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뒤돌아보게 한 한권의 책-『오래된 미래』

 

 

 

매일 반복되는 일상, 뭐가 그리 바쁜지 하루에 수십 통의 업무 전화를 하고, 서둘러 미팅을 하고 그렇게 늦은 퇴근을 해서는 지쳐 잠에 들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출근길의 분주함에 몸을 싣고...그렇다고 지금의 생활에 크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속에서도 나름의 소소한 재미는 언제나 있다. 하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이 허전함은 왜 일까!

 

자동차들이 내뿜는 후끈한 열기와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이글거리는 8월의 무더위를 피해 들어간 어느 작은 서점의 한 구석에서 우연히 보게 된 『오래된 미래』....책의 제목부터 뭔가 이율배반적인 느낌과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할머니의 해맑은 얼굴의 책 표지하며,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오래된 과거’면 몰라도 ‘오래된 미래’라니....

 

『오래된 미래』는 1992년 발간 이후 세계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책으로 서구세계와는 너무나도 다른 가치로 살아가는 라다크 마을 사람들을 통해 사회와 지구 전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1부 전통에 관하여는 1975년 언어학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런던대학교 동양언어학과의 학위논문을 준비하기 위해서 ‘라다크’라는 작은 마을을 방문하여,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화롭고 지혜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라다크는 서부 히말라야 고원의 황량하지만 아름다운 고장으로 빈약한 자원과 혹심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생활과 협동,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생태적 지혜를 통하여 천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고, 긴밀한 가족적 공동체적 삶속에서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안정을 누리며, 여성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2부 변화와 바람에 관하여는 1975년 인도 중앙정부의 결정에 따라 외국관광객에게 문호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라다크 전통문화가 외국 관광객들이 가지고 들어온 서구 문화와 가치관들에 의해 철저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전통적인 경제에서 시간은 넉넉했고 오직 계절의 변화에 의해서만 제한을 받았다. 할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생활은 인간적인 속도로 진행되었고, 누구든지 인내심을 가질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서구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현대경제는 시간을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바꾸어 놓았고, 시간은 값비싼 물건이 되었으며, 서구식 산업문화의 압력 밑에서 경제적으론 풍요로워졌지만 사회적․생태적으로 건전한 생활방식을 발전시켜온 온갖 다양한 토착적 지혜와 기술, 가족 공동체는 무너졌고, 심리적 안정은 사라졌으며, 서로간의 경쟁만이 가속화되었다. 바로 현재 우리의 모습처럼 말이다.

 

3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근본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토대 위에 서 있는 문화가 불행하게도 서구식 산업주의적 ‘개발’에 의해서 크게 파손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에 하나의 모범적인 사회 재조직의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라다크 사회의 회복을 위해 설립한 국제 민간기구인 ‘에콜로지 및 문화를 위한 국제협회 ISEC’의 구체적인 활동과 ‘라다크 프로젝트Ladakh Project’에 대한 소개와 활동 상황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서구식의 소모를 전제로 하는 개발의 폐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그들 토양에 맞는 새로운 가치의 정립과 발전을 이루어나가도록 설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식탁에 오르는 채소며, 고기며, 과일들은 made in China, made in USA가 점령한지 오래고, 우리의 땅에서 나고 자란 닭고기며 돼지고기보다 우리와 지구 반바퀴 이상 떨어진 먼곳에서부터 운송되어 들어온 호주산, 캐나다산이 더 저렴하게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OECD중 행복지수가 거의 꼴지에 머무르고 있는 나라, 주당 노동시간이 최다인 나라, 신생아 출산율은 최하인 나라, 노인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증가하는 청소년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나라. 그 옛날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즐길 줄 알던 우리의 고유한 문화들은 어디로 사라진건가! 외국인들에게 있어 ‘빨리 빨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되어 버린 지금...『오래된 미래』에서 보여주는 라다크의 전통문화의 붕괴가 남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친한 친구 녀석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다니다가 갑자기 그곳을 그만두고 농사를 짓겠다며 귀농을 한 것은 몇 년 전의 일이다. 가끔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친구가 직접 재배했다는 고구마를 보내와서 맛있게 먹기도 했으나, 직접 그곳에 가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근처에 갈 일이 생겨서 친구가 살고 있는 시골에 찾아간 적이 있다. 농촌생활이 아직은 완벽히 몸에 배지 않아 조금은 서툴지만..검게 그을린 친구의 얼굴에선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친구의 농촌생활은 편안해보였다.

