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었다.

하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

처음은 일본 드라마였다.

반복해서 보여주던 붉은 태양이 지금도 생각난다.

분명 어두운 드라마인데, 태양이 끊임없이 나왔지.

어쩌면 그 태양 때문에 그림자가 짙어지는 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렇게밖에 살아갈 수 없는 걸까.

정말 끝은 있는 걸까.

함께 손을 잡고 낮의 거리를 걸어갈 수 있는 걸까.

 

드라마를 다 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백야행 영화 개봉 소식이 들려왔다.

사실 영화로 따지면,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시선으로 풀어낼까, 드라마의 그 긴 이야기를 짧은 러닝타임에 어떻게 담아낼까 궁금했기에 결국 보고 말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마음이 아팠다.

드라마도 그랬지만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았다.

베드신조차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정말 괴롭고 고통스럽게 보였다.(고수씨를 다시 보게 만들기도 했다.)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서, 책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을까 무섭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구매해 놓은 백야행 세 권은 책장에서 오랜 시간 기다림의 미학을 맘껏 느끼고 있어야만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1권을 집어들게 되었다.

의외인 건,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가 오히려 원작과 가깝게 느껴졌다는 것.

일본 드라마는 책의 내용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든 것 같다.

어느 쪽이든 퀄리티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 영화, 책 세 가지를 모두 보길 잘했어.

 

마지막 여정.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을 펼치며, 이제 그들과 함께 하얀 어둠 속을 걸어 본다.

여행.

완벽과 안전제일을 추구하는 극도의 위험기피자인 나에겐 막연한 환상과도 같은 단어다.

얇고 작은 책은 "이건 너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야."라고 속삭이며 나에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고,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덜컥 손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금방 읽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읽다 보니 해설이 나왔다.

끝인 것이었다. 뭘까, 이건. 영혼이 갈피를 못잡고 두둥실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하긴 일상이 그렇다.

훌쩍 떠났다가, 싫은 사람도 만났다가, 다시 돌아가려고 한 발 내디디기도 하는.

어찌 보면 허무하기도 한.

 

표현은 현실같았다. 정말 이런 장소, 이런 사람이 있을 것 같은.

TV에서 가끔씩 본 적이 있다. 외국의 게스트하우스들.

무언가 알 수 없는 개인 물건들로 어질러진 좁은 공간에서 어제 오늘 만난 낯선 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

크아~ 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공간.

숨겨야 할 것도 많고, 방해하기고 방해받기도 싫고,상대를 잘 믿지도 못하는 나에게는 무리인 그 공간.

하지만 분명히 그 속엔 내가 알지 못하는, 미처 체험하지 못한 매력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을 테지.

나도 참, 언제까지 고슴도치로만 살 수 없는데 말이야, 응?

 

여행자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과 동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읽다 보면 어느새 도쿄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자리 꿰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p.9 가다, 계속해서 전진한다,는 것은 확실히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매력적인 이유는 돌아갈 곳이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읽었던 책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선물하는 경우는 자주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선물하기 위해 읽게 된 특이한 경우다.

지인의 생일이 가까워올 때쯤, 받고 싶은 선물이 있냐고 물어봤을 때, 숫자와 관련된 책을 원한다고 해서 고민을 꽤 했다.

그러다가 눈에 띈 것이 요녀석!

획기적인, 흡입력 있는, 눈을 뗄 수 없이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잔잔하고 따뜻하게 와닿는 책이었다.

 

박사 캐릭터는 분명 특별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배경이나 설정들은 무난한 편이다.

80분짜리 기억도 사실 이 책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리뷰들을 살펴보니, 이 책을 통해 떠올리는 것들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더라.

난 '드류 베리모어'가 출연했던 <첫키스만 50번째> 영화가 생각났다.

사고로 인해 한정된 기억, 그런 가운데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

슬프지만, 아름답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이야기.

(리뷰 다 쓸 때쯤엔 필사적으로 계산해나가던 <썸머워즈>의 겐지가 문득 떠올랐다.)

 

일반적으로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수학을 실생활에 적용해, 언뜻 일방적으로 보일 수 있는 대화를 한다는 것은 참신했다.

아, 이걸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기도 하고.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숫자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며, 차가울 수 있는 검은 색 숫자 아이들이 내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따뜻한 손을 내미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쩐지 짠~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어질 때가 몇 번 있었다.

 

그 와중에 p.15의 묘사에서 박사가 미남이었던 흔적을 찾아내는 나를 보며, 아~ 역시 난 외모지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하며 좌절하기도(?) 하고.

p.22에서 가정부를 기억하기 위해 서둘러 얼굴을 그리는 박사를 보며 애잔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서 애매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나저나 박사님이 말만 꺼내면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 좋아서.

만나고 싶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처럼.

그러고 보면, 미망인에게 시동생인 박사도, 나름대로 도련님이다.

내 취향은 진정 도련님인 것인가? 잠시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다.(ㅋㅋ)

 

p.72에서는 루트가 태어나기 전 은퇴한 야구선수를 알게 된다.

자신의 기억이 과거에서 멈춰 있기에, 미래를 알아버린 것처럼 되어버렸을 때, 그 놀라움과 서글픔이란 내가 미처 상상할 수 없을 정도겠지.

p.255 "80분짜리 테이프는 이제 망가졌어요. 지금 도련님의 기억은 1975년에서 꼼짝도 못해요."  p.256 대신 목에 걸고 있는 야구 카드가 박사의 상징이 되었다.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박사님. 기억상실증에 걸리기도 쉽지 않지만,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드라마, 영화, 책에서는 꽤나 흔하게 쓰이는 소재지만, 현실이라면 참 무서운 일이다.

누구를 믿어야 할 지도 모를 텐데.. 혼란스럽기만 하고.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은 꼭 대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눈빛, 표정, 몸짓, 그리고 여기엔 수식이 있다. 박사가 내미는 그만의 오른손을 따뜻하게 잡아보자!

 

p.14 그에게 숫자는 상대방과 악수하기 위해 내미는 오른손이며 동시에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코트였다. 아무리 더듬어봐도 몸의 선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두껍고, 무겁고, 그 누구도 벗길 수 없는 코트. 그 코트만 입고 있으면 그는 자신이 있을 곳을 확보할 수 있었다.

 

p.26 물론 제일 먼저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증명은 아름답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p.41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p.65 "왜 찾아내지 못하는 걸까요?"

       "이유는 신의 수첩에만 적혀 있어."

 

p.121~122 "몽당연필로 메모를 해서 몸에 붙이는 박사님을 보면, 나는 막 눈물이 날 것 같더라." "왜?" "외로워 보이니까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