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생애를 걸고 추구했던 목표들이 막 실현되려는 순간, '이제 그만하지.'라며 운명이 뒷덜미를 잡아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물론 나는 100% 공감할 수 없다.

꿈이 실현되려하는 정점까지 가보지 않은데다가 상실의 아픔과 절망을 뿌리 깊게 겪어보지 않은 탓이다. 쉬운 인생은 세상 어디에도 없겠지만 작가와 같은 기막힌 상황은 정말 흔하지 않을테니까.

 

암은 내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건강한 사람의 눈에는 내 인생이 이미 끝나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는 아직 진행 중인 내 인생을 관조하듯 바라보며, 작은 일에서조차 의미를 찾는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통증을 제외하면, 숨쉴 수 있는 이 순간이 즐겁고 고맙다.

...(중략) 이제 나는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바친다.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제 알 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더 즐거워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살아갈 날들이 많지 않을테니까. (p.486)

 

나는 비록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이다. 설령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날 불쑥 죽음이 닥쳐온다 해도 그건 결코 내가 나약해서 포기한 것이 아니다.

"운명이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해도, 결코 빼앗지 못할 단 한 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선택의 권리'일 것이다." (p.804)

 

발병 때부터 죽음을 맞이한 어느 순간까지 작가는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고전분투한다. 절망에 짓눌리는 가슴을 펴고 슬픔에 젖어드는 얼굴에 미소를 덮고 보석보다 귀한 하루를 살아가는 그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라 여기며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곤 하는게 대부분인 우리에게 '살아있음'이 주는 선물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같은 말인데도 다른 느낌으로 반복해서 말해준다.

 

어쩌면 병이란, 우리가 평생 살아도 깨닫지 못할 그런 사랑을 일깨워 주기 위한 가장 극단적인 처방일지도 모른다.

병은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그보다 큰 행복을 발견하게 해준다. 우리는 그것을 은연 중 인식하기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삶을 쥐고 있는 손을 놓지 않는 것이다.(p.602)

 

신이 보내는 충고 같은 이런 메시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 자주 들으며 살아가건만 왜 매번 잊어버리고 이 순간, 오늘의 반짝거림에 쉽게 무디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무료하고 지겹다 불평하고 자괴감에 쉽게 빠져드는 자신이 부끄럽다. 작가가 남기고 떠난 삶과 오늘의 소중함을 다시금 마음에 담아 보아야겠다.

지구 상 어딘가에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그곳에는 수십 명의 정원사들이 꽃과 나무를 가꾸며 일하고 있다.

상상 만으로도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는 장면이다.

수백, 수천의 꽃들이 누군가의 소유로 사업화되어 수십 명의 정원사의 손길 하에 오랜 세월 피고 지고 있다니.

'부차트 가든'에 대한 이야기는 머릿속의 '미래의 내 집'처럼 이상향 그 자체였다.

넓은 마당이 있고 담을 따라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거기다 맑은 하늘이 바로 비치는 찰랑대는 물이 담긴 수영장이 옵션인 그런 집처럼 정말 이런 일터와 정원이 있을까 싶을 만큼 믿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새벽의 정원이야말로 나를 가장 편안하고 상쾌하게 만들어주는 풍경이다.

...(중략)이곳에서 일한 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하다. 아침 점호를 하듯 그들과 인사를 해나간다.

깊은 심호흡으로 밤새 더 신선해진 공기를 폐부 가득히 들이마시는 것이 첫 인사다. 그러고 나서는 꽃잎에 맺힌 이슬들과 인사를 나누고 여름햇살에 녹음을 더해가는 나무들과도 눈을 맞춘다. 잔디밭을 종종거리며 지렁이를 잡아 아침을 먹고 있는 진한 오렌지 색 가슴 깃이 예쁜 새, 로빈에게도 잘 잤느냐고 묻는다. 살며시 눈을 신으면 나의 오감이 모두 깨어날 준비를 갖춘다. (p.78)

 

고국인 한국에서 하던 일을 모두 접고 낯선 캐나다에 가서 돌연 정원사가 된 작가의 삶이 훈훈했다. 그 시간을 견디며 지낸 본인은 필사적이었을 지 모르지만 작가가 이야기

하는 '부차트 가든'에서의 하루 일과는 정말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삶으로 느껴졌다.

흙을 만지며 사는 삶을 꿈꾸나 현실에서는 베란다에 화분 하나 키우는 것조차 망설이는 자신을 떠올리며 작가의 용기 있는 선택을 살짝 질투했다.