 

친구의 구릿빛 환한 얼굴에서 책에서 본 라다크 사람인 ‘응가왕 팔조르’의 웃는 얼굴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라다크는 인도 잠무카슈미르주(州)에 속하는 카슈미르 동부 지역에서도 아주 오지에 있다. 저자는 어느 날 라다크 화가인 응가와 팔조르와 함께 카시미르의 스리나가르라는 도시로 함께 나간 일이 있는데 도시인들이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는 팔조르의 옷이며 모자, 장화 등을 보고 계속 조롱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팔조르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그곳에 간 것을 즐기고 있었고, 눈에 생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짓고 예절바르게 행동했다. 하지만 더 이상 참지 못한 저자는 “왜 화를 내지 않으세요?”하고 물었지만 “지 천?(무엇 때문에요?”이 그의 대답이었다. 저자의 눈에는 라다크 사람들은 억누를 수 없는 삶의 기쁨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졌다.

 

 

 

 

“만족감은 자신의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움직이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 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을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뭐냐?’이다.(p.108)“

 

빨리 빨리, 남보다 앞서야 하고 남 위에 군림해야 하는 생각들이 커져가고 있고, 변화와 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려 매일 매일을 정신없이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한 발 물러서 뒤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해준 책이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라다크의 전통 생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느낌이 있겠으나,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서구문명의 인간성 상실,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조용한 경종이 아닐런지...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야 제목 ‘오래된 미래’의 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가까이 두고 천천히 여유 있게 읽으면 딱 좋은 책이다.

 

 

 

 

책 『정의란 무엇인가』 vs 영화 『심장이 뛴다』

 

 

Episode 1.

책『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철도와 다섯 명의 인부’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기관사이고 기관차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습니다. 곧장 달려가면 철로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다섯 명의 인부가 죽게 되고, 비상 철로로 방향을 틀면 작업인부 한 명이 죽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수업에 참여한 대부분은 비상 철로로 방향을 틀어 한 명의 희생으로 다섯 명을 살리는 방법이 더 낫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이 수업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번에 ’당신은 기관사가 아니고, 철로 위에서 그 상황을 보게 되는 구경꾼인데, 앞에 있는 뚱보 한 명을 철로로 밀어 버리면 기차를 멈추게 할 수 있어 5명의 인부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섯 명을 살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 경우는 사람을 직접 미는 행위가 있으므로 그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위치를 돌리면 철로 아래로 떨어지는 원안에 뚱보가 있어서 나는 기관차의 핸들을 움직이는 것처럼 스위치를 조정할 수 있다면 그 행동은 정당한가?‘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집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pisode 2.

“1884년 조난당해 남대성양을 표류하던 더들리, 스티븐슨, 브룩스는 식량이 떨어지자 함께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17살 소년 리처드 파커를 죽여 그의 살과 피로 연명합니다. 그들은 구조 후 재판을 받게 되는데, 이들의 행동이 옳다, 정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측으로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설명합니다. 간단히 말해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 양쪽을 저울질했을 때 쾌락이 큰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공리주의자라면 위의 사례에 대해 한 사람의 죽음이 나머지 세 사람의 목숨을 살렸으니 파커 살해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주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분명히 살인행위이며, 개인의 자유가 타인에 의해 억압된 것이므로 옳지 않은 행위가 됩니다. 누군가 한명이 희생되어야할 이와 같은 경우에 누구를 희생 시키는게 옳은 것이며, 그 희생자는 어떻게 정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Episode 3.

이번에 당신은 이식수술을 담당하는 의사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5명의 절박한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한명은 심장이 필요하고, 한명은 폐, 한명은 신장, 한명은 간, 다섯 번째 환자는 췌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장기기증자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들이 죽는 모습을 보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문득 어떤 생각이 납니다. 옆방에는 건강한 남자가 건강검진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그게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당신은 방안으로 아주 조용히 들어가서 그의 장기를 꺼낼 수 있습니다. 그는 죽겠지만, 당신은 5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겁니까?

