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유진은 이 여자를 보면서 아버지의 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자가 갖고 있는 분위기는 아버지의 말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부유함, 원하는 대로 모두 하겠다는 자유로움, 그리고 그 원하는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다는 당당함까지도.

이 여자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존재지, 가져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갖고 있는 것은 아마도 아주 커다란 것일 거라고 유진은 생각했다.

‘나도……, 이 여자처럼 되고 싶어.’(p.26)

 

섹시하고 화려하며 도회적인 색체의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있고 강하며 동물적인 남성적 색체를 풍기는 남주인공의 이미지가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져 읽기 전부터 기대감에 살짝 부풀었었다. 내용은 한 여자의 야망과 사랑, 그리고 오직 그녀만을 열망했던 한 남자의 지독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배신과 복수가 주요 소재로 깔려 있지만 어찌 보면 순애보 같았다.

남주인공의 매력이 잘 표현되어 있어 그의 어두우면서도 강렬한 사랑에 가슴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글의 초반, 여주인공의 상황과 독백으로 상당히 강한 캐릭터가 나오겠거니 기대했던 탓인지 여 주인공의 모습은 익다만 감자 같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뭔가 색다른 것을 그리겠다 결심하고 스케치를 해 색을 입혔는데 의도에 못 미치고 늘 그리던 스타일대로 그리고만 그림처럼 보통의 캐릭터가 돼버리고만 여주인공.

‘이 여자처럼 되고 싶어...’서 야망을 선택한 그녀의 강단과 욕망이 단지 어린 나이의 철없음이었다는 심리묘사가 내심 아쉬웠던 건 사랑이란 감정이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기가 지난 내 나이 탓일지 모르겠다.

게다가 처녀작 ‘눈꽃’처럼 글의 전개가 다소 어수선하고 사건 묘사에 있어 직설적이기 보다 살짝 뒤로 물러선 채 표현하고 마무리 짓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치 불이 난 자리에서 타고 남은 재와 연기를 보여주며 불이 났던 상황을 절절히 이야기 하는 느낌. 그래서인지 초반부는 다소 지루했고 여 주인공의 감정 변화에는 깊이 공감할 수가 없었다.

 

알렉스가 다시 찾아온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과거를 잊고, 미움들을 지우고, 모두 극복하고 싶었을 거였다. 그런데 상처가 너무 커서 혼자 아물게 할 방법이 없었으니, 더 한스러웠을 거였다. 증오하는 마음도,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도 모두 이해가 갔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순간 유진의 마음이 결정되어 버렸다. 그녀가 상처 입는 걸로 그의 상처가 아물어져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결국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후회로 보내야 했던 시간 대신 어쩌면 이제 그 사랑을 갚을 수 있는 시간이 온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진은 다시 손바닥 위에 놓인 아름다운 사파이어를 응시했다.

단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어도 모든 것을 다 주었던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어딜 가든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더 망가지는 것은 이제 상관없었다. 그걸로 괜찮을 거였다.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었는데 왜 이렇게 빙 돌아왔던 걸까?

마음이 결정되어 버렸다. 그렇게 마음이……, 결정되어 버렸다.(p.313)

 

어쩌면 그 지독한 아픔들을 견뎌 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들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그 시린 아픔들마저도 이제는 모두 추억이라는 이름이 되어 그들이 사랑한 증거로 남아 있으니.

불꽃. 그 단어를 떠올린 것은 그때였다.

아무리 꺼뜨리려 해도 끝없이 타기만 했던, 뜨겁게 너울거리던 불꽃. 그 불꽃이 낳은 상처와 아픔마저도 너무 뜨거웠지만 결국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화해 버린 불꽃. 영원히 꺼지지 않을 그들의 사랑.

유진의 얼굴에 조용히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같은 꿈을 꾸게 되겠지.

함께 잠들기 위해 눈을 감으며 유진은 생각했다.

그래, 불꽃같았다.(p.485)

 

어쨌든 주인공들이 나누는 감정은 상당히 디테일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아름다웠다. 곳곳에 스민 작가 특유의 깊이감도 좋았다.

