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혹은 사연 하나에 댓글을 달 듯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내용 속에 한 줄 또는 몇 줄에 걸쳐 스치듯 지나간 숨은 사연과 표현 못한 내밀한 사정이 묘사되어 있었다.

어떤 장면의 뒤에 숨은 스태프들의 상황과 출연진의 속사정을 화면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은 드라마의 특집 방송을 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이후 시간의 틈새 속에 남아있던 이야기

 

이 시대 마지막 카우보이 킨케이드는 여전히 나이든 몸을 이끌고 떠돌며 사진을 찍고, 그의 아들 칼라일은 아버지를 찾아 이런 저런 정보를 수집 중이다. 그에게 아들을 안겨준 짧은 인연 윈 맥밀런은 여전히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고,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인 프란체스카는 그와의 기억을 반추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거기 다시 온 것이 기뻤다. 그렇게 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그 유서 깊은 다리 속에서 그는 평화로운 기분을 맛봤다. 그는 그 느낌 속에 흠뻑 젖어들었으며 그의 내면은 고요해졌다. 그 순간 그는 그곳이 자신의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을, 언제고 자신의 재가 미들 강을 따라 흘러내려 가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했다. 그는 그 재 중의 일부는 그 다리와 그 땅하고 하나가 되기를, 다른 일부는 강을 따라 계속 흘러 내려가 더 큰 강과 만나고 이어서 그가 병사들을 잔뜩 실은 수송선이나 야간 비행을 하는 제트여객기를 타고 무수히 가로지른 넓은 바다와 합류하기를 바랐다.

다리 처마에서, 오래 전에 널이 벗겨져 달아난 지붕의 구멍들에서, 빗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다리를 지탱해 주는 기둥들 중 하나에 기대서서 16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에게 한꺼번에 몰려오는 온갖 느낌이 멋대로 설치게 가만 내버려뒀다. 그는 이것이 일종의 고별식이자 해방식이요 종막을 고하는 행위라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프란체스카 존슨에게 작별을 고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저희들 가고 싶은 대로 가게 해.”

그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는 다시, 그리고 또 다시 말했다.

“…저희들 마음대로 흘러가게 해.”(p.187)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긴 여운을 진하게 즐기고자 한다면 권하고 싶지 않다. 아쉬운 듯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

시리즈물로 나오는 작품들의 대부분이 1권의 강렬함을 다음 권이 이기지 못하고 뒤로 갈수록 매력이 시들어가는 과정을 겪는 이유가 상상의 여백이 없어지기 때문이니까. 물론 새로운 사건들이 빵빵 터지기는 하지만 처음의 신선함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 않은 가.

뭐, 속속들이 사연을 알고자 한다면 추천하는 바이다. 작가의 말대로 나름대로 독립적인 이야기였으니까.

더글러스 케네디의 두 번째 출간작 위험한 관계를 읽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났던 빅 픽처와 비교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인 거 같다.

 

운명은 그런 게 아니던가? 사람들은 인생의 궤도가 일정한 코스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그러다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가 지속되면 자기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위험지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책 속에서)

 

소재

빅 픽처가 남성을 주인공으로 사회적 성공과 자아실현, 가정 내 가장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것을 소재로 삼았다면 위험한 관계는 여성을 중심으로 모성과 출산, 육아에 관한 것을 주된 소재로 하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 마음대로 인생의 궤도를 조종하지 못한다. 각자들 자신이 선장이 되어 운명의 궤도를 헤쳐나간다고 착각할 뿐.(책 속에서)

 

구성

빅 픽처가 외적으로 스펙터클하고 줄거리를 다양하게 구성했다면 위험한 관계는 내적이며 정적인 분위기에 줄거리는 단순했다. 결말은 전자가 다소 어두웠고 예상하지 못했던 반면 후자는 나름대로 밝은 쪽이었고 진부하긴 하나 이런 방향으로의 마무리를 바랐다.

 

흔히 인생의 대사건을 맞을 때마다 심오한 깨달음을 얻게 될 거라 기대한다. 하지만 인생의 대사건이 대부분 그렇듯 사건 자체는 완전 기대이하가 되고 만다.(책 속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생이 짧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모든 건 지독하게 순간적일 뿐이다. 우리는 짧은 생의 많은 시간을 타인과의 불화에 써버린다. 생명은 짧고, 우리 모두 언젠가 소멸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처럼.(책 속에서)

 

권태야말로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게 바로 권태다. 권태가 바로 생이 부질없다는 걸 깨닫게 한다. 드라마틱한 삶을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과소평가할 수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에 매몰돼 소중한 삶을 끝내기보다는 생이라는 드라마를 직접 연출하고 주인공을 맡는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짜릿하겠나.(책 속에서)

 

공감

 

두 작품 모두 심리묘사에 탁월하며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소재를 심도 있고 적나라하게 묘사했기에 대중이 즐겨 읽는 소설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 한 가지, 주인공과 대치되는 인물은 항상 행동이나 말들이 보통의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점과 불행과 시련은 모두 주인공의 몫이어서 대립각을 세우던 인물은 소설 속에서 그다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이 읽는 동안 불만을 안겨준다는 점이다. 작가만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권선징악이라는 유아기적 생각이 마음에 남아있는 건지...... 아무튼 나름대로 불편한 부분이다.

