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구하던 꿈이 좌절되거나 내일이 오는 걸 기뻐할 수 없게 된 순간이 유쾌할 리는 없다.
그렇기에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듯한 막막함이 짓누르는 시간을 겪어 본 사람은 누구나 입가에 유쾌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때, 그 시간을 가볍게 이야기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나이를 먹고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 같이 여겨졌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의 괴로움과 좌절이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던 생의 전환점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런 게 바로 삶의 묘미일까?
절망과 희망의 두 이름이 동전의 양면처럼 얼굴을 맞대고 서있다는 신의 장난 같은 말처럼.
그 느낌에는 축복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오래도록 많은 것을 찾아다녔는데, 그게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중략)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무언가를 잃었다는 느낌이 줄곧 들었다.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는 알았을 테지만 설마 이것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오래도록 외로웠는데 이게 없어서 그랬던 거였다. 너무도 외로워서,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다. 내 혼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안의 빛과 바깥에서 쏟아지는 아름답고 투명한 빛, 그리고 둘 사이에 피어난 빛이 모두 하나가 되어 미래를 비추고 있었다.(p.57)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읽는 이의 가슴을 움직이는 감성을 지닌 '바나나'가 들려주는 다섯 편의 단편.
사랑하는 줄 모르고 있다 헤어진 후 뒤늦게 알게 된 자신의 감정, 기억에 없는 엄마로부터 학대 받았다는 것이 어긋난 추억이었다는 깨달음, 이루어지기 어려운 짝사랑이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한 기대, 마지막 사랑일 줄 알았던 남자로부터의 배신으로 엉망진창이 된 기분에 우연히 찾아온 선물 같은 행복.
진한 괴로움과 고통이었던 사건이 살면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니 기적이고 축복이었음을 이야기하는 다섯 가지 이야기는 막다른 골목 같은 시간 덕에 평소의 자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과 겪지 않았을 경험을 하게 되고 인생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 은연중에 바라고 있던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내 마음속 보물 상자 같은 곳에 간직되어 어떤 상황에서 보았는지, 어떤 기분으로 보았는지, 까맣게 잊힌 후에도 내가 죽을 때 행복의 상징으로 반짝반짝 빛나며 나를 데리러 와 줄 광경과 하나가 되리라.(p.226)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사라지는 생의 아픔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는 살면서 겪은, 혹은 지금 겪고 있을 괴로움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 감춰진 찬란한 빛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기억들이 '행복'의 상징으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또는 언젠가 자리 잡게 될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다독이는 듯 했다.
'또 다른 어두움이 찾아와도 그 고통에게 인사하세요. 이 삶을 굴곡지게 하는 시간이여, 안녕!'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