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속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갖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상상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버스에서 낯선이의 발을 밟았다거나 잘못 보낸 문자나 메일 때문에 낯선 상대의 연락을 받을 때 등등. 별 볼 일 없는 스침이 별 볼 일 있는 인연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류의 유쾌한 상상.
이 소설은 그런 상상을 작가가 공항에서 실제 겪은 작은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실감나게 그려낸 것이었다.

소설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는 현대인의 생활 풍경의 한 면, 그리고 판타지

공항의 한 카페에서 부딪히면서 핸드폰이 바뀐 두 남녀.
첫 만남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음에도 호기심에 이끌려 상대의 핸드폰 속을 들여다보게 되고 서로를 알아감에 따라 지구 반대편에 살던 전혀 상관없던 서로가 각자의 인생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는 그런 전개다.

보통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은 잦은 우연한 만남과 그속에서 생겨난 대화들 때문인데 반해 소설 속 두 사람은 각자의 삶터에서 서로의 정보(핸드폰의 사진과 문자, 인터넷 검색)를 통해 상대를 알아가고 정보의 이면에 숨은 내용을 궁금해한다.
남의 핸드폰을 열어보고 그 사람에 대해 컴퓨터로 검색하는 행동이 실제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얼마 전까지 인기를 끌었던 미니홈피나 여전히 널리 애용되며 정보의 장이 되고 있는 블로그의 예를 보면 그럴 법 하다 싶었다.
어쩌면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타인의 삶을 엿보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이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핸드폰을 매개로한 소통, 직접적인 만남이 아닌 정보를 통한 접촉 등 현대인의 대인관계 패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오프라인을 통해서도 아름답게 이어진다.
대개는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글의 프롤로그처럼 잠못이루며 자칫 범죄에 이용되지 않을 까 걱정하는게 대부분이며 핸드폰은 되돌려 받지 못하는게 현실이지만 이야기인 관계로 글은 서스펜스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어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전개된다.
허나 아쉽게도 언제나 작가의 소설에서 맡을 수 있었던 특유의 판타지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사유의 향기는 다소 약했다.
하긴 주은 핸드폰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 자체가 판타지일 지 모르겠다.

쉽고 재미있게 읽었으나 전작들만큼 여운을 느끼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알츠하이머라는 주홍글씨를 단 한 여자의 이야기

조발성 알츠하이머가 유전에 의한 발병이라는 게 충격이었다. 이 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식을 낳을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운명의 굴레'로 대변되는 인생의 많은 제약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민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누구라도 고민할 것이다.
그래도 자식을 낳아 생을 바라보게 할 것인가?

만일 내 몸의 모든 세포에 이 유전자가, 이 운명이 들어있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자식들을 낳았을까, 아니면 임신을 피했을까? 자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감수분열의 주사위를 걸리는 모험을 감행했을까? 나의 호박색 눈, 존의 매부리코, 나의 PSI 유전자.
물론 지금은 애나와 톰, 리디아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식들이 태어나기 전이었다면, 그리하여 부모가 되기 전엔 알 수 없는 자식에 대한 원초적인 사랑을 체험하기 전이었다면, 그랬다면 차라리 자식을 낳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을까? (p.138)

최고의 지성으로 칠만한 하버드의 유능한 교수로서, 특히 아이를 기르는 여성으로서 그동안에 이루어 놓은 것을 일순간 무효화시키는 경험이 굉장히 비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력이나 명예, 업적이 생의 의미의 전부는 아니래도 밖을 나설 때 내가 입는 옷과 같은 의미이면서 일정부분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할때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 자부하고 지내던 자신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겪고 있는 과정을 읽어가는 데 가슴이 찡 했다.
한편으론 나 또한 이런 증상의 사람 앞을 피하거나 도망칠게 분명하기에 더 가슴이 아팠다.

