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가 그림을 소개한다고?

처음에는 책을 보고, '수녀'와 '그림'을 쉽게 연결시키기는 어려웠다.

고개를 갸우뚱~흐음~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그 묘한 조화.

 

내가 수녀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고립된 조용한 공간, 무채색, 텅 빈 공간에서의 낮은 울림 같은 것들이다.

물론 파격적인 '시스터 액트' 속 수녀도 있지만.^^

그에 비해, 그림은 보다 자유롭고 화려하다는 느낌이 많아서, 수녀가 그림을 소개한다는 것이 언뜻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성서의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들도 많잖아?

오래 전 그림들은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나 경건함을 많이 담고 있기도 하고. 그렇네.

 

책은 웬디 수녀가 리버풀,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솔즈베리 근교의 윌턴 하우스, 버밍엄, 에딘버러, 이렇게 여섯 곳의 미술관을 돌아보며 몇몇 그림을 선정해 소개하고 있다.

미술관 선정도 그렇고, 그림 선정에 있어서도 이유를 글로 써 주었는데, 곁들어진 건물들, 그림들 사진과 함께 보니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렇게 지면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면서 수녀님의 차분하고 따뜻한 음성으로 설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책에는 구성상 해설이 짧게 실린 듯해 아쉬운 점도 있었고.

 

그림은 보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배경지식은 어느 정도 필요한 것 같다.

그림에는 역사, 신화, 종교 등 많은 것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기에, 그저 별 생각 없이 딱 그림만 보고 맘에 들어, 별로야 말하는 것은 조금 가벼운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니 확실히 답답한 점이 많더라.

그림의 기술적인 면이나 시대상황, 담고 있는 메시지, 화가의 숨겨진 의도 등 여러가지 부분을 자세히 모르기도 하고, 진짜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겨서.

 

이번 책에서 결정적으로 건진 것은 '니콜라 푸생'이라는 화가이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땐 별로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움도, 강렬함도, 특이함도 느끼지 못해서, 아마 다른 책에서 먼저 봤다면 금방 머리에서 잊혀졌을 지도 모른다.

<포키온의 재가 있는 풍경>이라는데, 뭘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하고 있었는데, 수녀님의 설명을 읽고 다시 한 번 그림을 꼼꼼히 살펴보다 보니, 이럴 수가.

점점 좋아지잖아.

꼭꼭 씹어먹는 맛이 있다고 할까?

어쩌면 그렇게 하나하나 의미를 두고 섬세하게 배치해 놓았는가.

멀리 보이는 화려하고 높고 견고한 성, 주변의 어두침침한 숲, 그 가운데 희미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듯한 아내.

남편의 재를 쓸어담는 그녀의 심정은 어떠할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눈 앞에 그 그림이 그려져서 뭔가 가슴이 벅찬 기분이다.

이 책 이후로 다른 책 읽다가 '니콜라 푸생'의 그림이 나오면 눈이 딱 멈춘다.

구도, 배치에 있어서는 정말 감탄만 나온다.

이렇게 좋아하는 화가도 생기게 해 주고, 그림도 더 사랑할 수 있게 해 줘서 수녀님께 감사하다. 또 봐요, 수녀님!

 

p. 100 우리가 그림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할 점 중의 하나가 바로 솔직하게 작품을 대하지 못하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대한다는 것이다. 그림 설명을 먼저 보고 그 설명의 범위 내에서만 작품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편한 방법을 택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솔직한 반응을 믿지 못하고 이미 받아들여진 견해 뒤로 숨어버리는 방법 말이다.

→수녀님, 전 너무 솔직하게 작품을 대해서, 어디선가 그림 설명을 좀 주워들어야 할 것 같아요.ㅋㅋ

이 책은 '쉬어가는 페이지' 쯤에 해당한다고 할까?

낙엽의 색과 바스락거림, 공중을 유유히 떠다니는 작은 먼지들이 생각나는 책이다.

