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여자]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저 책이 좋았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한글을 배우기 위해

 각종 학습지로 그림글자, 통글자, 자음, 모음 등을 익히곤 하는데..

 사실 나는 그런 것 없이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글을 배우게 되었다.

 IQ가 엄청나게 뛰어난 영재도 아니고, 지극히 평범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엄마의 독서 교육 덕분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유아학습지나 학습도구가

 다양하거나 풍부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책과 테이프 정도만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시절에 엄마는 내가 이해를 하든 못하든

 나를 무릎 위에 앉혀두고 책을 읽어주셨다고 한다.

 물론 기억할 수 없는 옛날 일이라서 나는 단지 사진으로만,

 부모님의 이야기로만 듣고 알 뿐이다.

 그렇게 엄마는 항상 책을 펼쳐놓고 동화책을 음성으로 녹음한

 동화구연 테이프를 틀어놓으셨는데, 어느날인가부터 내가

 책의 문자와 테이프의 음성을 인식해서 책장을 속도에 맞추어

 착착 넘기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서툴지만 엄마와 함께

 글자쓰기 연습을 시작했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한글을 깨우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그런 기억 때문인지 초등학교에 다닐 때도,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도 책을 항상 가까이에 두고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단지 책이 좋다는 이유로 대학에서도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물론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공 공부는 많이 다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더 자유롭게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었던 대학 생활은

 내 독서의 깊이감을 만족스럽게 채워줄 수 있었던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첫 직업으로 책을 만드는 일을 선택하게 되었다.

 내가 했던 일은 전공과 연관되어 국어 교육 관련 교재를

 연구, 출판, 편집하는 일이었는데 그 덕분에 책을 읽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보수를 받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내 작업 공간은 항상 수많은 책들로 뒤덮여 있었고

 교정을 위한 각종 국어사전과 띄어쓰기 편람,

 그리고 출판하는 사람들의 필수품인 빨간펜이 늘 책상 위에 놓여있곤 했다.

 처음에는 내가 ’가’라고 쓰면 정말로 책에 ‘가’라고 인쇄되어 나오고,

 ‘나’라고 고치면 또 책에 ’나’라고 수정되어 나오는 당연한 사실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을 정도로 그 일은 참 재미있고 즐거웠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서 손에 잡고 싶은 그런 일,

 이전까지는 단순히 독자로서 읽었던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과정도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고 또 그 생활이 몸에 배어드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 경험이었는지 모른다.

 비록 지금은 결혼과 함께 먼 도시로 떠나오면서 내게 일어난

 여러가지 변화들로 인하여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내 첫 직업에 대한 추억은 항상 설레이는 첫사랑에 대한 기억처럼

 아련히 남아있다.

 그래서 다시 내게 "책 만드는 여자”라는 타이틀을

 달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읽는 즐거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책이 함께 해 주었다.

 특히 왕복 3시간 남짓 걸리는 출퇴근길 지하철은

 내게 최고의 독서 공간이었고,

 또 지금의 남편과 데이트할 때도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참 많은 책을 만났었다.

 그렇게 내게 독서는 "취미"가 아닌 "생활"이었다.

 사실 누군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또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의 취미란에 나는 별로 오래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반사적으로 너무 자신있게 "독서"라고 썼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책을 읽는 행위가 과연 취미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여행을 간다거나 운동을 한다거나 하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날에 특별하게 즐기는 "취미"가 아니라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복되는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때부터 나의 오랜 취미 목록에서 독서를 제외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생활이 되어 책은

 내게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더욱 친근한 느낌으로 함께 해 주었다.

 [책이 있는 풍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무엇일까?

 에메랄드빛 바다, 하얀 눈꽃으로 뒤덮인 거리, 붉게 물드는 저녁 노을..

 물론 모두 다 가슴 벅차게 하는 환상적인 풍경들이다.

 하지만 책이 있는 풍경이야말로 그만큼 더 의미있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끔 여행지에서 만나는 책이 있는 도서관을 보면

 두근두근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에 다녀온 부산의 태종대.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는 그 곳의 등대 아래에

 ‘해양도서실’이라는 반가운 간판을 발견하고 들어가 보았다.

 비록 낡고 오래된 책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런 곳에 관광객들을 위해

 책을 마련해둔 배려는 참 인상적이고 감사했다.

 잠시 앉아서 바다를 마주보면서 책을 읽는 기분은

 마치 길을 가다 우연히 오래 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선물이었다.

 지난 가을, 유럽 여행에서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나는 외국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서점에 들러보곤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여행지의 유명한 관광명소를 찾아보는 것도 좋지만,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고 있으면 왠지 그 나라의

 다양한 풍습이나 문화를 알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다.

 세련된 현대식의 대형 서점도 좋고

 뒷골목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헌책방도 좋다.

 어차피 읽을 수 없는 생소한 언어로 쓰여져 있는 책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왠지 모를 만족감이 느껴진다.

 카메라에 담아올 수 없었지만 이탈리아의 서점들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내부 공사로 인해 3년간이나 개관을 하지 않는다는

 바티칸도서관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다시 찾아오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해 두었다.

 또 학생이 아니라서 들어갈 수 없었던 빈 대학의 도서관

 건너편 복도에서 몰래 창문 너머로 훔쳐보던 저 쪽 세상의 모습들...

 그리고 작년에 다녀온 홍콩 스탠리 입구에 있던 도서관과

 드라마 "궁"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마카오 꼴로안의 도서관은

 여행지에서 찾은 또 하나의 즐거움으로

 내게 감동의 순간을 전해준 곳들이다.

 [책과의 아름다운 동행]

 책과의 아름다운 동행.

 내가 있는 그 곳에 늘 따라와 주었던 책은

 어쩌면 처음부터 내게 연애의 대상이 아니라,

 결혼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보니 밤에 자기 전에도 꼭 손에 잡고 몇 장 읽다가

 머리맡에 그대로 놓아두고 잠이 들 때가 많았으니..

 지금도 남편과 함께 쓰는 침실 옆 협탁에는 항상 책이 우리와 함께 있다.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각자 책을 읽기도 하고,

 읽다고 좋은 구절이나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나오면

 소리 내어서 서로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혼자 읽는 책보다 이렇게 같이 읽는 책이

 더 의미있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책과 우리 부부, 이렇게 셋이 함께 살고 있는 우리집에

 더 많은 책들로 가득하기를 소망해본다.

[가장 행복한 선물]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고 행복한 선물.

 누군가 내게 책을 선물해 줄 때 나는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내 취향을 아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 받은 수많은 책들을 서재에 보관하고 있고,

 그런 까닭에 이 방은 우리 신혼집 중에서

 내가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공간이다.

 아직은 작고 아담한 집이라서 책을 수납할 공간이 다소 부족해서

 각자 친정과 시댁에서 아직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책들도 많고,

 창고에 어지럽게 쌓아놓은 책들도 많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제 자리를 찾아 깔끔하게 정리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

 오늘도 나와 책과의 아름다운 동행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