"정말 유감이에요."
그런 말을 남기곤 황급히 그녀 곁을 떠났다. 우연히 마주치면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리 자주 마주치진 않았다. 그들이 정신없이 바쁜 데 비해 앨리스는 한가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앨리스와 마주치는 걸 일부러 피하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녀와 대면하는 건 곧 그녀의 정신적 결함과 대면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신에게도 눈깜짝할 사이에 그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앨리스와의 대면을 두려워했다. (p.240)

엘리스는 자신이 퇴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치매의 구멍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게 느껴졌다. 혼자서.
"난 혼자야, 혼자야, 혼자야."
그녀는 신음처럼 그 말을 내뱉었고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외로운 진실의 구멍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p.278)

어느 책에선가 '병에 걸리면 외로운 법'이라는 말을 읽은게 기억났다. 엘리스의 외로움과 일상이 무너져 내리는 걸 피부로 느끼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모습이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아픔을 공유할 동지들을 찾아나선 것에 마음의 박수를 쳤다.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었을테니까.
세상 누구든, 설령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가족일지라도, 내가 겪는 아픔과 고통의 무게만큼 느끼지 못하니까.

저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알츠하이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최대한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p.325)

가장 기억에 남는 글귀였다. 단순하지만 처연했다. 사람이 타인의 긍정적인 부분을 가장 먼저 기억하고 떠올려주어야 하는 또 하나의 분명한 예처럼 보였다. 어느 누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싶겠는가.
그래! 비록 기억을 잃고 무너져내리는 삶을 견디고 있는 알츠하이머 환자일지라도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부담없이 읽고 싶은 맘에 훈훈한 이야기일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을 고르다 책장에서 눈에 띤 게 이거였다.
'신의 손'을 가진 의사는 없어도 이 병원에서는 기적이 일어난다, 는 띠지의 소개말. 충분히 기대해볼 만했다.

어려운 의료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따스한 시선으로 환자를 대하려 노력하는 한 괴짜의사의 일상 카르테!

작가는 의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결하면서 현장감 넘치는 문장으로 의료현장과 그 안에 담긴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 하지만 무엇이 '좋은 의사'를 만드는가. 이는 내 머릿속에 깊게 뿌리박혀 있는 지상 최대의 난제이다. (p.61)

주인공이 의사라는 것만으로 왠지 사랑과 봉사, 희생과 같은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내가 가진 좋은 의사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다. 의사는 모름지기 '하얀 거탑'이나 '브레인'의 주인공들이 추구하던 성공을 향한 욕망과는 거리가 먼, 조금은 금전적인 면에서도 초월한 존재이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건이 좋은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기회를 거절하고 굳이 환경이 열악한 지방병원에서 사서 고생하는 주인공이나 웬만한 의사들도 포기한 환자들을 받아들이고 다독이는 병원이나 모두 괴짜스럽게 느꼈다. 요새 이런 게 어디 있나 싶어서.
스스로 느끼기에 완전 모순된 감정이었다.

"선생님도 고생이 많으시네. 이런 노인네의 추한 모습을 함께 해야 한다니 말이어."
미소 짓는 노인의 얼굴은 '상쾌하다'는 형용사가 어울릴 만큼 밝고 온화했다.
거기에는 의사도, 피로도, 최첨단 약의 효과도 모조리 비웃는 듯한 당당한 '생명의 형태'만이 있었다.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비애, 어디로 쏟아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분노라는 것이 확실히 존재한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녀석은 때때로 잊어버렸을 때쯤 내 곁으로 다가와 내 자신감에 도끼를 휘둘러 발밑을 흔들고, 감상이라는 이름의 전혀 건설적이지 않은 생각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나는 다시금 실감한다.
'슬퍼하는 건 질색이야.' (p.90)

인생이란 특별한 기술이나 재능으로 마법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난 그 발밑 흙덩이 아래, 처음부터 묻혀 있는 게 아닐까.
...당연한 일처럼, 이전부터 결론은 쭉 거기 있었던 것이다.
...강을 막고 산을 깎아 돌진하는 것만이 인생이 아니다. 여기저기 묻혀 있는 소중한 것들을 정성껏 파내어 쌓는 것 또한 인생이다. (p.258)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너무 무겁지도 않아 좋았던 독서였다.
모순된 생각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던 가슴의 한 귀퉁이가 따스했던 건 그래도 어딘가에는 이런 병원과 의사가 있을 지 모른다는 놓기 싫은 동화적 기대와 상상 탓이리라. 하루에도 수십 건 사건사고가 보도되는 현실이래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 고 믿고 싶은 것처럼.
어쨋거나 요즘 같은 실리주의 시대에 이런 괴짜스런 인물들이 많이 고프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좀 고달플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