고만물상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담담하면서도 특이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 특유의 그 정적인 느낌이 책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기도 하고.

 

나카노네 고만물상에는 스피드, 흡입력, 엄청난 사건! 은 없다.

그저 잔잔한 일상.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 간의 미묘한 관계와 눈치 싸움만이 존재한다.

확실히 캐릭터나 전개방식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고만물상이 주는 그 느낌은 인상적이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서툴고,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보이는 사람들.

어정쩡한 관계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좀 답답하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더없이 현실적인 것 같다.

나는 현실도피를 위해 책이나 영화 등을 만날 때가 많아서, '나카노네 고만물상'이 주는 것과 같은 느림과 고요는 좀처럼 즐기지 못하지만, 이런 공간과 시간을 만나는 것도 가끔은 필요할 테지.

 

"빨리빨리"에 맞춰 움직이는 한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신기술이 개발되어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른 요즘 이 시기.

조금은 느긋하고 태평한 시간을, 그리고 초침소리만이 지배하는 조용한 공간을 자신에게 선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집 안 구석구석을 헤집다 보면, 우리 집 어딘가에도 조용히 잠자고 있던 고만물상이 있을 지 모른다.

잊고 있던 사진들, 장난감들, 낙서들. 오늘 하루 나만의 보물찾기 놀이를 해 보는 건 어떨까?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책!

어쩌면 이렇게 귀여운지~

책의 그림체는 어쩐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과 비슷해보였다.

둥글둥글 촌스러워 보이지만 귀여운.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만 알고 봤는데, 지금 다시 여기저기 찾아보니 오~ 뭔가 대단하신 분이다.(일본 융심리학의 제 1인자, 일본 문화청 장관.)

그런 하아짱의 어린 시절은 따뜻하고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어릴 적 기억들도 하나둘씩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전학을 올 때까지 난 자연과 함께였다.

집 바로 뒤엔 나즈막한 산, 아랫 동네 아파트까지는 울창한 나무 숲 사이로 난 흙길, 봄에는 수줍게 피던 예쁜 들꽃들, 여름에는 시원하게(?) 울던 개구리들, 가을엔 저 너머에서 논에서 흔들리던 황금색의 벼 물결, 겨울엔 눈이 소복하게 쌓였던 장독대들.

살이 통통하게 찐 토끼에게 모이를 주기도 하고, 나팔꽃으로 귀걸이도 만들고.

밤에 길 한 가운데 가만히 있는 두꺼비가 신기해서 같이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하다가, 계속 가만히 있는 것이 지루하기도 하고, 혹시 죽은 건가 싶어서 긴 나뭇가지로 벌레를 끌어다줘도 녀석은 가만히 있더니만, 어느 순간 휙- 하고 앞을 기어가던 살아 있는 귀뚜라미(?)를 한 입에 꿀꺽! 참 인상적이었지.

 

음.. 이 책은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딱 말해줘서 속이 시원했달까.

"하아 짱, 남자라도 정말 슬플 때는 울어도 괜찮아!"

꼭 '정말 슬플 때는' 이라고 한정하지 않더라도, 남자도 울어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뭔가 조건을 붙여서 감정을 억압하는 것, 필요한 일일 때가 많지만, 그래도 너무 괴롭잖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질질 짜는 것은 남녀노소 무론하고 난감하지만.

 

하아 짱이 도토리 생각하면서 울고 있는데 타토 형이 "사나이답게 눈물을 버려라~." 하고 노래를 하는 장면에선 바로 푸하핫.

직접 그 노랫소리를 듣고 싶다. 더 웃겼을 텐데.

 

중간엔 일본 군대 이야기가 나오는데,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그 시대 일본은 군국주의 같은 것들이 시대적인 흐름이라서 그런 면도 있었겠지만.

 

작가의 마지막 글이 되어 버린  '울보 하야오'는 안타깝게도 미완성이다.

하지만 글로 완성하지 못한 그 나머지 시간들, 추억들은 영원히 반짝반짝 빛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