 

인생은 말하지 않고 간직하는 게 더 좋은 일들이 많다. 누구나 고백하고 싶어 한다. 고백하고 싶은 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백은 일을 망쳐놓고 사면을 받으려는 일종의 거짓 회개일 수도 있다. 우리 이전의 모든 인류가 그랬고, 우리 이후의 모든 인류도 그럴 것이다. 인간사는 철저히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책 속에서)

 

혹자는 전작과 비교해 ‘위험한 관계’는 재미가 덜 하다 평가하던데 소설은 역시 경험과 사고의 공감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단순한 전개임에도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결혼 후 겪게 되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그 이후의 스트레스를 묘사한 전반부가 결혼한 여성이 아니라면 쉽게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기 때문이리라.

다른 무엇보다 표지 뒷면의 ‘그 바닷가 찻집에는 잊고 살았던 더 나은 내가 있었다.’는 카피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감에 충만하고 자아상이 건강하다면 모를까. 가족 속에서 세상 속에서 숨어살 듯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 이 말은 책을 읽기도 전에 가슴을 따듯하게 채워주었다.

 

외딴 바닷가에 자리 잡은 카페에서 전해 받는 따스한 위로와 행복

 

아내를 일찍 보내고 어린 딸과 살아가야하는 남자, 사업실패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게 돼 곶 카페의 창을 넘은 도둑, 취업이 잘 안 되어 방황하는 청년 등등, 그리고 할머니 주변에 동무처럼 머무는 개 고타로와 그녀의 영원한 어린 조카 고지, 마지막으로 그녀 자신.

모두가 그곳에서 정성을 다해 내린 따스한 커피 한 잔과 음악으로 상처 입은 가슴을 치유 받는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잃지만, 또 그와 동시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얻기도 하지요. 그 사실만 깨닫는다면, 그다음부턴 어떻게든 되게 마련이에요." 실제로, 나도 그랬으니까...... 끝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쓰코 씨의 목소리가 이렇게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p.53)   슬슬 <걸스 온 더 비치>가 끝나려 한다. 인생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설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는 나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자.(p.120)   그래, 어떻게든 되었고 삶은 이어졌고 소중한 것을 잃기 전보다 더 분명하게 가야할 길이 보였던 것 같다.

 

 

글의 매력은 곶 카페라는 세상의 끝 같은 독특하고 매력적인 장소와 그 분위기에서 풍기는 소박함, 그리고 중간에 보이는 에쓰코 할머니의 가볍지 않은 한 마디 한마디에 있었다.

 

	"산다는 건, 기도하는 거예요." "아......" 나는 조금 전 들었던 <더 프레이어>를 떠올렸다.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가스펠송. "인간은 말이죠, 언젠가 이렇게 되고 싶다는 이미지를 품고, 그걸 마음속으로 기도하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만 꿈과 희망을 다 잃고 더 이상 기도할 게 없다면,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하지요."(p.146)   가끔 기도하며 걷는 삶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들을 때면 종교를 떠나 삶 전체에 어떤 목적을 두고 그 지점을 기도하듯 바라보며 걷는 하루가 왜 나쁜 걸까. 꿈에 빠져 사는 것에 불과한 걸까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인지 이 말에 크게 기뻐했다. 마치 동지를 얻은 기분이랄까.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괴로웠던 일까지 포함하여 여태까지의 인생을 통째로 긍정하기 때문에 너희는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거란다. 겹겹이 쌓아온 과거의 시간이 바로 지금의 너희니,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p.254)   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

 

 

너는 소중하다고 곁에 있어주어 고맙다, 가 아닌 주변의 모두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두려움을 항상 안고 살아온, 그리고 그런 생각이 습관처럼 굳어버린 나에게 이 책은 잠시나마 위안과 격려를 안겨 주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공감하고 주인공의 내밀한 사연에 동참하며 그들처럼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삶이 바뀌는 마법은 없었지만 어제보다 더 행복한 오늘을 위해 에쓰코 할머니처럼 주문을 외우고 싶어졌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