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극장에서 2D애니메이션은 보는게 얼마만인지. 디지털의 깔끔한 녀석들이 매년 나와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던중 추억속의 그녀가 내게로 왔다. 개봉전부터 기다려 왔더랬다. SICAF(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에 개봉했을때부터 <초속 5센티미터>랑 이 작품은 영화관련기사를 보면 절대 빠지지 않는 작품중 하나였다. 그놈의 알바때문에 SICAF때 보지 못했던 그녀가 드디어 내게로 왔다. 나는 설레이는 마음을 가슴에 담아 그녀와의 첫데이트를 위해 CGV용산으로 달려갔다.

 

 

 

 영화를 보고나온 나의 마음은 짧지만 행복했던, 그런 연애를 하고 난 기분이랄까? 울고 웃고 안타까워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에는 사랑하지만 어쩔수없이 보내야만하는, 하지만 질질 짜거나 지긋지긋한 이별이 아닌 눈이 찡하긴 하지만 웃으며 보낼수있는 그런 이별을 하는 느낌이었다. 또한 크레딧과 함께 나오는 스틸컷들은 한참뒤에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앨범을 꺼내보며 괜시리 눈물겨운 미소를 짓게되는 그런 경험이었달까? 연애의 느낌을 제쳐두더라도 이 영화는 청춘의 활기와 빛나는 순간들을 너무나도 잘 포착해 곳곳에 예쁘게 담아두고 있었다. 분필로 쓰여진 판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아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그늘에 앉아 수다를 떠는 아이들 등 반짝반짝 빛나지만 아련한 순간들을 너무나도 예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난 뒤 타임리프에 대해 물리학적 토론을 하거나, 도대체 걔의 마음은 뭐였던거야!! 라며 열을내며 토론할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나의 지옥같던 고딩생활에서 몇안되는 빛나는 순간들만을 예쁘게 추억할 수 있게해준 순간들에 미소짓고 얼마가 지나서 떠올리더라도 괜시리 행복한 여운에 젖어들게 할수있는 그녀에게 고마워할뿐이다. 요즘같이 "하아.. 진짜 볼꺼없다..-_-"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때에 간만에 영화와의 행복한 연애를 한거같아서 너무 좋다♥

언젠가 이런생각을 하곤했다. 일련의 액션영화들에서 너무나 쉽게, 소모품처럼 죽어가는 사람들(추격 신에서 꼭 산산조각 나는 귤 리어카, 지나가다 괜히 총에 맞는 행인들)을 보면서 '저들도 저마다 누군가의 부모, 친구, 애인 등의 삶이 있었을 텐데 무책임하게 짓밟아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 그래서 농담 식으로 종종 이런얘기를 하곤했다. 누군가의 인생을 내내 보여주다가 그 사람이 너무나 허무하게 위의 예들처럼 죽어버리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뭐 한참뒤에 오스틴 파워에서 비슷한 유머를 구사한걸 보고 '쳇'하며 웃어 넘기긴 했지만. 그러고나서 그런 생각들은 잊고 살았었다. 그러던 어느날 운명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미야베 미유키(별명은 미미여사)의 <모방범>과 <이유>. 내가 생각했었던 그 작업을 미미여사는 나처럼 단순하지 않고 너무나 철저하고도 공고한 필력으로 소설을 완성 시켰다. 소설 <이유>에 이런 부분이 있다.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 모으듯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인다.

 

폭심지에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각자의 가족, 친구와 지인, 나아가 목격자, 경찰의 탐문을 받는 사람들,

 

사건 현장에 출입하던 집금인, 신문배달부, 요리배달부등 헤아려 보면

 

한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새삼 놀랄 정도다."

 

 

 

 해설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소설은 몇개의 착종된 수수께끼를 푸는 이야기이자 '하나의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를 풀어내 보는 이야기" 이다. 위의 인용부에 이어지는 부분을 더 써보자면

 

 

 

"물론 이 사람들 전부다 사건에 등거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서로 관계 맺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바로 옆 방사선 끝에 있는 다른 관련자하고는

 

전혀 면식이 없는 경우도 많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예전에 삼촌이랑 술을 마시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유명인 들의 기가 막힌 표현들을 보거나 읽고서 '아!! 나도 저런 생각을 분명히 했었는데 왜 나는 저렇게 표현하지 못했을까'라며 시샘 섞인 푸념을 한 적이 있다고. 저 부분들을 읽으며 나는 이 달콤한 패배감을 느꼈다.

 

 

 

 <모방범>과 <이유>, 이 소설들은 분명 살인사건을 다룬 미스터리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살인사건을 다루는 작품들과는 다르게 희생자 한명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처음 읽었을 때는 지루하다고 느껴질 만큼 수많은 인물들의 사연, 더 나아가서는 인생들을 꼼꼼히 보여주고 언급해준다.(이 때문에 이 두 소설의 두께는 꽤 두껍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유기체적인 연관들을 맺으며 커다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내가 가장 감탄하고 반한 지점이 바로 이 것이다.

