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도 이렇게 짜증날 수가!

 

인조반정 이후, 청나라의 침입에 힘없이 무릎 꿇고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가 귀국 후 두어 달 만에 사망한 사건은 영조 시절 사조세자의 죽음만큼이나 의문투성이이다. 대체 권력이 얼마나 좋으면 아비가 자식을 버리는 괴상한(?) 상황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물론 소현세자의 죽음이 항간에 떠도는 독살설이 맞다는 가정 하에 들었던 의문이다.

 

아무튼 두 인물 중 하나는 역사의 틈바구니에 파묻혔고 다른 하나는 아들이 왕위에 올라 추존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소현세자의 한 서린 생애가 나름 궁금했다. 참담한 시대를 온 몸으로 겪은 그가 절망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소개말에 뭔가를 기대했다.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대륙 정벌이나 역사적 기상을 펼치기 위한 남다른 몸부림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기를 내심 소원했다.

 

헌데......

 

1권부터 시작해 줄기차게 이어지는 청나라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끊임없이 끌려 다니기만 하는 조선 조정과 힘없는 포로에 불과한 소현세자의 모습에서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소설인데 이토록 무기력한 모습만 잔뜩 펼쳐놓고 여기서 무슨 희망을 보라는 건지 한숨마저 나왔다. 중간 중간 나오는 작가의 역사 비평조차 그저 자조어린 푸념 정도로 밖에 안 느껴졌다.

모 신문에 인기리에 연재되었다던데 독자들은 무슨 재미로 이 길고 긴 글을 클릭하며 읽었는지 심히 의문스러웠다.

 

얼마나 어이없던 지 글의 시작부터 끝까지 역적으로 묘사된 역관 정명수의 말이 되레 눈에 들어왔다.

 

“너의 양반 놈들은 조세, 부역, 군역 다 면제 받는 주제에 온갖 특권을 다 누려왔다. 우리 같은 상놈들은 너희 양반 놈들 등살에 짓눌려 허덕이다가 전쟁이라도 나면 전쟁터로 내몰려 목숨 바쳐 싸우고 있을 때 네 놈들은 기생집 비단금침에 허연 허벅지를 베고 누워 세월 가는 줄 몰랐다. 그러고도 네 놈들은 걸핏하면 충을 내세워 애먼 생목숨 잡기도 하고, 국운이 경각에 달렸을 때조차 네 놈들끼리 편을 지어 피터지게 싸우는 것을 일삼아 왔지 않느냐. 도대체 네 놈들이 나랏돈 축내면서 하는 일이 뭣이냐?

...네 놈들은 나를 국적이라고 욕하지만 정작 이 나라를 말아먹은 건 네 놈들 사대부가 아니더냐.”(p.102)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양반이나 권력과 부를 손에 쥔 세력의 행태는 똑같은 것 같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소현세자의 행적을 따라가며 취재했고 정리해 소개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띈 건 세자빈 강 씨의 경영 능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시 포로 생활로 인한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가는 듯한 나름대로의 활기가 느껴졌고, 그나마 책 읽는 재미가 잠시 잠깐 일어섰던 부분이었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순간은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들이다. -장 르누아르

 

전혀 다른 성장 배경과 성격으로 인해 사랑으로 맺어졌으나 결국엔 헤어지고만 두 사람이 아들의 납치사건을 통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한 발짝 다가서게 되고 종국엔 화해에 이르게 된다는 줄거리는 여러 편의 작품을 출간한 작가의 이력답게 막힘없이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사건의 발단이나 숨겨진 비밀들이 살짝 예상됐고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결론이었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었다.

