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했던 내용의 에세이가 아니었다.
정원에 관한 작가의 경험을 듣고 싶었고 유학과정 중에 겪은 에피소드들이 궁금했다.
하지만 책은 기대를 빗겨나 작가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그간 힘들었던 마음을 추스르고 다독이기 위해 휴가 차 떠났던 영국의 한 마을에서의 일기를 닮은 사색의 기록이었다.
지난 삶에서 느낀 것을 먼 이국 땅 어느 시골 마을에서 정리한 내용이랄까. 그래서 소소한 하루하루와 그안에 숨은 작가만의 생의 철학을 전해 듣는 기분이었다.

젊은 시절, 노래의 가사처럼 누군가 '당신은 내 인생의 태양이고, 내 눈에 사과'라고 나에게 말해주길 바랐는데 지금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다. (p.40)

가족은 사랑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미안함과 고마움이 쌓여 서로에게 등을 빌려줄 수 있는 산이 되는 듯하다. (p.142)

호수의 물결이 햇살에 정신없이 반짝거린다. 내 눈에 이토록 아름다운 반짝거림이 실은 잔물결의 부대낌이다. 삶이 그런 가 보다. 나에게 지독한 부대낌이 누군가의 눈에는 빛나는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p.153)

어떤 맘은 그 나이가 되지 않고는 느껴지지 않고, 깨달아지질 않는다. 그래서 맘 아프게 아무리 누가 말해주고 경고해주어도 우린 그 나이가 되지 않고는 왜 삶이 그러한지를 이해 못하고 어김없이 같은 실수를 하고 지나가는 모양이다. (p.192)

이 삶이 지금보다 천천히 흘러가기를,
이 삶이 지금보다 덜 싸우며 살게 되기를,
이 삶이 지금보다 조금 더 초록이기를. (p.194)

누구나 지금 가고 있는 인생의 길이 그러하지 않을까? 조금은 아리고, 조금은 슬프고, 그리고 정말 외로운 길.
그 길을 지금 나 역시도 가고 있다. (p.202)

생각해보면 세상을 향해 날 기억해달라고 기를 쓰고 살아도 결국 나를 기억해주는 건 나 말고 누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사는 일이 점점 더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어가는 듯하다.

누군가는 내게 우리 삶이라는 게 결과적으로 잘 살 수도, 또 못 살 수도 있지만 설령 결과가 나빴다 할 지라도 선한 의지를 갖고 살았다면 그건 부끄럽지 않은 삶이 아니겠느냐고, 말해준 적이 있다. 그 의미를 이젠 좀 더 분명히 알 것도 같다. (p.208)

인간의 문명은 길을 만들며 시작됐다. 그런데 우리 손안의 손금처럼 길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길을 우리가 찾아내 이름 붙였을 뿐이다. 그래서 길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p.299)

사람이 머문 장소에는 그 사람의 맘이 남아 그가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그 사람의 에너지가 흐른다. 그래서 치열했던 미움의 장소에서는 다 지나간 일인데도 알 수 없는 슬픔이, 기원의 장소에서는 아린 그리움이, 고통이 가득 했을 곳에서는 서글픈 아픔이 남아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의 맘을 찌른다.

여행은 누군가를 만나기위해 떠나기도 하지만 누군가 머물렀던 그 장소에 나를 담아보기 위해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우릴 서로 어긋나게 해도 누군가가 앉아 있었을 그 공간 속에 나를 담아놓아 그리운 이가 내게 말을 건넬 거라 믿으며 가만히 기다려 본다. (p. 313)

에필로그 뒤, 부록처럼 붙여둔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산책이 애초에 내가 원했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정원을 배우고 정원에 대해 사색한 작가 나름의 철학을 약간 엿볼 수 있었던 대목이었고 앞부분에서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가치에 대해 좀 더 주목하게 했던 대목이기도 했다.

정원이 자연과 다른 건, 인간과 식물 사이에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난 그게 식물과 인간이 나누는 정精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원은 정원庭園이기도 하지만, 정원精園이기도 하다.(p.350)

누군가 정원사는 화가와 비슷한 일을 하는 직업이라고 했다. 물감 대신 식물로 대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 그 말이 맞다. 결국 정원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식물이 한다. 다만 디자이너는 식물이 지닌 색, 질감, 형태에 따라 식물을 심어주고, 식물이 스스로 빛내주길 기다릴 뿐이다. (p.359)

정원이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많은 상징과 메시지를 담아야 하는 것일까? 내가 심을 수 있을 정도의 꽃을 심고, 내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채소를 길러낼 수 있는 곳이라면 이걸로 정원은 충분하지 않을까?(p.368)

내용이 기대했던 방향에서 많이 빗겨나가 아쉬웠지만 나름대로 잘 읽은 에세이다.
좋은 글귀, 생각해 볼만한 글귀를 건진 것만으로도, 그 글귀속에서 작가의 삶과 사유의 내음을 맡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은 것 같다. 한 줄의 글에는 이미 수십, 수만의 분, 초가 녹아들어 있으니까. 그 안에 감춰진 시간의 정수가 뭔지 모르게 일침을 놓듯 일상에 파묻혀버려 지쳐가는 정신을 바로 서게 만드니까.