 

Episode 4.

이번에는 영화 『심장이 뛴다』의 이야기입니다. 심장병을 앓고 있는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연희(김윤진)는 어느날 중년 여성이 병원에 뇌사상태로 실려 오게 되고, 마침 딸과 같은 혈액형인 것을 알고는 심장이식을 위해 그녀의 가족들에게 돈을 주며 부탁을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인 휘도(박해일)는 그동안 막살아온 인생에 철없이 재혼한 엄마를 협박해가면서 돈을 뜯어낸 못된 아들이지만, 엄마의 병실을 찾아갔을 때 엄마가 꿈틀하는 것을 보고 엄마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심장을 빼내려는 것도 분하고 잘먹고 잘살고 있는 줄 알았던 엄마가 너무도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것도 분하고 그런 엄마에게 모질게 대했던 자신도 분해서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어 심장을 적출하는 수술을 하려는 응급차에 올라 자신이 싸인했던 동의문서를 찢고 응급차를 뺏어서 도주합니다. 하지만 딸의 수술을 할 수 있을 줄 알았고 딸에게 새로운 인생을 줄 수 있을 줄 알았던 연희는 순식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버렸고 그 심장이 아니면 더 이상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휘도의 어머니가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휘도에게 거액을 주면서 매달리게 됩니다. 연희는 딸을 위해 자신의 심장을 내줄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고 딸에게 못난 엄마를 가지게 해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착한 여인이지만 딸을 위해, 다급해진 연희는 불법거래전문 조팀장과 손을 잡고 휘도 엄마를 몰래 병원에서 퇴원시켜 수술을 하려하고, 이에 휘도는 그런 사실을 알고서 연희의 딸을 납치하게 되면서 하나의 심장을 둘러싼 뺏고 뺏기는 숨막히는 대결은 시작됩니다. 당신이 연희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는 당신이 휘도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쯤 되면 내 머릿속은 엉망으로 엉켜버리게 된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옳지 못한 일인가? 어떠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되는 ‘기준’은 있게 마련이다. 누구는 공리주의에 입각하여 결정을 하기도 하고, 누구는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결정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결정에는 어떠한 것이 ‘정의’인가가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되곤 한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론 분야의 세계적 학자이자, 공동체주의 이론의 대표적인 4대 이론가로 손꼽히는 샌델 교수의 실제 하버드대 강의 JUSTICE’를 바탕으로 쓴『정의란 무엇인가』. 7천명도 채 안되는 학부생 가운데 무려 천명의 학생들이 듣는 마이클 샌델의 ’JUSTICE’ 강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수업으로 손꼽힌다. ‘자유사회의 시민은 타인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된 때도 있는가?’ ‘도덕적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등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어려운 질문들을 설득력 있게 풀어간다.

지금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스무살의 청춘, 그 아련함..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고)

 

 

 

"그때의 우리는 그게 어느 시간이든 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다 더 이른 시간이어도 그가 내게 올 수 없는 시간은 없었고 내가 그에게 갈 수 있는 시간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의 우리는 언제든 서로를 향해 어서 와, 라고 대답했었다.(p.23)"

 

학생운동의 정점이었던 80년대! 그 시대를 살아온 선배들의 무용담을 안주삼아 마셔대던 쓰디쓴 소주잔들의 부딪침으로 많은 밤들을 달래던 내 스무 살의 대학시절...나와는 무관했던 투쟁의 목적들, 현실과 동떨어진 투쟁의 방법들. 무엇을 위한 고민이고 무엇을 하기 위한 시위인지도 분간 하지 못하면서도 맹렬히 화염병을 던지고, 민중가요를 목청껏 부르고, 시위 중에 빼앗은 전투경찰의 방패를 전리품인양 의기양양 손에 들고, 전투모에 소주를 따라 나눠 마시던 의미 없는 치기(稚氣)의 시간들...하지만 거기엔 그녀가 있었다. 그녀와 나! 고등어의 서슬 퍼런 비닐처럼 언제나 시대를 비판하고 혹독한 독설을 서슴지 않았던 그녀! 추운 겨울 강의실 복도에 커다란 종이를 쭈욱 깔아놓고선 이내 신발을 벗어 던지고 그 위에 올라 휙휙 대자보를 써내려가던 그녀! 그런 그녀를 그 끝에서 항상 바라보던 나! 우리는 그렇게 혼란의 시기를 언제나 함께 했었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p.157)"