 

 

 

 책장을 덮을 때마다 너무도 벅차고 깊은 여운이 남았다. 어찌 생각하면 지루하고 긴 이 소설들에 내가 이리도 매료된 건 맨 처음에 말했던 나의 유치한 마음(희생자 어쩌고)을 미스터리라는 장르 안에서 이리도 깊고 멋지게 표현해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작가의 소설이라곤 이제 고작 <이유>, <모방범>이렇게 두 편을 읽었을 뿐이다. 내가 읽은 건 사회파 미스터리에 속하는 단 두 작품뿐이다. 미미여사의 작품세계는 시대추리, 가족물, 심지어 게임소설까지 넓고도 공고하다.

 

 

 

"훗. 기쁘다."

미국 최고의 비평 사이트인 로튼토마토 닷컴에서 100점 만점을 받았다느니 부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이라느니 올해 가장 아름다운 공포라느니 이런저런 떡밥아닌 떡밥에 끌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끌렸던 이유는 스틸컷이나 예고편에서 보았던 압도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황량한 아름다움 이랄까? 눈덮힌 하얀 풍경에 그보다 다 창백한 소년의 얼굴색. 거기다가 왕따인 소년과 뱀파이어 여자아이의 로맨스라니. 이건 뭐 파를로프의 개가 침을 흘리듯 그저 조건반사적으로 극장을 향해 갈수밖에 없었다.

 

 

 

 실제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나의 이런 기대는 전혀 배반되지 않았다. 영화는 배경만큼이나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서늘함과 앙상한 아름다움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는데는 배경이나 스토리뿐만 아니라 아역들의 연기도 매우 큰 공헌을 한다. 게다가 영어가 아닌 생소한 스웨덴 어라서 그런지 "천국보다 낯선" 어떤 묘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이야기를 보자면 사실 난 이 영화가 성장담일꺼라 생각했다. '왕따 소년이 뱀파이어 소녀를 만나 첫사랑에 눈뜨며 자신의 자아를 찾고 용기를 내어 한단계 성장을 하게 되고 어느날 뱀파이어 소녀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후에 소년은 그 뱀파이어 소녀를 회상하며 자신의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일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한 가장 잔혹한 사랑이야기였다.

 

 

 

 이러한 생각이 들게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누군가는 "충복", 누군가는 "아버지"라고 표현했던 중간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호칸'이라는 케릭터 때문일 것이다. 이엘리를 위해 대신 살인을 저지르고 얼굴이 들켜 이엘리에게 위험이 처할까 두려워해 얼굴에 염산을 붓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결국엔 자신의 피를 바치고 죽음을 택하는 호칸. 하지만 그를 대하는 이엘리의 태도에는 그저 조금 아끼는 충성스런 하인, 아니 어쩌면 그저 조금 귀찮은 짐덩어리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그도 분명 처음에는 이엘리에게 구원받은 한 소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2살에서 멈춰버린 생생한 자신의 연인의 육체에 비해 점점 비루해지고 추해지기만 하는 자신의 육체앞에 왠지 자책아닌 자책을 했을 것만 같다. 그런 면에서 이엘리는 점점 그에게 흥미를 잃던 와중에 발견한게 오스칼이 아니었을까? 그렇기때문에 너무나도 행복한 얼굴로 모르스 신호를 주고받던 오스칼의 모습을 보여주는 엔딩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말의 불안감과 미세한 파국같은 걸 느낀게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에 '나중'이라는 조건을 대입했을때 그 사랑이 얼마나 초라해지고 아무것도 아닌것이 되어버린다는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나역시 그당시의 순수한 감정만을 봐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내가 아닌 관람자로서 타인의 사랑을 감상(?)하는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나 자신은 절대 할수 없는 행동들을 남과의 연애상담에선 너무나 쉽게 내뱉는게 아닐까.

 

 

 

 뭐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간만에 나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킨 영화에 대해 써보았다. 처음엔 cgv 6개관에서 소규모 개봉되는 예정이었는데 입소문인지 전국으로 확대되어 개봉했다. 사실 난 이 영화가 일주일도 안되서 1개관에서만 교차상영을 하게 될줄 알았다.(실제로 개봉 2일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3회이상하는 극장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나쁜영화인지는 분명 보는 관객들에 따라서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것이다. 하지만 현재 개봉중인 영화, 아니 올해 개봉한 영화중에 매우 독특한, 매우 신선한 영화임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수의 대박영화와 다수의 쪽박영화가 난무하는 지금, 표현이 조금 격하긴 하지만 이런 스웨덴의 듣보잡 영화가 개봉하는 것만으로 감사해야하는 이 아이러니한 지금에 문득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찢어진 입술에서 배어나오던 피맛과 같은 비릿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