 

이곳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전에는 무심결에 보아 넘겼던 꽃과 나무들을 새롭게 만나고 있다. 그리고 이 꽃과 나무들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다.

...(중략) 처음 맞닥뜨리는 이곳의 색다른 기업 문화도 나를 놀라게 했다. (p.24)

 

작은 금액이라도 함께 나누고, 자신의 재주와 기술로 봉사하는 것이 바로 캐나다식 기부 문화다. 자원봉사의 나라, 성숙한 기부문화의 나라라는 수식어들이 따라 붙는 게 당연하다. (p.443)

 

동물원처럼 '가든'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것과 더불어 캐나다라는 익숙하지만 잘 몰랐던 나라의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꽃과 나무에게도 인간처럼 고향이 존재하고 인간의 성별처럼 암수가 따로 있는 식물과 자라면서 성이 바뀌는 특이한 종류도 있다는 사실 등등은 에세이를 읽으며 덤으로 얻게 된 흥미로운 정보였다.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본문 중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라. 가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지만 간간히 출간되는 여행기로 목마름을 달랠 수 있어 좋다.

그리하여 이번엔 유럽의 중심 도시가 아닌 비주류 도시를 소개한 여행기를 손에 들었다.

작가의 말처럼 숙명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에 이끌린 점도 있다. 나 역시 언제나 변두리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기에.

 

변방이라는 말에는 어쩐지 숙명적으로 느껴지는 애환이 있다. 그리고 묘한 친밀감도 있다.

애환은 중심에서 떨어져서 그곳을 동경하는 존재들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이다. 친밀감은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필자를 포함한 사람들 대부분이 사는 곳이 중심에서 떨어진 변방이며, 그들 대다수의 삶이 '변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는 변방에서 변두리적인 삶을 사는 필자의 변방 여행기다.(본문 중에서)

 

비주류 문화를 품은 유럽의 도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

 

작가는 제목에 어울리게 이탈리아, 하면 버릇처럼 떠올릴 베니스나 피렌체 등이 아닌 시에나며 루카, 

스페인에서는 그라나다와 세비야. 이렇게 어디서 들어보기는 했지만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도시의 거리를 걷고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어떤 도시의 이미지는 단지 시각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도시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이지 않는 예술과 문화의 분위기가 도시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니 그저 눈으로 보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고 역사나 의미도 없는 공허한 기념물이나 짓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영혼도 없는 콘크리트와 철근덩어리로 도시가 만들어질까?
한 도시의 이미지는 결코 그런 날림 공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록 도시는 더 추해진다.

그보다는 문화와 예술을 부응하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파리를 사랑하는 것은 거기에 많은 예술가들의 예술작품이 있고, 그들의 삶과 사람의 이야기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피렌체를 사랑하는 것은 그 도시에 르네상스가 있기 때문이다.

더블린을 사랑하는 것은 그 거리에 제임스 조이스가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감싸는 그런 분위기가 단지 철근 덩어리로만 보일 수도 있는 에펠탑을 예술작품으로 만든다.

만일 그 탑이 미국의 어느 고도로 산업화된 대도시, 예를 들어 자동차로 유명한 도시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거기에 파리의 에펠탑 같은 아우라가 생겨날까? 단지 보기 흉한 구조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본문 중에서)

 

이런저런 대수롭지 않은 것들의 원조를 따지면서 우월함을 내세우려는 것은 그저 과거에 기대기나 하는 가련한 콤플렉스일 뿐이다.

원래 우리가 전해준 것이니, 우리가 전에는 더 앞섰다니 하고 눈을 흘기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건 자신의 발전에도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든지, 이쪽에서 전해 받고 다시 저쪽으로 전해주면서,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키는 것이 문화와 예술이다. 비록 이전에는 후진국이라서 전해받은 것이라도 훌륭하게 흡수하고 발전시켜서

그야말로 청출어람이요, 후생가외의 수준에 오르면 그게 훨씬 훌륭하지 않은가.(본문 중에서)

 

여행기의 대부분은 건조했다. 때론 정보의 나열일 때도 있어서 흥미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각각의 도시 설명을 읽을 때는 지도가 첨부되어있었으면 더 좋았을 듯 싶었고

챕터마다 붙은 간략 여행 팁은 도리어 사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를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좋았던 것 같다.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과 도시가 있고 그들, 그곳이 만들어가는 문화가 있고. 그 다양함이 참 아름다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