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누구 있어요?

 

 

(200자원고지 80매)

 

여긴 어디지?

두개골이 깨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왔다. 나는 고갤 좌우로 흔들며 지끈거리는 머릿속을 헤집어봤다. 온 사방에 희미한 빛줄기 하나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솥뚜껑 같은 손을 허공에서 저으며 허우룩한 방안에서 스위치를 찾아 헤맸다. 지금까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낯선 공간이었다. 어둠속에서 걷다가 미끈거리는 벽에 얼굴을 부딪쳐 코가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나는 코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연속으로 두 눈을 깜박였다.

지난밤에 영호와 함께 거하게 취해서 잠이 들어서 그녀의 집에 온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짙은 어둠과 적막함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아직 영호의 집에 있는 건가?

머릿속으로 영호 집에 있던 가구의 배치들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공간은 너무 협소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 헛헛하기만 했다. 좀 전에 벽면에 부딪혔을 때 벽면이 미끈거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시멘트 벽 같지가 않다.

나는 손을 쭉 뻗어서 벽면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미끈거리는 느낌이 꼭 유리 같다. 그렇지만 너무 어두워서 확인이 되지 않으니 갑갑할 뿐이다. 어젯밤에 소주 두 병을 혼자 마셨더니 속도 울렁거리고, 입 안에서 나는 알코올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다시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당장 씻을 공간이 있다면 씻고 다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싶다.

어젯밤에 영호와 함께 있었다면 그녀도 함께 있을 건데 지금 곁에 있어야 할 영호는 보이지 않았다. 낯설고 협소한 공간에 나 혼자 갇혀 있다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유리벽을 주먹으로 탁—하고 두드렸다. 그러자 상대편 쪽에서 같은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어요?”

“거긴 누구예요?”

굵직하고 나지막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다시 유리벽을 두드려서 되물었다. 아직도 정신이 덜 깬 상태라 내가 잘못 들은 건지도 몰랐다. 평소에 의심이 많은 나는 습관적으로 열 번 이상은 확인을 해야 사실을 인정하는 타입이었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네, 저 좀 도와주세요. 전 도무지 제가 왜 여기에 갇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벌써 여기서 갇혀 지낸지 보름이 넘었어요.”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우리는 먼저 어둠 속에서 통성명부터 했다.

“저는 이유한 입니다.”

“저는 김진수 입니다.”

이유한 이란 이 남자도 나처럼 술에 거하게 취한 날 여자 친구 집에 갔다가 눈을 떠보니 사방이 어둠밖에 없는 이 협소한 공간에 있었더란다.

“어떤 새끼들이 납치 해 온 건지 몰라도 여기에 가둬놓고선 구멍 안으로 먹을 것만 던져줘요. 먹는 음식도 어마 어마한 것을 던져주죠. 사흘에 한 번 음식을 던져 주는데 그 빵 하나면 일주일은 먹을 수 있어요. 밑 부분부터 야금야금 갉아먹고 난 후 꼭대기까지 올라타서 먹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려요.”

“에이, 설마요.”

나는 유한의 말에 피식하고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가 허튼소리를 하는 거라고 여기며 콧방귀를 꼈다. 그러자 유한은 갑갑해하면서 사흘 뒤가 되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 이라고 얘기했다.

유한이 말하길 우릴 납치한 유괴범은 어둠속에서 사흘에 한 번씩 거대한 빵을 던져주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릴 새우 잡이 배에 내다 판다거나 가족들에게 전화 걸어서 돈을 요구하는 게 유괴범의 목표가 아닌 것 같아요. 휴우.”

유한은 길고 가느스름한 한 숨을 내뱉었다. 나는 미끈거리는 벽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바지 주머니 뒤적거렸다. 바지 주머니 안에서는 기름이 다 떨어진 라이터와 담배 한 갑이 있었다. 나에게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유한이 핸드폰이 있냐고 물었다.

“핸드폰이라……”

핸드폰 얘기가 나오자 어젯밤 영호와 심하게 다퉜던 일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안 그래도 연락문제 때문에 서로 실랑이를 벌였다. 나는 차라리 핸드폰이 아예 없었더라면, 연락문제로 다툴 일이 없을 것만 같다. 핸드폰이 없다고 해서 하루 종일 불안하다거나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으면, 걱정이 된다거나 할 일은 적어도 없을 것이다.