 

난 내 생애에서 불처럼 뜨거운 사랑, 오직 하나뿐인 사랑을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에게 모든 걸 주었다가 다시 빼앗아간 사랑, 우리의 삶을 한순간 환하게 비추었다가 다시 영원한 폐허로 만들어버린 사랑을...... (책 속에서)

 

다만 작가의 작품을 두루 읽으며 시간을 보낸 독자의 입장에서 영화의 시리즈물이 탄생될 때마다 1편의 신선함과 극적 재미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확인한 기분이 들어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동일한 작가의 작품을 오랜 기간 접하다 보면 비슷한 스타일, 많이 보던 익숙한 전개로 인해 식상해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던 판타지적 요소와 예측할 수 없는 특유의 허를 찌르는 반전, 재미 속에 배어 있는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화해의 메시지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던 탓에 그저 보통의 잘 쓴 소설 한 편 읽은 기분이었다.

 

“우리, 이제부터라도 싸우지 말고 살아가자. 마음을 합쳐 함께 시련을 극복해 가자. 앞으로는 제레미에 대한 태도를 바꾸도록 노력할 거야. 당신도 카미유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서 만나봐도 돼. 이제부터 모든 일이 잘 되도록 노력할게.”

“너무 늦었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우리 사이는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없어.” (책 속에서)

 

전작 ‘천사의 미소’에 이어 실망감을 강하게 느낀 작품이다. 예전엔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동안 주인공의 내면적인 성장에 깊은 감동을 받고 나 자신의 성장 포인트를 엿보고 그 가능성을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이후로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질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 작가 특유의 개성을 좋아했던 터라 더욱 크게 다가온다. 점점 흥미와 스토리 전개 위주로 소설을 쓰는 듯하다. 이것이 유명세를 탄 작가의 병폐인가?? 아니면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의 혼돈인가?? 알 도리가 없다.

책을 읽고 나자 웬일인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굉장히 친함에도 불구하고 자주 만날 수 없는 사정 탓에 떨어져 지내던 벗을 오랜만에 마주한 느낌이었다. 만나면 이런 얘기해야지, 저런 얘기해야지 하며 내내 맘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눈앞에 앉은 벗의 존재 자체만으로 가슴에 넣어둔 고민과 갈등의 조각들이 모두 정리돼버리는 느낌!

이 책이 바로 그랬다.

 

책에는 좋은 책도 나쁜 책도 없다. 그저 내가 읽고 싶어 읽고, 선택하고, 그것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삶에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 하나를 건져 올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p.8)

 

5년여에 걸친 독서 속에서 작가 나름의 시선대로 추천하고 싶어 고른 책에 대한 리뷰가 네 가지 안내판을 단 산책로 지도처럼 책 속에 펼쳐져 있었다.

작가는 리뷰를 통해 일상의 지루함을 느낄 때, 지나간 사랑에 가슴 들썩일 때 등등 살아오면서 맞닥뜨릴 법한 여러 상황마다 책 안에서 건져 올렸던 메시지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할 때 산책을 하며 마음을 달래듯 작가가 그려놓은 산책로를 따라 누구나의 고민이었을 법한 생각을 엿보며 공감하는 기분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즐거운 순간이었다.

재미난 내용의 소설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문적인 내용으로 무장한 인문 교양서적이라 하기도 뭐한 정체불명의 책에 대한, 책을 향한, 처음부터 끝까지 책, 책, 책이라고 마냥 이야기하는 그런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을 넘길 때 느끼던 설레고 흥분되는 기분이라니.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짝사랑보다 더 반갑고 좋았다면 내가 조금은 이상한 걸까.

 

책은 참 조용하면서도 힘이 센 존재다. 우리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며 한 권의 책이 다음 책을 갈구하게 만든다. 자꾸만 서점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하고 그곳에서 마음의 풍요로움과 안정을 찾게 한다.(p.57)

 

이미 읽었던 책에서부터 처음 들어본 낯선 책까지 도서관 서가를, 혹은 서점을 돌아다니며 작가와 책에 대해 이런 저런 대화를 깊이 있게 나눈 듯한 느낌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웃음을 피워 물었다.

이 세상엔 죽을 때까지 읽고 읽어도 못다 읽을 책이 가득하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책을 사랑하고 독서를 사랑하며 이 감상을 소통하고 싶어 하는 작가처럼 나 역시 책이 있어 오늘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