이름의 부조리의 총체, 여기에 그는 어떤 식으로 참여하고 실천하여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구도자로서 인간해방을 이룩할 것인가?
우울, 이 쓴 커피는 던져버리고 싶다. 매연과 같은 담배, 쓴다는 것은 진절머리 난다. 따라서 사고한다는 것은 고뇌를 소유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무의미한 기표의 연쇄, 멍청하리만치 피곤하다. 어떤 한이 있다, 순수자아의 욕망이 산산조각난다는 것에서 심각한 우울은 찾아온다. : 그리고 지나가버린 시간들, 이런 특징들이 귀신보다 더 사악하고 무서운 것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현실을 이루지 못하고 저편으로 추락하는바 구제 불가한 개성을 잃은 늙어버린 영혼들….
밤, 즉 담뱃진을 발라놓은 것처럼 혐오스러운 검은 색깔, 또한 인류가 불을 얻은 까닭에 유쾌한 듯 들리는 소음, 그러니까 그야말로 정신의 계절, 요컨대 감성과 감각이 공진하는 천연의 사색의 시간, 어느덧 나는 밤을 내 시계(視界)너머로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