“왜 전화 안 받았어? 내가 너한테 서른 번 이상이나 전화했던 거 몰라!”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영호를 채근했다. 그러자 영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목소리 좀 낮춰. 다른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라며 내 팔 소매를 붙잡고 골목 귀퉁이 쪽으로 날 끌고 갔다. 나는 내 팔을 붙잡는 그녀를 뿌리치며 더욱 목청을 높였다. 다른 사람들이 듣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그러자 영호는 귓불까지 시뻘겋게 변하며 창피하다고 말했다. 그게 우리 말다툼의 시작이었다.

으슥한 골목 귀퉁이로 들어간 우리 둘은 아근바근 다투기 시작했다.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둘 다 지지 않으려고 자기 입장만 내세웠다. 영호는 침착하고, 조근 조근한 목소리로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는 반면 나는 목소리가 더 크면 이기는 법인 줄 알고 소릴 거세게 질렀다. 내가 소릴 지를 때마다 영호는 입가에 집게손가락을 갖다 대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너 어젯밤에 하루 종일 누구랑 같이 있었기에 전화도 안 받은 거야? 내가 전화하면 바로 바로 받으라고 했었지!”

“어제 너무 몸이 피곤해서 금방 잠들어서 그랬어. 미안해. 매번 이러는 건 아니잖아. 좀 이해해줘.”

“너 다른 남자랑 같이 있었어?”

“뭐?”

내 질문에 영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시계추처럼 고갤 좌우로 내저었다. 나는 영호가 손에 들고 있던 가죽 핸드백을 강제로 빼앗아 그 안을 손으로 뒤적거렸다. 폭이 좁은 핸드백 안에는 표면이 까칠한 검정색 반지갑과 립스틱, 핸드폰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가만있어봐.”

나는 가느스름하게 눈을 치켜뜨고 한기 서린 얼굴을 한 영호를 뒤로 하고, 그녀의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는 전화번호 목록들을 살폈다. 영호의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들은 대부분이 남자 이름들뿐이었다. 인간관계가 좁은 나에 비해서 영호는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밤늦게도 연락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술친구도 거의 대부분이 남자였다.

“내 놓으라니까!”

영호가 자기 핸드폰을 가져가려고 바동댔다. 나는 핸드폰 수신함에 남겨진 서른 개의 메시지를 전부 일일이 읽고, 전화 내역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면서 영호에게 핸드폰을 내줬다. 물론 영호의 기분이 산뜻할 리가 없었다. 영호는 샐쭉해진 표정으로 핸드폰을 낚아채듯 가져가더니 자기 핸드백 안에 도로 집어넣었다. 나는 간밤에 가지고 있던 의심이 눈 녹듯 풀리자 영호에게 미안해졌다.

“서로 믿기로 약속했었잖아. 벌써 잊었어?”

“미안해. 자기야.”

“왜 넌 날 믿지 못하는 거야? 내가 그랬었지. 넌 제발 내가 알던 다른 남자들과 다르길 바란다고……너도 별다를 게 없는 남자 같아. 의심하고, 구속하고, 확인하고……난 네 소유물이 아니야!”

영호의 차분했던 음성이 들쑥날쑥해졌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내 눈 앞에서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남자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다.

삭제하겠습니까?

예.

핸드폰에서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가락 움직임이 바빠졌다. 눈으로 사람들의 이름을 쫓으면서 그녀가 핸드폰에 저장된 남자 목록들을 다 지우는 데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남자들의 연락처를 모두 지운 영호는 여자 이름만 남은 핸드폰 액정을 내 눈 앞에 가져다댔다.

“이제 만족해?”

영호는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씰룩였다.

“미안하다. 영호야.”

종종 영호는 남자들의 소유욕과 구속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게 다 사랑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녈 이해시키려고 했다.

“사랑이 누군가에게 소속되는 거니?”

“인간관계는 모든 것이 소속될 수밖에 없어.”