 

 

세상의 끝에 위험하게 서 있던 그녀는 투옥과 정학을 반복하면서 학교와는 점점 멀어져 갔고, 나와는 너무 다른 세계로 그녀가 깊숙이 들어갈수록 우리의 다툼은 잦아졌고, 서로에게 깊은 생체기를 내는 비수 같은 논쟁의 연속..그렇게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내 곁을 떠나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재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짧았던 내 대학생활은 정리가 되었다. 생손톱을 뽑는 아픔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던 그녀에 대한 생각도 3년이라는 세상과의 어쩔 수 없는 단절은 슬픔도 절망도 무뎌지게 했고, 그녀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조금씩 치유되게 해 주었다.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강을 건너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네. 여러분은 불어난 강물을 삿대로 짚고 강을 건네주는 크리스토프이기만 한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기도 해. 때로는 크리스토프였다가 때로는 아이이기도 하며 서로가 서로를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실어 나르는 존재들이네. 스스로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게.(p.63)"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끔 신문에서 그녀의 사진과 인터뷰를 보곤 한다. 힘없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아직도 길거리에서 대답 없는 세상을 향해 정의를 외치고 있는 그녀! 누구는 그런 그녀를 ‘투사’라 하고 누구는 ‘약자들의 대변인’이라고 한다. 신문을 보다가 불현듯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윤교수가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해주던 크리스토프 이야기가 떠오른 건 아마도 내 기억의 저편에 남아있는 그녀의 지친 어깨 때문일 것이다.

 

한 아이가 마구 불어나기 시작한 강을 크리스토프에게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힘이 장사였던 크리스토프는 삿대 하나만을 들고 그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불어난 강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철근 같은 무게가 크리스토프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강물은 점점 더 불어나서 간신히 강 저편에 이르게 된다. 강가에 아이를 내려놓으며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너 때문에 내가 죽는 줄 알았다. 너는 이리 작은데 너무 무거워서 마치 이 세상 전체를 어깨에 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이는 사라지고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예수가 눈앞에 나타나서는 ‘그대가 방금 짊어진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대는 저 강물을 건널 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야기이다.

 

‘투사’이며 ‘약자들의 대변인’인 그녀는 크리스토프일까, 아니면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일까?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

 

나는 그녀에게 왜 크리스토프가 되어 주지 못했던가? 그녀와 나는 세상이라는 강을 건너는 서로가 크리스토프였으며, 세상 전체이며 창조자들이었다는 것을...지금에서야 나는 느낀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스무살의 청춘을 보냈지만 너무도 허무하게 스무살 이후의 청춘을 허비해버린 듯한..그렇게 치유의 시간은 고통을 수반했고 그녀와의 거리도 멀어지고 말았다.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우리는 항상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스무살의 그때보다 더 푸르른 크리스토프가 되어 있고, 나는 그 푸르른 크리스토프의 어깨에 올라탄 세상이 되어 있다. 서로에게 세상의 무게가 되어 서로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지만 스무살의 성장통(成長痛)은 우리 둘이 마주보는 것을 그때는 허락하지 않았나보다.

 

“내.가.그.쪽.으.로.갈.까?

내.가.그.쪽.으.로.갈.게.(에필로그)"

 

 

신문의 인터뷰 말미에는 ‘약자들의 대변인’답게 그녀의 연락 번호가 선명히 찍혀있다. “누군가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으세요?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000-000-0000”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겼던, 서로에게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못할 것만 같던 그 마음의 거리를 뒤로하고 나는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한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나야...잘 지냈지...”

그 짧은 한마디로도 우리는 바로 어제 통화를 한 사이처럼 서로를 알아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

“내.가.그.쪽.으.로.갈.까?”

“.....”