그런데 제목은 왜 하필이면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인지. 엄마가 아니라 '나'를 만나다, 인 것 같은 기분은 나만 느낀 것일까.

누구나 기억을 뒤적이면 아련한 향기가 묻어나는 옛 기억이 한 가지쯤 있다.
내겐 백사장을 뛰어다니며 파도를 놀리던 기억과 산기슭에서 매미 소리를 머리에 이고 긴 장대를 들고 수풀을 휘젖던 기억 등등이 머릿속에 사진처럼 박혀 있다.
현실에 지치고 잠깐의 여유가 목마를 때즈음, 당시에는 무료함을 쫓느라 했었던 놀이들이, 그 모습을 담은 풍경이 아련하게 가슴을 적신다.

'티티새'는 우리가 지난 기억을 추억하듯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영해 그린 그런 소설이었다.

많지 않은 분량, 간략하지만 어딘가 놓칠 수 없게 만드는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요시모토 바바나의 첫 장편이란 건 뒤늦게 알았다.
대표작이 '키친'이란 것 쯤은 읽지 않아도 알고 있을만큼 유명한 그녀였기에 이 책도 최근작 중 하나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웬걸, 아니었다. 그녀의 필력이 뛰어난 탓인가 보다.

그곳에서 벗어나보지 않으면 아무도 그 따스함을 깨닫지 못한다.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다음이 아니면, 자기가 그 안에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적당한 온도의 베일. 그것은 바다이며, 마을 전체이며, 이모네 가족 모두이며, 엄마이며, 그리고 멀리 사는 아버지였다. 그런 모든 것이 그 시절의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p.66)

츠구미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병약함에도 병의 무게에 눌리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런 성격의 누군가가 내 곁에 있었다면 그 괴팍함과 심술, 괴벽스러움에 혀를 내둘렀을지라도.

모두, 사실은 마음속에 잠들어 있을 끈적끈적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애쓰고 있다. 인생은 연기,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의미는 똑같아도, 내게는 환상이란 말보다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저녁,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아찔하도록 그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은 온갖 마음을, 모든 좋은 것과 더럽고 나쁜 것의 혼재를 껴안고, 자기 혼자서 그 무게를 떠받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주위에 있는 좋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친절을 베풀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혼자서. (p.76)

밤은 때로 이런 잔재주를 피운다. 공기가 천천히 어둠을 전하고, 다른 곳에서 이어진 마음이 손바닥에 별처럼 톡 떨어져, 사람을 깨운다. 이튿날 아침이면, 있었다는 것조차 희미해지고, 빛에 뒤섞여 버린다. 그리고 그런 밤은 길다. 한없이 길고, 보석처럼 빛난다. (p.145)

사야지 사야지 하다 모르는 사이 품절된데다 도서관에서조차 만날기회가 좀처럼없었던 소설로,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고전분투를 떠올리면 웃음이 나오는 책이다. 그 놈의 책이 뭐기에.

"아직도 전에 사귀던 사람이 좋아?"
"모르겠어요. 길에서 전에 같이 듣던 곡을 들으면 몸이 부서질 것 같고, 생각이 날 때마다 몇 번이고 내달리려고 하고. 그렇게 감정이 솟아 오르지만 그렇다고 다시 되돌릴 생각은 없어요.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아마 죽고말 거예요." (p. 98)

상대를 빛으로 끌어낼 수 있다 확신했던 사랑이 어이없게 깨진 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혼란을 겪고 있는 주인공이 따스한 지인들 속에서 한 발 한 발 회복의 시간을 갖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었다.

사실 20대가 지나고 보니 타인의 행복을 빌기 전에 내가 행복해야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순수성에 반해서 상대의 무엇이 되어 어둠에 묻힌 상대를 변화시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식의 연애는 고개를 내젖게 된다. 오래 가기 힘들며 건강한 관계가 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리라.
이런 면에선 나이듦이 참 멋없다.

아무튼 젊은 감성을 지닌 작가이기에 이런 연애성장통을 진지하게 그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거기다 회복의 손길을 자신의 가족이 아닌 친구와 그의 가족이 내미는 것, 회복의 장소가 가족과 떨어진 독립된 공간이라는 설정에서 작가의 풋풋한 10대의 감성을 맡을 수 있었다. 그 나이면 의례 가슴에 품곤 하는 친구나 독립에 대한 이상향의 향수를 말이다.

자기가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에당초 도를 지나친 걸지도 몰라. (p.98)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노다야는 나날이 성장하며 살아가고 있어.
... (중략) 두 사람 관계는 이미 완전히 끝난 거야. 그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야. 아픔은 후유증 같은 거야. 시간이 제멋대로 흘러서 낫게 해 줄 거야. (p. 120)

국내에는 몇 작품 소개되지 않았고 이 소설로 처음 접했지만 꽤 솜씨 있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큰 곰이 오기 전에 잘자'라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근간으로 소개된 걸 본 적이 있는데 언제쯤 만날 수 있으려나. 오늘따라 시간의 파고에 좀 더 성장했을 작가의 작품 세계가 더욱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