나의 무덤덤한 말투에 이골이 난 표정으로 영호는 텁텁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어딘가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예술가적 성향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 한 달에 몇 번이고 뜬금없이 여행 다녀올게. 란 문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남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거뭇거뭇하게 손톱 밑으로 검정색 물감과 붉은색 물감들이 섞여있고,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이 퉁퉁 붓고, 파근파근한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훑어 내리는 모습이라도 영호는 내게 너무나 아름다웠다. 영호에게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매력이 느껴진다. 영호가 남자들에게 인기가 들끓는 이유도 바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매력 때문 일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예고 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나를 계속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간관계는 모든 것이 소속이라는 내 말에 영호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영호는 내게 있어서 오지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신비한 여자였다. 대한민국에서는 개인이 회사든 학교 든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한 법이야. 자기 혼자만 겉돈다는 느낌이 들지. 너와 내가 연인인 이상 서로에게 간섭할 수밖에 없어! 그리고 모든 연인들이 그렇게 해. 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호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많이 들어서 재미없다는 뜻이었다. 영호는 나를 지긋하게 바라봤다.

“난 그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소속되고 싶지 않아. 왜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 왜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건데?”

영호는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 ❧ ❧

 

기름이 다 떨어져서 라이터 불이 잘 잡히질 않았다. 나는 여섯 번이나 라이터 불을 켜려고 애썼다.

“라이터 갖고 있어요?”

내가 묻자 유한은 자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군요.”

직사각형 모양의 지포라이터 뒷면에 음각으로 영호가 세밀하게 그림을 새겨 넣어줬다. 처음에 생일선물이라고 내게 사줬던 것이 지포라이터였다. 그녀는 라이터 뒷면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면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날 떠올리겠네. 라고 슬며시 웃음을 뗬다.

가느스름한 턱 선과 웃을 때 눈 가 밑에 생기는 고양이 주름까지 세밀하게 영호는 조각했다. 그래서 제법 그림이 그녀와 닮아있다. 일곱 번째로 시도하자 겨우 라이터에 불이 켜졌다.

“빨리 이곳에서 탈출해야 될 텐데요.”

유한은 체념한 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갤 젖혀 천장을 쳐다봤다. 역시 어둠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저 한 가운데는 빵을 넣어준다는 구멍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 구멍 근처까지만 가면 그래도 도망갈 방법은 있을 것만 같다.

“소용없어요. 이미 저도 구멍으로 탈출해보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매번 실패했어요. 무슨 수로 저 높은 천장까지 올라갈 수가 있겠어요?”

유한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묻지도 않은 자기에 관한 얘기들을 죽 늘어놓았다. 나는 별로 관심에도 없는 장황한 얘기들을 듣느라고 지루해서 하품을 했다. 그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은 사람 같았다. 모든 것이 다 부정적이었다.

가령, 자신이 다니고 있는 회사는 주5일제인데도 토요일에는 격주로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라며 투덜거렸다. 내가 취업도 어려운 판국에 회사 일이 바쁘게 돌아가는 건 좋은 것이 아니겠냐는 반응을 보이자 그?? 또 불만이었다. 그 다음은 자신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좋은 건 위 대가리들뿐이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곤, 공중으로 휘파람을 불듯 입을 둥글게 모아 연기를 허공에 내뱉었다.

“콜록 콜록.”

유한이 헛기침을 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하더니 상당히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유한이 내 담배 연기에 반응할 정도면 우린 상당히 가까운 장소에 있는 것이다.

나는 허공에다 한 손을 훠이 저으면서 담뱃불을 곧 바닥에 짓이겨서 껐다.

“조금 있으면 지진이 일어날 거예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하루에 15분씩 이상은 일어나는 일이예요. 내 말이 잘 안 믿겨지죠? 곧 알게 될 거예요.”

유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대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하고 들려오는 것이 꽤나 무게감이 있었다. 나는 그 엄청난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뭔가 거대한 것이 우리들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곧 지진이 일어날 겁니다.”

“뭐라고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될 겁니다.”

