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토계마을에서 시를 쓰다.
‘잡영’이란, 이러저러한 흥취가 생겨날 때, 즉흥적으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지어내는 시를 말한다. 그리고 퇴계 이황 선생이 말년에 토계마을에서 은거하며 지은 잡시들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이 책 [퇴계잡영]이다.
퇴계선생의 잡영을 읽고 있으면, 선생이 마치 도인이 된 듯 속세를 벗어나 산골짜기에 거처할 수 있는 작은 집을 지어놓고, 산과 개울 그리고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 등을 벗 삼아 자신의 즐거움을 토로하는 부분이 자주 나온다. 이렇게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집안에 함께 있는 만 권이나 되는 책을 통해서 옛 성현들과 만나는 것이다. 만 권이라는 책의 권수가 지금도 엄청난 것인데, 조선시대에 그만한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학자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자신이 뜻을 세워 나라의 충신으로 일했던 지난날들을 후회하는 듯 한 글이 몇 편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욕심을 내지 않고 재야에 묻혀 학문만 탐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한 숨 섞인 한탄을 자주 볼 수 있다. 아마도 정치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자신이 세웠던 뜻대로 되기보다는, 권력욕과 당파싸움에 이리저리 치이고 치여서 제대로 된 치국정치에 큰 관여를 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했으리라는 안쓰러움마저 들기도 했다.
병약하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걸로 봐서는 토계마을로의 이주는 심리적, 육체적인 요양을 위해서 고향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집이 생겼다는 고백에 선생이 한 평생을 얼마나 욕심 없이 사셨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었다.
또 직접 거친 땅을 개간하어 농사를 짓고 일하면서 소소한 일상과 기개가 엿보이는 부분이 자주 나온다. “집에 앉아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듣자니 그 소리가 마치 순임금과 황제의 음악을 듣는 듯하다. 산골이라 집 주변에 산나물이 많아 햇나물을 뜯어 와서 푹 익히니 그 맛이 또 일품이라”
“가시나무와 잡목을 엮어 소박하게 만들어 놓은 삽짝문은 아무도 찾아오는 이들이 없어 고요하기만 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한데, 집 안을 살펴보니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재산인 도서가 사방 벽에 가득 꽂혀 있다. 책을 지은 옛 사람들은 모두 지금 함께하지 못하나, 그들이 남긴 말로 가득 찬 책들은 여전히 살아 말을 하듯이 향기가 가득하다. 내가 이곳 궁벽한 시골로 온 것이 속세의 사람들을 피하여 공부에 전념하고자 함이니, 오로지 바라는 것은 공자가 말한 곧고 신실하고 유식한 세 부류의 벗들이 내가 있는 이곳으로 찾아와 함께 성인들의 책을 읽고 담론도 하는 것이다.” 자신의 남은여생을 학문과 토론하는 것으로 보내길 바라시는 선생의 의지가 가득하다.
시 중에는 옛 성현의 시에 화답하는 글, 벗과 나눈 글, 자녀들에게 남기는 글 등도 담겨있다.
퇴계선생의 글이 한시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하여, 한문 원시의 한글 번역 뒤에 다시 산문으로 내용을 풀어 놓았다. 그래서 다소 시를 읽어 나가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으나, 원문과 한글번역을 뛰어넘어 산문만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또 원문에 대한 주석이 달려있어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글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퇴계선생의 여러 글 중에서 책으로 접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다른 [퇴계선생문집], [도산전서], [퇴계전서] 등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읽게 되었다. 설명에 의하면 퇴계선생이 평생 동안 썼던 한시가 대개 2,000수 이상, 편지는 1,000통 정도 책을 통해서 소개되어있다고 한다. 하지만 문집에 수록되지 않고도 전해져 오는 시만 수백 수가 된다고 한다. 문집에서 빠진 것들 중에는 승려들에게 지어준 시들과 아들이나 조카 등 가까운 사람들에게 집안 살림살이에 대하여 논의한 가서같은 것들이 있는데, 퇴계문학연구원에서 기존 문집에서 누락된 사본을 모두 모아 [정본 퇴계전서]를 편집 중에 있다고 하니, 조만간에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완성된다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퇴계 선생에 대한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 얻게 될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참, 오랜 만에 읽어본 한시였지만 한시를 읽을 때마다 조상들의 풍류와 여유로움과 가난하지만 올바른 뜻을 갖고 살아가는 기개 등을 느낄 수 있고, 마치 나와 벗이 된 듯한 감정을 갖게 해서 너무나도 좋았다. 퇴계선생의 여생이나 그의 글이 궁금하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며, 여유로운 기분전환이나 옛 성현들과의 서정적인 만남을 원한다면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퇴계선생의 한 시는 너무나 맑고 깨끗하고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나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 보이며 시원하게 정화시켜서, 마치 삼림욕을 한 것 같은 기풍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