그리고 너 아니면 안 되는 유일한 사랑을 하는, 그래서 불꽃처럼 타올랐고 불꽃처럼 사랑했고 미워했으며 결국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피어날 수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지독하다면 지독한 사랑이야기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현실에서는 식거나 지쳐버릴 만한 감정이 비록 소설일 뿐이지만 살아서 꿈틀대는 걸 지켜보는 건 무척 가슴 뭉클한 일이었다.

플로리다 귀부인 살인사건 이후 한참 만에 손에 잡은 글래드 시리즈 3권이다.

집중이나 줄을 긋고 싶은 문장 없이 술술 읽어나갈 수 있어 모처럼만에 휴식을 취하는 느낌의 독서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게 책장을 넘기며 글래디의 세 번째 미스터리를 뒤쫓았다.

 

누가 말했나? 늙는 것이 죄라고. 그녀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최고급 실버타운에서 일어난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와중에 그녀가 사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 사고들은 읽는 걸음을 무겁지 않게 만들었다. 소피의 약물중독 사건, 변태 사건 등등.

나의 눈은 시종일관 즐거움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연인과의 갈등을 빚고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보내는 글래디의 모습이 그려졌다.

글이 끝날 때까지 틈만 나면 ‘괜찮을 거야.’를 외치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글래디.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연인이 변치 않았을 거라 확신(?)하고 있지만 글 속의 히로인은 자기 역할에 아주 충실했다. 그런 모습에서 어느 나이든 사랑하는 연인들의 모습은 비슷한 가 보다, 그런 생각을 잠시잠깐 했다.

범인일지 모르는 남자와 불같은 위험한 사랑에 빠져버린 에비의 에피소드에서도.

 

늙는 것이 죄라고 누가 말했나? 노년의 시간은 드물게 찾아오는 달콤함과 사랑 그리고 수많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언제나 놀랄 일들로 넘쳐 난다. (p.493)

 

아무튼 아무 생각 없이 술술 읽기 정말 좋은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가 식지 않으니 솜씨가 꽤 괜찮은 작가 같다. 다음 시리즈가 벌써 궁금해진다.

작가의 흔들림에 같이 흔들리고, 뜻 없이 주저앉은 걸음에 함께 주저앉고, 멀리 떠나는 가슴에 더불어 길을 떠나던 그런 독서였다.

여행기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며 독백 같기도 하고 깊은 사색을 읊조린 수필 같기도 하여 글이 풍기는 생생하면서 신선한 향기에 취해 술 취한 듯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마음을 담은 채 읽었던 것 같다.

직접 찍은 것으로 짐작되는 사진들이 연필을 끼적이던 작가의 순간을 직접 보여주는 듯해 기분이 고즈넉해졌다. 바람이 전해줄 이야기를 들으러 나무 그늘에 기대앉은 가슴처럼 말이다.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도착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100년 후로 안내한다. 그러니까 나의 사치는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감히 시간을 사겠다는 모험인 것이다. -책 속에서

 

작가만의 특별한 사색, 색이라든가 사물, 기억에 대한 것이라든가...

 

묶어두고자 해도 묶어둘 수 없는, 자유로우나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작가의 하루가 한편으로 부러웠다.

일상에 묶여, 용기 없음과 게으름이란 핑계로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나와는 다른, 그러나 어딘가 닮은 영혼을 지닌 지구별 한 여행자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렇게 어느 한 밤을 밝힌 듯한 기분이 든다.

돌이켜보면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는, 그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전부인 만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진한 여운이 남는 그런 만남.

 

나는 이야기에 약하다. 이야기에 무너진다. 그래서 엿보고 엿듣고, 내 여행은 어쩌면 당신의 그런 일들을 받아 적는, 기록인 것이다. -책 속에서

 

아무 말도 아닌 독백 같은 단어들이 귀에 남고 마음 한가운데를 타고 뱅그르르 돌아 떨어진다. 이런 느낌의 흥미로운(?) 수필이었다. 책을 덮고 나자 안개 속에 서 있다 안개가 품은 물기에 옷깃이 젖어들 듯 그렇게 물들어버린 감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바람이 분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마주할, 닮은 영혼의 당신이 좋다.

절로 제목을 닮은 말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내비게이션은 한 사람의 등짝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친구, 아름다운 사람, 닮고 싶은 어떤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향입니다.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