나는 도무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스러웠다. 내가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을 때, 둔탁한 소리가 사그라지더니 정적이 찾아왔다.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화스러웠는데 그것이 도리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앞으로 다가왔다.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들이 난무했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은 바로 가족이었다. 연락이 두절된 나로 인해서 불안과 걱정으로 조바심을 낼 늙은 어머니의 얼굴이 눈가에 밟혔다. 이어서 여기에서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말이 많던 유한도 지진이 곧 다가올 거라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일었는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김진수 씨, 우리가 또 만날 수 있게 될지 어떨지 잘 모르겠군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반가웠습니다.”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나는 온몸의 세포가 바짝 긴장해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내 몸은 무중력 공간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이리저리 떠다녔다. 쿵―하고 유리벽 사이를 부딪칠 때마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롤러코스터를 연속으로 몇 십번을 타는 기분이 든다. 최악이다. 나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영호가 내게 선물해준 지포라이터만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아귀에 꽉 쥐고 있었다.

“아악!”

도처에서는 여러 남자들의 비명소리가 청명하게 들려왔다. 중저음의 목소리? 질러대니, 그것도 하나의 음악이 됐다. 그 중에는 유한의 목소리도 섞여있을 터다. 어쩌면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공포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지도 모른다. 십오 분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아……”

속이 너무도 울렁거렸다. 어젯밤에 먹었던 모든 것을 다 게워내고 싶다. 나는 헛구역질을 하며 제발 그만! 하며 간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정신이 점점 더 혼미해져갔다.

아직도 십오 분이 다되지 않은 거야?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리고 필름이 끊긴 것처럼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을 잃은 채로 허공을 떠다니며 벽과 벽 사이를 계속 부딪쳤을 거다. 내가 혼절한 그 뒤로도 이러한 지진은 계속 되었을 것이다. 정해진 15분이 다 채워졌을 때까지 말이다.

끈적거리고 묽은 침이 혀에 잔뜩 고였다. 옷에서는 시큼한 토 냄새가 났다. 나는 팔소매로 입가를 닦아냈다. 속은 여전히 좋지 않았고, 온몸에는 피멍이 들어서 욱신거렸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할 때마다 고통스러워서 자연스럽게 미간이 좁혀졌다. 벽면 어딘가 에서 내가 게워낸 토사물 냄새가 풍겨졌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여기는 대한민국이 아닐지도 몰랐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강진이 하루에 15분씩 진행될 리가 없다.

정신을 다 잃은 상태에서도 영호가 준 지포 라이터는 내 손아귀에 있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어둠 속에서 잃어버리면 어떻게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이 어두운 공간에서 유일하게 불빛을 밝힐 수 있는 건 기름이 다 떨어져가는 라이터가 전부였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라이터를 집어넣고, 욱신거리는 팔목을 손으로 주물렀다. 뼈마디가 전부 다 으스러진 것 같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아……”

유리벽을 통해서 여기저기서 나지막하게 앓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 공간에는 나와 유한 말고도 여러 명의 남자들이 갇혀 있는 것 같다. 나는 방금 전까지 나와 대화를 나눴던 유한이 무사한지 걱정이 됐다. 나는 벽면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유리벽을 두드렸다.

“괜찮아요?”

“……아.”

옅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좀 전의 유한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거기 누구예요?”

“거긴 누군데요?”

“이유한 씨 아닙니까?”

“이유한 이요? 그 말 많던 피곤한 남자 말입니까?”

남자는 유한이라는 이름에 허허실실 웃었다. 그는 유한을 만났을 때 너무 시끄러워서 아예 휴지로 귀를 틀어막아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강택운 이라고 소개했다.

“저는 김진수입니다.”

“강택운입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고 계십니까?”

“그걸 알면 내가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 겁니다. 벌써 여기에 붙잡혀 온지도 일 년이 넘었어요.”

“네?”

그는 여자 친구와 심하게 다툰 날 다음 아침에 눈을 떠보니 어둡고, 캄캄한 공간에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고 멀쩡하게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는데 그 다음날 눈을 뜨고 보니 온 세상이 캄캄했다는 것이다. 택운은 담배 한 개비만 있으면 달라고 부탁했다.

“담배를 가지고 있어도 그쪽으로 제가 어떻게 전달해줄 수 있겠습니까?”

내 물음에 택운은 유리벽과 벽 사이를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헤집으면서 찾다보면 구멍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일 년 동안 열심히 카터 칼로 유리벽을 긁어내어 사람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하나를 뚫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어둠속에서 몸을 구부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걸어 다녔다. 그리고 택운이 뚫었다는 그 구멍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아직도 못 찾았습니까?”

