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유리 빛깔이 아니라 안개 속을 헤매는 것같았다. 남자주인공의 상황이 명쾌하게 잡히질 않아 책을 읽으며 몹시 더듬거렸다.
그렇게 소설을 다 읽고 나니 주인공과 함께 작가의 손이 이끄는대로 상상의 바다에 깊이 빠졌다가 걸어나온 느낌이었다.

누구나 가슴속에 바다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침몰시켜 버리는, 때로는 자기 자신조차도 완전히 함몰되어 버리는...... 그래서 그 바다는 숨어있다. 아니, 숨겨져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매혹적이기 때문에, 또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p. 6)

그들이 공유하는 숫자를, 그들이 공유하는 음악을, 그들이 공유하는 그 빛깔을...... 나도 갖고 싶다. 훔쳐서라도...... 갖고 싶다. 어느날 문득 내게로 밀려든 깊은 바다, 그 빛깔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갖고 싶다. (p. 213)

아무 것에도 특별한 반응 없이 그저 살아온 '나'가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한 남자에게 미친 듯이 빠져들고 그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감정을 깊이있게 그려내고 있었다.

약혼녀가 있는 상대, 그것도 한 달후면 결혼식을 할 그에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격정에 떠밀리듯 빠져 버리는 '나'.
주인공의 상황은 보통은 동경하지만 내심 두려워 뛰어들지 못하는 넘실대는 파도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목도, 작가의 서문에도 바다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일까.

"행운이 널 찾아왔구나. 아직 젊은 나이에...... 참 다행스러운 일이야.
(중략) 그렇게 누군가에게 빠져드는 시간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거든. 짧은 순간이라도 넌 그걸 누렸잖아." (p. 617)

우울한 안개속을 헤매듯 '나'의 감정을 쫓아 우유부단한 두 연인의 태도에 혀를 차다가, 공감하다가, 고개를 내젖다가, 를 반복하는 사이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예상 밖의 결말에 정신이 번쩍났다.
표현이 다소 엉뚱하지만 비온 뒤 청명한 하늘을 만난 기분이랄까. 슬픈 결말이어도 뭔가 명쾌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무튼 읽으면 빠져드는데 앞의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는, 그렇다고 재미없는 것도 아닌, 애매한 그런 소설이었다.
책을 읽을 때 너무 피곤했던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구한말의 궁녀를 소재로 했다는 소개에 궁금증이 일어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 '무덤 속 그림'을 통해 작품세계를 한 번 접한 적 있는 작가의 소설이었다. 순장을 소재로 고대 국가 부여라는 배경의 글이었던가. 기억 나는 대로라면 그렇다.

'궁녀 학이'는 개화기 고종이 즉위하고 있던 시절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궁에 궁녀로 들어간 한 소녀가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궁을 나오게 된 사연을 그리고 있다.
그 궁인을 어머니로 둔 할머니가 손녀에게 옛이야기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사실감을 주기 위한 장치였는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는 듯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이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다. 서양 말을 배운 지 일 년이 다 되었다. 그동안 책이나 그림을 통해 서양에서는 여자들도 남자와 같이 대우받고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남자에게 서양말을 배웠다는 이유로 평생 죄인의 표시를 달고 살아야 한다니. 학이는 밤새 여자로 태어난 것과 궁녀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p.146)

청소년을 대상으로 했기에 글은 깊이감이 얕고 문장의 색도 옅었다.
그러나 쉽지 않은 궁녀의 삶과 극변하는 시대 속에 여인의 지위에 대한 고민 등을 엿보는 재미가 있었다.

제목이 좋아서, 표지가 뭔지 모르게 마음을 잡아끌어 사게 된 책이었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절. 천주학책을 필사했다는 이유로 관에서 매질을 당한 아버지가 죽은 뒤 장이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서점 주인인 최서쾌 밑에서 필사쟁이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책과 노니는 집'은 장이라는 아이의 삶을 조명하면서 천주교 박해라는 시대적 상황과 언문 소설을 널리 읽는 사회적 분위기, 책을 빌려주는 가게며 책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는 사람, 복사기가 없던 시절의 책을 필사하는 것이 하나의 업일 수 있는 시절의 모습을 슬며시 엿볼 수 있었다.
역사적 상황보단 그 시절을 사는 주인공의 입장과 성장에 초점이 맞춰있어 예측할 수 없는 결말 탓에 좀 더 재미있게 읽을 수있었다.
이 아이는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갈지 궁금해 나름대로 상상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책을 빌려가던 기생 밑에 있던 소녀와 좋은 인연을 이어갔을까. 장이에게 책을 사랑하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하던 맘씨 좋은 홍교리는 여전히 장이와 교류할까. 홍교리가 이름 붙여준 장이의 책방 '책과 노니는 집'은 어떤 모습으로 꾸려졌을까.
이야기 한 편에 여러 상상을 얹어보며 짧은 글이었으나 깊고 뜨듯하게 읽은 시간이었다.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두고 아껴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가을부터 준비하듯 나도 책을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당장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 (p.78)

책을 사랑하고 수집욕을 가진 이라면 공감이 가는 말일 듯싶다.
나 역시 열심히 읽기는 하나 나날이 늘어가는 서가의 책을 보며 '이거, 욕심이 과한 건 아닌가.'란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책방을 둘러보러 갈 때면 새로운 이야기를 담은 책에 손길이 가고 품에 담아 가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끓어오르곤 한다.
주문한 책이 올때마다 혀를 차시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떠오른다.
"쯪, 저 많은 책 어찌할꼬. 도서관이라도 하나 차릴 작정인가."

책이 없어서 못 읽지, 가려 읽지는 않는다. 좋으면 좋은데로 나쁘면 나쁜대로 모두 공부가 되는 것이 책이다. 당장 필요치 않은 지식 같아도 뜻밖에 유용하게 쓰일 때도 많고. (p.153)

어려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느냐?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