“아, 예……도통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찾기가 힘이 드네요.”

“거 좀 빨리 좀 찾아봐요!”

택운은 성질이 급했다. 바다에서 나오자마자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팔딱대며 죽어버리는 은 갈치 같다. 그는 구멍을 빨리 찾아서 담배를 건네 달라며 계속 나를 재촉했다. 나는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의 짜증을 받아줘야 하는 것에 기분이 불쾌했다. 어떤 면상을 지닌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빛이 있어서 얼굴이 보이는 상황이라면 삿대질을 했을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의 외모를 상상해봤다. 산적 같은 우락부락한 인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구멍을 찾아서 꽤나 헤매고 있기 때문에 짜증이 확 나서 미간이 좁혀졌을 것이다. 나는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훑어 내려가면서 미끈한 유리벽 사이를 스쳐지나갔다.

“일 년 동안 이곳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지내서 이젠 내가 눈을 뜨고 지내고 있는 건지 눈을 감고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눈 뜬 장님이 따로 없다니까요. 젠장맞을! 내가 만약 바깥세상으로 나가게만 된다면 날 납치한 놈의 두 동공을 젓가락으로 콱 찍어 버릴 겁니다!”

택운은 갇혀서 지낸 일 년 동안의 생활에 대한 불만과 고통을 내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가게 된다는 조건 하에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말해줬다. 이 갑갑하고 좁은 공간에서 빠져나가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더 자주 말해줄 것이고, 더 많은 세상을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아까 일어난 지진은 매일 일어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고통스러울 거예요. 하지만 여기서 지내다보면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될 날도 오게 되요. 나는 지금 우리들이 있는 공간이 대한민국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을 납치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죠.”

“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 년 동안 갇혀 지내고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생겨났지요.”

나는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들었던 거대한 굉음의 정체도 궁금했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유괴범에 대한 정보도 알고 싶었다. 어쨌거나 이곳에서 오래 지내고 있었던 택운은 알고 있는 게 많을 거라 믿었다. 나는 택운이 뚫었다는 구멍을 찾겠다고 돌아다니다 그의 얘기에 집중하려고 몸을 멈칫했다. 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한 가지에 집중할 때면 전혀 다른 것은 신경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행동이 느릿느릿 하다고 갑갑해하는 직장동료들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신에 일만큼은 꼼꼼하고 정확하게 해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슈퍼컴퓨터다. 내 덩치가 큰 것도 이 슈퍼컴퓨터란 별명을 얻는데 한 몫을 더했다.

“일단 지진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과연 한국에서 지진이 매일 발생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그 지진이 끝나고 난 뒤에는 거대한 흰색 솜뭉치가 방 안을 헤집습니다.”

“흰색 솜뭉치요?”

나는 고갤 갸우뚱 거렸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얘기였다. 매일 일어나는 지진에 이어서 흰색 솜뭉치가 방안을 들쑤신다?

그리고 사흘마다 던져지는 거대한 빵 얘기까지……나는 지금 현실 세계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지금 이상한 나라에 내 던져진 것이다.

“아직도 구멍을 못 찾았습니까?”

“아……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지독히도 담배와 술을 좋아했었는데, 여기에 갇힌 뒤로 둘 다 할 수 없으니 갑갑해 죽겠습니다. 금단현상이 일어나서 오한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죠. 뭐, 지진 후에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운이 좋아 담배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좀 태우기는 했었죠. 그 유한이라는 남자는 돈을 아낀다고 술도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다더군요. 어디 그렇게 해서 남자가 사회생활을 잘 해냈겠습니까?”

택운은 유한의 얘기를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상당히 유한을 한심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진 후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는 택운의 말에 의아해졌다.

지진이 끝나면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얘기인가?

택운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서 있는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더 증폭되어 갔다. 나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좀처럼 참을 수가 없다. 그리고 확실한 답을 구할 때 까지 끙끙 앓는다.

택운은 유한의 얘기 후에는 그가 일 년 동안 만났던 남자들에 대한 얘기들을 내게 해줬다. 어쩔 때는 만났던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했다. 그럴 때는 얼굴도 보지 못한 사이지만, 얘기를 자주 나누다보니 친근감이 들어 서로 편하게 말을 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만난 게 다들 남자 밖에 없었던 모양이군요.”

“네, 그래요. 아무래도 유괴범은 성인 남성만 목표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난 사람 중에는 삼년동안이나 갇혀 지낸 유부남도 있었지요. 그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는데 몰래 바람을 피우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머리에 둔기를 맞고 정신을 잃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여기에 갇혔다고 전하더군요. 그 사람은 아무래도 아내가 가장 의심스럽다고 말했어요. 사람을 시켜서 자신을 가둬놓은 게 아니냐면서 흥분하더군요. 그의 말대로 아내가 시켜서 유괴당한 거라면 잡혀온 다른 남자들은 연관성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나는 유리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을 뒤로 내 뻗었다가 우연히도 택운이 만들어놓은 구멍을 발견해냈다. 나는 온 사방을 헤집으면서 겨우 구멍을 찾아내자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들뜬 어조로 나는 택운을 불렀다.

“찾아냈어요!”

“아! 정말입니까? 어서 그 구멍으로 담배랑 라이터 좀 집어 넣어주세요.”

“네, 그러죠. 그런데 제 라이터는 기름이 거의 다 떨어져서 불이 잘 안 붙을 겁니다.”

나는 영호가 준 지포 라이터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담배 한 개비를 찾아내서 구멍안쪽으로 밀어 넣어줬다. 그러자 택운이 담배와 라이터를 바로 가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라이터에 불이 잘 안 붙여지자 아씨! 하는 짜증 섞인 욕들이 그의 입에서 난무했다. 그리고 담뱃불이 붙여졌는지 짜증 섞인 택운의 욕은 더 이상 들리지가 않았다.

“후우.”

택운은 담배 연기를 내 뿜더니 이제야 살맛이 나네! 라고 말했다. 담배 냄새가 내 방으로도 스멀스멀 기어들어왔다. 삼년 동안이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는 유부남, 일 년 동안 갇혀 지낸 택운, 그리고 보름동안 갇힌 남자 유한. 그리고 이제 하루가 되는 나.

우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나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하는 일도 전부 다 달랐고, 성격도 전부 달랐다. 조심성이 많은 나에 비해서 택운은 불같은 성격이었다. 반면에 이전에 만났던 유한은 소심하고, 사회에 대한 불만만 가득한 사람이었다.

내가 턱에 손을 괴고 앉아 한참 고민을 하고 있자, 택운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했다.

“우리들 이제 영영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요.”

나는 그래도 그에게 희망을 놓진 말자고 말했다. 절망 끝에서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고……사람들은 어려우면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들이 많다는 내 말에 택운은 설핏 웃었다. 낄낄낄. 하고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몹시 간드러졌다. 나는 그의 반응에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당신은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군요. 하긴 당신은 여기에 붙잡혀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래요. 나처럼 한 해가 지나 봐요. 그런 말 어디 나오나 보자고요.”

또다시 쾅쾅쾅.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에 한 번씩 일어난다는 지진이 다시 일어나기라도 할까봐 조바심이 났다. 나는 벽면에 바짝 달라붙어 긴장한 채 앉았다. 오금이 저려온다.

아까의 그 고통을 또 느껴야 된다는 공포가 일자 울상이 됐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둡던 방안이 환해졌다. 백열등이 켜지면서 방안의 모든 상황이 보이게 된 것이었다.

“뭐지?”

나는 갑자기 환한 불빛이 비춰지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 곧 이어 눈을 깜박이며 주변 상황들을 살폈다. 먼저 내 방안은 전부다 푸른색의 투명한 아크릴판이었다. 감촉이 미끈해서 유리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아크릴판이었던 거다.

고갤 옆으로 돌리고 보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의 방 안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어둠속에서 우락부락한 인상일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택운은 모델처럼 키가 늘씬하고, 우윳빛 피부에 곱상한 외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쳐다봤다. 내 방 밑에는 사방이 노란색 벽으로 돼 있었고 그 방 한가운데는 좀처럼 가만있질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돌아다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택운이 내 방의 벽을 두드렸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앉아 자신이 뚫은 구멍에 내 지포라이터를 밀어 넣었다.

“라이터 뒷면에 새겨진 여자 말입니다. 당신하고 어떤 관계입니까?”

“제 여자 친구입니다만……”

내 말에 택운의 표정이 넋이 나간 듯 멍해졌다. 그는 말을 다달거리면서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지를 못했다.

“그렇습니까?”

“왜 그러시죠?”

“사실 저도 그녀를 잘 압니다. 일 년 전에 제가 사귀던 여자 친구였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여기에 잡혀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사람도 그녀입니다. 혹시 당신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 그녀인가요?”

“……네.”

나는 푸른 벽 바깥 상황을 살폈다. 모든 풍경들이 낯설지가 않았다. 커다란 꽃무늬가 그려진 포인트 벽지, 1인용 침대 한편에 놓인 갈색 곰 인형.흰색의 모던한 화장대. 그리고 달달한 여자 향수냄새가 코끝으로 닿았다.

내가 바깥 상황을 살펴보는 사이 거대한 흰자위에 검은 동공이 미세하게 움직이며 내가 있는 푸른 방과 택운이 있는 붉은 방을 쳐다봤다. 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영호야! 이 큐브 안에 들어있는 장난감들 진짜 사람 같다. 너무 신기해! 이런 큐브는 어디에서 살 수 있는 거야? 나도 하나 살까?”

“그건 내가 직접 만든 거라서 아무데서나 살 수 없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영호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여자는 영호를 부르면서 큐브를 자신의 손바닥위에 놓았다.

“어……엇!”

순식간에 방 안 전체가 흔들렸다. 나는 갑작스런 지진에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몸을 뒤뚱거렸다.

“정말로 신기하네. 어쩜 이렇게 진짜 사람처럼 생겼지. 게다가 움직이기까지 하네?”

나는 주먹으로 아크릴판 벽을 두드리며 영호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안에 있는 건 장난감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릴 좀 도와주세요!”

하지만, 영호의 친구는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손바닥 위에서 큐브를 흔들다가 곧 흥미를 잃었던지 책상 위에 다시 내려놨다. 곧, 뿌연 증기가 피어올라오는 머그잔을 양손에 들고 영호가 나타났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큐브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데 그 미소가 사악한 마녀의 웃음 같이 보여서 치가 떨렸다.

우리는 지금 큐브 안에 갇혀있는 것인가!

나는 고갤 흔들었다. 이상한 나라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영호의 집안에 있는 큐브 안에 갇힌 이 상황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에서 아무리 답을 짜내려고 애를 써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영호 때문에 어릴 때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병정처럼 몸이 아주 작아진 거였다. 영호는 친구에게 머그잔 하나를 건네주며, 큐브가 놓인 책상 앞으로 성큼 성큼 다가섰다. 쾅―하고 무섭게 다가오는 굉음의 정체는 바로 영호의 발걸음 소리였다. 나는 원망 섞인 눈을 하고 책상 앞에 다가선 영호를 바라봤다. 그녀는 큐브 앞에서 들릴 듯 말듯 조그마한 혼잣말을 되뇌었다.

“노란색은 사회 부적응자, 붉은색은 의처증 환자, 그리고 푸른색은 알코올 중독자……이렇게 큐브 안에 다 모아놓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영호는 책상 옆에 굴러다니는 면봉 하나를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집고서는 내 방 천장 위에 있는 구멍 안으로 면봉을 집어넣었다. 나는 그제야 거대한 하얀 솜뭉치가 뭔지 의심이 풀렸다. 나는 천장 위에서 아래로 서서히 내려오는 면봉에 짓눌려 죽지 않기 위해서 아크릴판 벽에 껌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긴장으로 인해서 심호흡이 가팔라졌다.

“그런데 영호 네가 요즘 만나는 남자 말이야. 아직도 핸드폰 문자 일일이 확인하면서 너 괴롭히고 그러니? 그런 사람 만나지 말고 다른 좋은 남자 만나. 그런 남자 만나는 거 피곤하잖아. 세상에 괜찮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연애만 할 거라면 몰라도 결혼까지 생각한다면 그런 남자 만나면 안 돼.”

친구의 질문에 영호가 설핏 웃음을 뗬다.

“응, 그러려고……정말 고리타분하고 갑갑한 남자였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